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영 선생은 동양군자이면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추구하는 양명학의 영향을 받은 선비로서 조국이 위난에 처하자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떨쳐 일어나 독립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그는 ‘귀족의 의무’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했다. 그뿐만 아니라 전시하에서 야당 지도자들이 독재자 이승만과 대결하기를 꺼리는 시기에 홀연히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용기를 보였다. ‘민주’ 간판을 단 한국 정통야당의 출발점에 그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망명 시절 저명한 중국학자 황염배黃炎培가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한 것을 발견하고 반박한 책 ??감시만어感時漫語??는 민족사학자의 식견을 보여준다.
--- p.14
이시영이 성리학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충군사상으로 조선왕조에 출사하고서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주권재민의 헌법(약헌)을 만들고, 이후 민주공화주의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형 이회영과 그의 친구 이상설 등으로부터 양명학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 p.32~33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1940년 중국 충칭에서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조직된 항일무장부대 광복군의 창설에도 핵심적 역할을 했다. 지청천, 김학규, 김원봉, 이범석, 권준, 신동열, 오광선 등이다. 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 제1지대장 김원봉, 제3지대장 김학규 등은 모두 신흥무관학교 간부들이었다. 이처럼 신흥무관학교는 무장독립운동의 사관을 육성한 요람이었다.
--- p.87
대한민국 임시헌장(헌법)은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남형우 4인위원회가 기초하여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에서 심의를 거쳐 채택된, 전문前文과 10개조의 간략한 내용이었다. 일제병탄 9년 만에 국체와 정체를 민주공화제로 하고, 구대한제국의 복구가 아니라 민주공화제의 새 나라 건국을 내외에 천명한 것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이시영은 대한제국 정부의 관직에서 물러난 후 동서양의 법률 공부를 하여 근대적 법률에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되고, 임시정부 헌법을 비롯해 각종 법규 제정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 p.103
임시정부가 출범한 이래 어느 때라고 평탄한 시절이 없었지만, 윤봉길 의거 뒤 항저우에서 지낸 기간(1932년 4월 13일~1935년 11월 24일) 3년 7개월은 그야말로 형극의 길이었다. 일제의 끈질긴 추적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이 천지사방으로 흩어져 있어 국무회의나 의정원 회의가 정상적으로 열리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 시기에 이시영은 정신적 지주가 되고 폭넓은 아량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그래서 임시정부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 p.131
이시영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달랐을 것이다. 6형제 중 자신만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굶어 죽은 형도 있었고 뤼순감옥에서 고문으로 숨진 형도 있었다. 영양실조로, 병들었으나 치료는커녕 약값이 없어서 죽은 형과 형수들 그리고 독립전선에서 행방불명이 된 조카들이 있었다. 재혼하고 얼마 후 함께 망명했던 재취 부인도 병사했다. 가족과 일가뿐만 아니라 수많은 동료, 지사들이 희생되어, 해방의 날을 맞지 못했다.
--- p.175
이승만의 아집과 독선·독주 때문에 이시영의 부통령직 수행은 쉽지가 않았다. 부통령은 엄연한 헌법기관인데도 이승만은 의도적으로 부통령을 배제하거나 소외시켰다. 그가 연상인 데다 고분고분하지 않고 정책과 인사에서 ‘쓴소리’를 자주 했기 때문이다. ‘정통 독립운동가’에 대한 개인적인 콤플렉스도 작용했을 터이다.
--- p.208
빛나되 번쩍이지 않은光而不耀 성재 이시영 선생의 생애는 우리 근현대사의 정맥正脈이고, 정통正統이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표師表이며, 선비형 지사의 표상表象이 아닐까.
--- p.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