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金敎臣, 1901-1945)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사학의 교사로 일하였던 교육자이다. 동시에 무교회주의를 표방한 기독성도(基督聖徒)로서 동인들과 함께 『성서조선』을 발행하며 평신도신앙을 고취한 사상가로도 유명하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함흥보통학교,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 가서 도쿄 세이소쿠영어학교[東京正則英語學校]를 거쳐 1922년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다가 지리·박물과로 전과해 1927년에 졸업하였다. 유학 시절에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고, 군국주의에 반대하고 일본 기독교의 자주성을 주장하면서 무교회운동(無敎會運動)을 전개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 문하에서 성경공부를 하였다. 당시 함께 참여한 함석헌(咸錫憲)·송두용(宋斗用)·정상훈(鄭相勳)·유석동(柳錫東)·양인성(楊仁性) 등과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해 우리말 성경을 읽고 연구했고, 귀국하여 1927년 7월에 『성서조선(聖書朝鮮)』을 창간하였다. 교사로서는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양정고등보통학교, 경기중학교,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근무하며 지리학, 박물학 등을 가르쳤다. 직접 가르친 제자로 윤석중(尹石重, 1911-2003), 손기정(孫基禎, 1912-2002), 유달영(柳達永, 1911-2004), 김용준(金容駿, 1927-2019), 구본술 등이 있다. 1942년에 『성서조선』 3월호(통권 158호)에 실린 권두언 「조와(弔蛙)」가 조선의 민족혼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폐간당하게 되는데, 이때 함석헌·송두용·유달영(柳達永)·이찬갑 등 총 13명이 구속, 수감되는 과정에 김교신 역시 함께 투옥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44년 7월 흥남질소비료공장에서 강제징용된 조선인 노무자들을 돕고자 입사해서 주로 교육·후생·주택 등의 문제를 보살피다가 광복을 불과 넉 달 앞둔 1945년 4월 25일 타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