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전
이문재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이 여름, 깊은 가뭄으로 흠뻑 말라 있으니
와서, 와서들 화전하여라
나의 후회들 화력 좋을 터
내 부끄러움들 오래 불에 탈 터
나의 그 많던 그희망들 기름진 재가 될 터
와서, 장구 북 꽹과리 징 치며
불, 불 질러라. 불질러 한 몇 년 살아라
한때 나의 모든 사랑, 화전이었으니
그대와 만난 자리 늘 까맣게 타버렸으니
서툴고 성급해 거두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다른 숲을 찾았으니
이제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와서 불질러라, 불
-시집' 마음의 오지' 에서
--- p.14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 보니 스물네 살이었다.신은,꼭꼭 머리카락까지 조
리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치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
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
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 발을 툭툭 털어
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더 행복해져도 괜찮았
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더 오래 거짓
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문득 깨
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
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 2000/08/29 (97729jin)
지금도 누군가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있겠지만, 그래서 할 수 없는 인간밖에 더는 못 되겠지만 이제는 죄가 깊어 쐐기풀 옷으로도 구제받지 못할 정도라 할지라도......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이 한구절 앞에 마음을 비벼본다. 무릎을 꿇어 본다.
--- p.111
자연에 대하여 - 정현종-
자연은 왜 위대한가.
왜냐하면
그건 우리를 죽여주니까.
마음을 일으키고
몸을 되살리며
하여간 우리를
죽여주니까.
--- p.20
우리 헤어질 땐
서로 가는 곳을 말하지 말자.
너에게는 나를 떠나버릴 힘만을
나에게는 그걸 노래부를 힘만을
눈이 왔다,열한시
펑펑 눈이 왔다, 열한시.
--황동규의 한밤으로 중에서
--- p.142
세상의 소란 따윈 근접도 못할 고요 속에 놓이는 순간을 올 겨울 몇 번이나 경험했는지. 마음이 그처럼 고요해질 때가 어디 눈 내릴 때 뿐이겠는가. 새 봄이 와서 세상에 연둣빛이 날릴 때, 단풍에 의해 눈 속에 붉은 물이 차 오를 때, 갓 태어난 아이의 분홍색 손가락이나 발가락들을 볼 때, 마더 테레사의 묵상과 대면할 때, 학문의 경지에 오른 분의 담백한 말씀을 들을 때, 이제는 병을 친구 삼아 살아야지 하며 깨끗하게 늙은 어른과 마주 앉아 있을때..... 문득 고요해지는 순간들, 나는 그 순간을 時의 시간이라 여겨왔다.
시에 대한 나의 동경은 시에 대한 질투이기도 할 것이다. 좋은 시를 읽을 때마다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 사나흘씩 장설이 내리는 그 마을의 마루가 짧은 집, 그 집 방안에 앉아 문풍지에 어리는 눈 그림자를 바라봤던 때와 같은 고요의 순간을, 그런 날 바깥에서 돌아온 누군가 토방에 눈 묻은 신발을 툭툭 터는 소리를 듣는 것 같은 기쁨의 순간을 동시에 누리곤 했다.
시를 읽고 글을 덧붙이는 시간은 문득 나를 고요하게 하고 굳은살을 베어가 준 축복의 시간이었다. 그것이 바로 시의 힘 아니겠는가. 시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도 이 마음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 <시집을 엮으며>에서
사람
-박 찬-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생각이 무슨 솔굉이처럼 뭉쳐
팍팍한 사람 말고
새참무렵
또랑에 휘휘 손 씻고
쉰내 나는 보리밥 한 사발
찬물에 말아 나눌
낯 모를 순한 사람
그런 사람 하나쯤 만나고 싶다.
--- p.64
...내가 없는 꿈. 그런 꿈. 그런 꿈을 꾸고 난 자리에서는 얼른 일어나지 못한다. 꿈을 깬 후에도 돌아오지 않는 나를 기다리는 시간. 창문도 없고 지붕도 없는 허허벌판에 앉아있는 것만 같은 느낌
--- p.120
...내가 없는 꿈. 그런 꿈. 그런 꿈을 꾸고 난 자리에서는 얼른 일어나지 못한다. 꿈을 깬 후에도 돌아오지 않는 나를 기다리는 시간. 창문도 없고 지붕도 없는 허허벌판에 앉아있는 것만 같은 느낌
--- p.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