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전략은 장차 어떻게 전개될 것이며,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내 여타 미국의 동맹국에 대해서는 어떤 함의가 있을까? 중국의 부상은 “단극체제 시대(unipolar moment)”에 종언을 고하고 있으며, 강대국 간의 경쟁이 다시 한 번 국제정치에서 주요한 의제가 될 것이다. 국제체제에서 가장 강력한 두 국가는 항상 서로를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미국과 중국은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치열한 안보 경쟁에 돌입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역외균형이라는 논거가 다시 한 번 미국 대전략의 지적 토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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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면에서 보자면 이 책은 내가 대학원에서부터 시작한 연구 활동의 논리적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동맹의 기원the Origins of Alliances』(1987)에서 나는 국제적 동맹의 원인을 올바르게 이해해야만 왜 미국과 미국의 주요 동맹국들이 소련 진영보다 월등하게 강력했는지 설명이 가능하고, 또한 미국이 자신의 핵심 동맹국들을 지속적으로 안심시키지 않으면 이들이 소련 편으로 돌아설지도 모른다는 불필요한 우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혁명과 전쟁Revolution and War』(1996)에서는 국내 혁명이 국제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고 혁명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노력이 종종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증폭함으로써 전쟁을 쉽게 촉발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미국 길들이기Taming American Power』(2005)를 통해서는 왜 적국과 우방국 모두 냉전 이후 미국의 패권적 지위를 우려하는지 설명했고, 다른 나라들이 어떤 식으로 미국의 힘에 맞서거나 또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 했는지 보여주었다. 그리고 미국은 보다 절제된 외교정책을 채택함으로써 그와 같은 시도들을 무력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이스라엘 로비와 미국 외교정책The Israel Lobby and U.S. Foreign Policy』(2007)에서 나는 존 미어샤이머John Mearsheimer 교수와 함께 막강한 국내 이익집단이 어떤 식으로 미국의 포괄적인 국익에 해를 끼쳐 가면서 미국 외교정책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지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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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트럼프가 놀라운 승리를 거둠으로써 전직 대통령 3명이 구사했던 외교정책에 대한 미국 대중들의 심각한 불만이 겉으로 드러났다. 트럼프는“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라는 수사적 표현을 내세웠지만 이 때문에 매력이 떨어지거나 공직에 부적합한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클린턴, 부시, 오바마 시절 외교정책들의 기초가 된 대전략(grand strategy)을 정확히 겨냥했다. 트럼프는 미국을 세계 안보를 유지하고 민주주의를 확산하고 규칙에 기반한 자유주의적 세계질서를 지탱하는 데 책임이 있는“필수불가결한 나라(indispensable nation)”라고 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비록 뒤죽박죽이기는 하지만 미국인들을 국내에서 더 강하고 부유하게 만들고 해외 문제에 덜 관여하게 하고, 덜 제약 받게 하고, 수렁에 빠지지 않게 하는 외교정책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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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냉전기 미국 행정부는 해외 개입을 줄이고 국내 우선순위에 보다 집중할 수 있는 현실을 무시하면서 한결같이 “자유주의 패권(liberal hegemony)”이라는 야심찬 대전략을 채택했다. 이 전략이“자유주의적(liberal)”인 것은 미국의 힘을 사용해 개인의 자유와 민주적 거버넌스, 시장에 기초한 경제와 같은 전통적인 자유주의 원칙을 수호하고 전파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전략은 일종의 패권 전략이기도 한데, 미국을 자유주의라는 정치적 원리를 다른 나라들에 전파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을 지닌 “필수불가결한 나라”로 규정하고 다른 국가들을 미국이 설계하고 이끄는 동맹체제와 제도로 끌어들이려 하기 때문이다. 이 전략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미국의 우위 유지와 자유주의적 세계질서의 확대가 단지 미국의 안보와 번영에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계에도 이익이 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지난 25년간의 역사가 보여준 바와 같이 자유주의 패권 전략은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다. 미국은 자유주의 이상에 대한 공동의 헌신으로 단결된 평화 지대를 확대하기는커녕 자유주의 패권을 추구하면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그리고 여타 몇몇 나라에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수렁에 빠져들었으며, 수조 달러의 돈을 낭비하고 수천 명의 목숨을 희생시켰다. 그리고 국가와 비국가 행위자들 모두 미국에 저항하거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미국을 이용하도록 부추겼다. 동맹국들은 미국의 리더십을 환영하기는커녕 무임승차를 하면서 이용해 먹었고, 적대국들은 계속해서 미국의 구상을 가로막았으며, 적대적 극단주의자들은 미국을 공격, 우회, 기만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미국이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압도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문제에 관한 근본적으로 잘못된 접근법을 도저히 구제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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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하게 말하자면 트럼프는 선거에서 승리한 순간부터 필연적인 구조적 문제에 직면했다. 자유주의 패권을 무자비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외교정책 커뮤니티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등을 돌렸고, 이로 인해 정부 안팎에서 영향력이 강력하거나 경륜이 풍부한 동조자가 거의 없었다. 만약 트럼프가 행정부 고위직을 자신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사람들로만 채우려고 했다면 수십 개의 자리가 공석으로 남았을 것이고, 그 자리에 임명된 사람들이 틀림없이 초심자들이나 저지를 법한 실수를 수도 없이 범했을 것이다. 반면에 트럼프가 정부라는 기구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잘 알고 있으면서 경륜도 풍부한 외교안보 분야 전문가들에게 의지했다면, 이들은 자유주의 패권의 대부분 요소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기 때문에 트럼프가 약속한 외교정책의 혁명을 절대로 실천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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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외균형론자로서는, 마치 미국이 현재 서반구를 지배하는 것처럼 지역 패권국이 등장해서 이러한 지역들 중 어느 한 곳을 똑같이 지배하는 상황을 가장 우려한다. 유럽이나 동북아시아에서 그런 국가가 출현한다면 상당한 경제적 영향력과 정밀무기 제조능력, 그리고 전 세계 곳곳에 힘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유할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미국보다 더 많은 경제적 자원을 통제할 수도 있으며 군비 경쟁에서 미국을 능가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지역 패권국은 심지어 서반구에 있는 국가와 동맹을 체결할 수도 있고, 이 패권국의 본토가 주변국으로부터 심각하게 위협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미국 영토 가까이에서 간섭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유럽과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최우선 목표는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주변국을 신경쓰느라 서반구나 미국에 매우 긴요하다고 생각되는 지역까지 진출해서 마음대로 누비지 못하게 역내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페르시아만에 패권국이 등장하는 상황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런 국가가 이 지역으로부터의 석유 공급을 방해할 수도 있고, 세계경제에 피해를 주고 미국의 번영까지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은 이지역을 직접 통제할 필요는 없다. 이 지역이 다른 주요 강국, 특히 미국에 필적할 만한 경쟁국이 장악하지 못하게 하기만 하면 이런 핵심적인 전략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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