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김녕 마을에는 160여 년 전에 ‘대왕고래’가 갇혔던 고래수(갯바위 물웅덩이)가 있다. 그런데 “제돌이의 꿈은 바다였습니다.”라는 의미와 같이 자유의 몸이 되어 고향 바다로 돌아가게 된 돌고래 방류 기념비가 세워진 곳과 같은 장소라는 사실이 신기하다. 제돌이가 방류되기까지의 사연을 살펴보다가 필자는 고래수 사건과 돌고래 방류 간의 사연들이 서로 잘 연결된다는 예감을 갖게 되었으며, 오랜 세월 잊고 있었던 고향 마을의 전설 같은 대왕고래 사건의 내력을 찾아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하였다.
전편인 [대왕고래의 죽음]에서는 이 고장에 옛부터 구전(口傳)되는 사건의 내용들을 찾아 나섰다. 조선시대 한겨울에 제주섬 갯바위에는 심심치 않게 ‘고래 사체’가 자주 떠올라 왔었고, 관(官)에서는 영을 내려 떠오른 고래 사체를 해체하여 기름을 짜서 상납토록 되어 있었다. 고래가 죽어 떠오르는 사건은 조선시대 민초(民草)들에게는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전기가 없던 시절 민초들에게는 큰 고역이 찾아왔다고 하여 고래(苦來)라는 악명을 연상케 하였다. 김녕 대왕고래 사건의 내막은 다음과 같이 조사, 구성되었다.
호롱불을 피워 살던 그 옛날 조용하고 평화로운 김녕 마을 앞바다 농괭이 바당(돌고래 노는 바다)에 터줏대감인 ‘대왕고래’가 있었다. 대왕고래는 먹이인 멸치 떼를 쫓아 갯바위 안으로 들어왔다가 썰물에 빠져나가지 못하고 물웅덩이에 갇히게 되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고래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혹한으로 결국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고래가 갇혔던 물웅덩이를 고래수(고래가 갇혔던 곳)라 불렀고, 사체는 관령에 의하여 채유(採油)하게 되었다. 채유 상납량 일부를 마을 사람들이 사(私)용하면서 책임량을 못 채우게 되자 마을은 일시에 곤경에 빠진다. 마을 책임자 전원이 제주 관아에 옥살이를 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김녕 마을은 대대로 내려오는 입산봉 마을 농장(이만여 평)을 팔아야 하는 등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처럼 옛 선인들이 겪은 이야기는 입과 입으로 대(代)를 이어져왔고, 구전으로만 희미하게 남겨지고 있다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빠른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가운데 옛것을 보존하기란 심히 어렵고, 어쩌면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옛 선인들의 억울했던 넋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필자의 작은 소망과 함께 전설처럼 구전되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살리고 싶었다. 이에 ‘대왕고래의 죽음’과 ‘돌고래 방류’ 지역이 겹치는 것을 우연의 일치라고 가볍게 넘겨버리는 소홀함과 망각의 우를 피하고자 하였다. 필자는 어쩌다 같은 공간 속의 두 가지 사연이 맞아 떨어졌을까 하는 의구심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였다. 이에 보석 같이 소중한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전해주기 위한 구전인(口傳人)의 역할을 자임(自任)하게 되었다.
후편 [현명한 제돌이]에서는 지금까지 세상에 많이 알려진 돌고래에 대한 학술서와 달리 인간 세상의 이야기로 꾸몄다. 인간에게 잡혀 고된 역경을 이겨내고 자유를 쟁취하면서 푸른 고향바다로 돌아가고자 했던 제돌이의 의지와 현명한 선택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였다. 그 가운데 효를 행하고 선조가 지켰던 제주 바다 지킴이가 된 제돌이의 선택과 삶의 중요성을 알리고자 하였다.
