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들이 바닥에 쓰러져 몸을 뒤틀다가 기절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그럴 때면 메스머주의자 집사 앙투안이 기절한 환자들을 ‘위기의 방’으로 옮겼다. 그리고 환자의 척추가 여전히 제 기능을 못한 채 쑤시거나 손가락이 떨리고 늑골 하부에 경련이 일어나면, 옅은 자색 호박단 옷을 차려입은 메스머가 직접 다가와 그의 손과 위엄 있는 눈과 메스머 유체로 처치된 지팡이로 환자에게 유체를 주입했다. --- p.32
뉴턴의 독자들은, 빛과 중력에 관한 그의 이론에서 신비주의를 걷어낼 수 있는, 지금은 과학적이라 여길 방법에 대한 이해가 그다지 깊지 않았다. 그들은 흔히 중력을 신비한 힘으로 여겼고 우주의 전기적 영혼과 관련된 것쯤으로, 그리고 하비(1578~1657, 영국의 의학자이자 생리학자-옮긴이)와 데카르트를 따라 심장에서 불타는 생명의 불과 관련된 것쯤으로 여겼다.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근대 화학의 토대를 놓기 전까지 과학자들은 흔히 몇 안 되는 기본 원소로 생명의 모든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단 자연의 암호를 풀 열쇠를 찾았다고 믿으면 감상적 허구로 빠져들곤 했다. --- p.38
영웅들은 그 세기 내내 도시에서 열기구 모험에 나섰고, 이들을 환호한 사람들은 비행의 세세한 사실들까지 기록했다. 비행은 역사의 위대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귀환한 “비행사들”은 도시 전체를 행진했다. 소년들은 말의 고삐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썼고, 노동자들은 그들의 옷에 입을 맞췄으며, 그들의 초상화가 그에 어울리는 송시와 함께 인쇄되어 거리에서 팔려나갔다. 그들의 여행에 대한 동시대의 설명으로 판단하건대, 그 열기는 린드버그의 첫 비행과 첫 우주탐사에 견줄 만했던 것 같다. --- p.48
인간은 이제 막 공중을 정복했다. 그런데 물 위를 걷는 것은 왜 안 되겠는가? --- p.53
혁명을 예견하지 못했던 프랑스인들은 정치 이론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메스머주의와 그 밖의 비정치적인 다른 유행들을 화제로 삼았다. 사실 칠레의 괴물이나 비행 기계, 과학의 놀랍고 보이지 않는 힘들이 그들에게 제공하는 여러 기적이 그들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사회계약론》같이 어렵고 당찮아 보이는 추상적인 생각들과 씨름하며 괴로워하겠는가? --- p.75
메스머주의가 치료는 몰라도 즐거움을 주는 힘이 있다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 p.93
메스머주의의 폭넓은 유행과 그 주창자들이 보여준 설득력 때문에 사람들은 메스머주의의 과학적이고 종교적인 원칙들을 진지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콩도르세는 계몽사상의 수많은 태도들을 대표하던 인물로서 메스머주의를 거부했지만, 자신의 거부를 정당화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고 그 이유를 글로 썼다. --- p.100
메스머주의자들이 발행한 팸플릿에서 메스머는 줄곧 인류의 고통을 종식시킬 발견을 품에 안고 파리에 도착한, 그리고 순진하게 프랑스 학계와 과학계의 지도적 인사들을 만나 지원을 호소한 헌신적인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과학아카데미, 왕립의학회, 의사회, 마지막으로 기성 학계의 축소판인 왕립위원회가 차례로 그를 타박하고 모욕하고 박해했다. … 그리하여 메스머는 학계의 관료주의에 등을 돌렸고 비전문가들에게 호소했다. “나는 대중에게 호소한다.” 대중을 향한 이런 호소는 수백 편의 팸플릿에서 목소리를 내며 정부에 경종을 울렸다. 일부 메스머주의 관련 저술들이 짙은 정치색을 띠게 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 p.128
이 지점에서 급진주의의 저류가 메스머주의 운동을 관통해 흐르고 있었으며 과격한 정치 팸플릿들에서 때때로 분출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메스머주의는 브리소, 카라, 베르가스에게 그들의 출세와 그들이 속한 계급의 출세를 가로막는 것으로 보이는 악덕을 비난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메스머주의를 지지하는 그들의 동료 가운데 일부-특히 라파예트, 뒤포르, 데프레메스닐-는 앙시앵 레짐에서 아주 높은 지위를 누렸다. --- p.151
자신의 사상에 대해 철저한 기록을 남긴 유일한 메스머주의 이론가는 니콜라 베르가스였다. 코른만 집단을 창설하기 전까지 그는 가장 빼어난 메스머 지지자였다. 조화학회의 신입 회원들에게 강연을 했던 사람은 메스머가 아니라 베르가스였다. 베르가스는 그들이 공부해야 할 교과서를 서술했다. 그는 메스머의 이름으로 분리주의자들을 비난하는 교리 조항들을 작성했고 메스머주의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에 해당하는 《동물 자기에 관한 고찰》을 출간했다. --- p.162
“우리는 자연과의 연결을 거의 모두 잃었다.” 베르가스는 근대 프랑스의 예술, 도덕, 정치에 반대하며 열변을 토했다. “오늘 태어난 아이는 관습에 의해 그 기질이 바뀌었다. 수세기를 이어온 사회의 관습이 언제나 그 아이 안에 중요하게든 아니든 타락의 씨앗을 옮긴 것이 분명하다.” 이런 타락이 예술과 문명의 인위성에 주로 노출된 계급의 자연적인, 신체적이고도 도덕적인 힘을 좀먹어왔다. 그러나 평민들은 그들의 원시적 미덕을 일부 간직했기에 더 건강했고 병이 들어도 쉽게 치료되었다. 베르가스가 메스머의 이름으로 공표한 소명, 농민과 시골 신부 들의 미덕을 동원하라는 소명에는 희미하게나마 민주적인 경향이 존재했다. --- p.174
메스머주의는 그저 화석이 된 죽은 이념의 잔해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잊힌 역사의 모퉁이에서 구원될 자격이 있다. 메스머주의는 추상적 관념들이 어떻게 1780년대의 프랑스인들에게 다시 활력을 넣었는지 시사하기 때문이다. 또한 도무지 그럴 법하지 않은 쟁점들이 어떻게 앙시앵 레짐에 대한 비난이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정권이 어떻게 1780년대 가장 유력했던 인물들의 충성심을 완전히 잃게 되었는지 시사한다. 사실 메스머주의는 그 역사적 지위를 1780년대에 한정할 수 없을 만큼 프랑스를 사로잡았고, 19세기까지도 계속해서 대중의 태도와 관심을 형성해냈다. --- p.178
메스머주의는 다른 곳에서 건재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상대적으로 온건한 유체론과 몽유병이 유럽 전역에서 진지하게 연구되었다. 1815년 사망 직전에 메스머는 베를린대학교의 메스머주의 과정 개설을 축하했다. 제임스 브래드는 영국에서 최면 유도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샤르코가 이끄는 프랑스의 최면술사들은 프로이트의 심리학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 p.202
메스머주의는 과학을 넘어 태양과 달과 별들이 유체의 바다에서 조용히 회전하고 있는 “우주적 조화”에 대한 전망으로 위고를 안내했다. 위고는 그것을 “생명의 유체”, 삶과 사후의 정수라고 칭했다. 메스머주의는 초자연적인 것으로, 그가 형이상학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딸, 레오폴딘과 다시 접촉하기 위해 들어가기를 열망했던 세계로 그를 인도했기 때문이다.
--- p.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