주전자로 막걸리를 파는 장터 앞의 선술집에서는 따로 안주를 시키지 않아도 곁들이 안주로 꼬막 무침에 생선 토막에 나물에 묵에 술국에다 나중에는 수박 두어 쪽까지 나온다. 그러니 남은 안주가 아까워서 한 주전자 더 시키고 그러면 안주가 다시 나온다. 꼭 한 잔씩만 하자고 들어갔다가 결국에는 안주 맛에 이끌려 지지벌겋게 거의 만취가 되어서 술집을 나서게 만든다.
--- p.153
'왜 아버지 같은 사람과 결혼했어요?'
그네의 어머니가 답한다.
'그이가 누구라는 건 동네에서 다들 알구 있었다.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타고 가는데 앞자리에 그이가 않아 있었어. 검은 물 들인 군복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 목덜미 아래로 비듬이 하얗게 떨어져 있더구나. 나는 그 비듬을 털어 주고 싶었어.'
--- p.43
'맛있는 음식에는 노동의 땀과, 나누어 먹는 즐거움의 활기, 오래 살던 땅, 죽을 때까지 언제나 함께 사는 식구, 낯설고 이질적인 것과의 화해와 만남, 사랑하는 사람과 보낸 며칠,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궁핍과 모자람이라는 조건이, 맛의 기억을 최상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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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젊어서부터 글을 쓰기로 작정을 했던 사람이고 '좋은 글을 쓰겠다'는 생각을 전장의 위험 속에서도 거의 강박관념이었다.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은 앞으로의 행복한 사생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한 여생으로서의 삶을 위해서였다.
--- p.22
나는 의영이와 함께 사동 사이에 있는 좁은 빈터를 빌려서 채소를 가꾸었다. 상추, 쑥갓, 케일, 열무는 씨를 뿌려서 가꾸고 고추, 가지, 오이, 호박, 깻잎 등속은 이른 봄에 비닐 조각을 얻어다가 온상을 만들어 모종을 내어서 옮겨 심었다. 그리고 가을철에는 배추를 모종하여 심었다.
우리는 텃밭 가꾸는 일에 흠뻑 빠졌고, 여름날 여린 열무청을 썰어 넣고 고추장으로 비벼 먹거나 라면 국수를 삶아 씻어서 열무를 썰어 넣고 비빔국수를 해 먹기도 하였다.
간장과 된장에 깻잎을 담가 두었다가 겨우내 먹기도 했는데, 특히 가을에 걷은 배추를 갈무리하여 겨우내 쌈도 싸 먹고 무쳐 먹기도 했다. 배추를 신문지에다 겹겹으로 싸서 매점에서 빌려 온 플라스틱 박스에 넣어서는 계단 밑 으슥한 비품 창고에 보관하면, 배추가 잎이 마르지도 않고 겨우내 방금 밭에서 뽑은 것처럼 싱싱했다.
---p. 126-127
그 병사도 남들이 모두 깊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먹기 시작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하여튼 와사삭와사삭 씹어서 그 건빵 다섯 봉지를 새벽녘에 모두 해치웠건만, 취침 시간에 화장실을 가도 신고를 해야 되는 터에 물을 마실 재간은 없었나 보다. 건빵이 비상 식량인 것은 뱃속에 들어가면 몇 배로 불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위장은 물론 식도까지 꽉 막힐 수밖에. 그래서 한 젊은 병사는 행복하게 숨을 거두었다.
--- p.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