제돌이는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유언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거칠고 넓은 인도양과 태평양에서 3만 리를 달려왔다. 제돌이의 원래 이름은 덕남이였지만, 제주 서귀포 퍼시픽랜드에 잡혀 지내면서 ‘제돌이’로 개명되었다. 바다와 단절된 육상 수조에서 자유를 빼앗긴 영어의 생활을 이겨내는 힘겨웠던 사연들을 인간의 관점에서 재구성하였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구속받는 가혹한 노예 생활은 어땠으며 그 과정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소설의 주제로 삼게 되었다. 해답은 ‘재롱’이라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재롱은 제돌이의 꿈을 이루게 한 원동력이고 바람직한 삶을 추구하는 강력한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푸른 바다에서 살아갈 자유의 생존권을 달라는 호소였으며, 제돌이의 현명한 선택이었다.
재롱은 고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 수중 동물의 제왕인 돌고래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제돌이의 재롱은 살아남기 위해 현명하게 계산된 수단이었다. 공연이 시작되어 “제돌아! 빨리 나와라!” 하는 소리가 공연장을 채우면 제돌이가 꼬리를 흔들며 입장한다. “야! 제돌이다!” 이때를 놓칠세라 관객에게 재롱을 선사하면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푸른 고향 바다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제돌이에게 사랑의 동정심을 유발케 하였다.
제돌이의 재롱은 엄연한 유전적 선물이다. 먼저 입소한 선배들에게 재롱으로 묘기를 배웠고, 숙달이 빨랐으며 형들을 능가할 만큼 성장해갔다. 그리고 공연장에선 인기 만점이고, 조련사들의 귀여움도 독차지했다. 조련사가 먹이통을 가지고 오면 꼬리를 흔들며 재롱을 부리기 시작했고, 던져주는 생선을 받아먹으면서 “잘 먹겠습니다.” 라는 뜻으로 “액” “액” 인사하면 생선을 더 얻을 수 있으면서 스스로 건강을 챙겼다.
제돌이가 역경을 극복한 현명함을 기념하는 방류비가 세워졌다. 전면에는 “제돌이의 꿈은 바다였습니다.”라는 제목이, 그리고 후면에는 “나에게 자유를 달라는 자유 수호의 고귀한 외침은 잡힌 지 4년(2009~2013)을 서울과 제주 돌고래쇼 공연장에서 많은 고생을 재롱으로 참고 견뎌낸 제돌이와 춘삼이의 아름다운 승리였다.”고 쓰여 있다. 그리고 귀소본능이 강한 제돌이 남매의 재롱은 돌고래가 자연(고향 바다)으로 돌아가는 첫 역사를 만드는 위대한 족적을 남기는 지혜로운 행동의 표석이 되었다.
저항하는 일부 돌고래들은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수명이 단축되었거나 인간들에게 희생되기도 하였다. 돌출행동을 한 ‘삼팔이’도 있었고, 저항으로 일관한 ‘복순’이와 ‘태산’이도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그러한 여건에서 제돌이는 10년 선배 ‘금등이’와 ‘대포’를 제치고 5년을 앞질러 고향바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방류된 제돌이 남매는 제주 바닷가에서 친구들하고 무리지어 사회생활을 하며 푸른 고향 바다 지킴이에 한몫을 해내고 있다. 제돌이는 절제된 행동과 재롱으로 역경을 극복하는 지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인간과의 공존 공생을 위해서는 강자인 인간이 약자인 돌고래에게 배려의 미덕을 살려 나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다의 수중 동물 중에서 가장 지능지수가 높은 돌고래들은 고향 바다를 찾아가는 귀소본능과 인간처럼 조상을 섬기는 숭조정신, 친구 간에 우정을 나누는 감정 등을 가지고 있다 할 것이다.」
제돌이와 춘삼이는 2009년 5월 인간에 의해 불법포획되었다. 4년여(2009~2013)를 햇빛도 없는 좁은 인조 공간 전등불 아래에서 죽은 고기로 연명하며 하루 서너 차례씩 쇼 공연을 강요당했다. 노예 생활의 불법성을 들어 정부와 지방자치 단체의 방사하겠다는 소청이 있었으며 이를 받아들여 재판(2012.3.) 끝에 서울시의 전격적인 야생방류 결정으로 제주로 이송케 되었다.
이송을 위해 제돌이와 춘삼이는 검사를 받고 항공편으로 암실로 짜여진 길이 5m밖에 안 되는 수조 안에 실려 왔다. 제주에서 성산포 관광지 섭지코지 수족관까지 6시간 만에 도착하였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김녕 앞바다 가두리 양식장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22일간(2013.6.26.~7.18.)의 야생적응 훈련에 들어갔다.
남방큰돌고래 야생방류는 제주도가 유일하며, 세계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유를 향유할 권리는 인간이나 동물 공히 너무나 당연하다는 점과 포획의 불법성을 알리며 돌고래 방사 사업을 수행하는 세계 최초의 신기원을 세웠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해양생물 보호 선도의 자격을 가진 나라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국제포경위원회(IWC) 과학원(나오미로르)은 한국은 제돌이 방사를 계기로 해양 생물 보호에서 국제적 리더라고 격찬하였다.
선악(善惡)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이냐 아니면 인간 스스로 찾아낸 위대한 발견인지는 양심이 선택해 낼 것이다. 지능지수(IQ 70~80)가 높은 남방큰돌고래의 불법 포획은 당연히 부당하고, 모든 생명체의 자유의지는 생존권적인 존엄성을 스스로 인정하는 진리라 할 것이다. 이는 ‘아름다운 양심의 승리였고, 아름다운 양심은 아름다운 꿈을 이뤄내게 한 것’이라 할 것이다.
제돌이가 자유의 몸이 되게 도와준 기관과 단체들은 해양수산부, 서울시, 제주도, 제주지방경찰청, 제돌이 시민위원회, 제주대학교, 동물자유연대, 핫핑크 돌피스 등이다.(제주, 한라일보, 제민일보, 조선일보 A14 2013.7.19. 한겨레신문 2013.7.19.)
[김녕 마을의 배경]
이 마을의 설촌 역사는 대략 기원전 2000년 전후의 청동기 철기시대부터 사람들이 마을 인근 궤네기굴(전장 200m 선사시대 유적지)에 은거하며 노루와 멧돼지를 사냥하며 살아온 데에서 시작된다. 농경생활(인근 입산봉 분화구에서)도 해왔던 것으로 탐사되었다.(서울대 임효재 박사팀, ‘제주 선사시대 동굴유적’, 1990. 9. 3. 제민일보 1면)
이후 수십 세기가 내려와서 제주에서 가장 큰 마을이 형성되어 1,000여 호가 넘는 일명 천하 대촌이라 불려왔으며, 한때는 현청 소재지였다.(고려 충렬왕 26년) 이 마을은 위도상 북위 33.3°와 동경 126.5°에 있으며 제주시와 성산일출봉(50km)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고 지리상으로 육지와 가장 가깝다.
마을 경내에는 유명 관광지 만장굴(유네스코 세계 7대 경관 명소)이 있으며, 동녘바다 쪽으로는 입산봉(笠山峰) 줄기가 뻗어 있고, 서쪽으로는 묘산봉(描山峰) 줄기가 뻗어서 마을을 보호하듯 두 오름이 좌우로 장승처럼 서 있으며, 바다 쪽으로는 목지곶과 가수곶이 돌출하여 북쪽으로 양편 수 km씩 뻗어나가 넓은 만(灣)을 형성하고 있다(16페이지 김녕 마을 전경 그림 참조).
김녕 마을 앞바다 농괭이 바당(돌고래가 노는 바다)에는 고래 무리들이 어군(魚群)을 몰고 와서 어장 형성에 일등공신 역을 하며 제주에서 가장 큰 어장을 형성해 왔었다. 그리고 옛날 ‘대왕고래’가 갇혔던 ‘고래수’ 물웅덩이와 아시아 최초로 남방큰돌고래 제돌이가 야생 방류된 바다가 있는 마을이다.(조선일보 2013.7.19. A14 ‘남방큰돌고래 제돌이 고향바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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