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바로 ‘둔하고 미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둔하고 미련한 사람은 자신을 비난하는 이야기에도 별로 흔들리지 않는다. 정도가 좀 심한 사람은 자신을 비난하는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이래서는 적들이 공격할 방법이 없어진다. 또 과민 반응을 하지 않기 때문에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어내지도 않는다. 그래서 적보다는 친구가 많아진다. 얼마나 멋진가?
정보가 홍수같이 쏟아지고 수많은 갈등이 얽히고설킨 세상이다. 이런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예민한 천재보다는, 둔하고 미련한 바보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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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밝은 표정의 재승 씨가 진료실을 찾았다.
“그날 저녁, 집에 들어가서 아내에게 사과했습니다. 가족 간의 불화가 제 탓이란 것도 인정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성공만 하면 가족들이 행복해질 거라는 헛된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내가 그런 착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말했어요. 이제까지 창피해서 아내에게까지 숨겨왔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요. 그런 고통을 가족에게 물려주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는 이야기도 해주었습니다. 아내가 울더군요. 그리고 화해했습니다. 다음 날 저녁에 늦게 퇴근을 했더니 딸의 편지가 있더군요. ‘아빠, 미안해요. 착한 딸이 될게요.’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제가 헛된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이후 재승 씨의 증상은 점점 호전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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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가 면역 기능을 떨어뜨린다는 의견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고,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혼이나 별거를 하게 된 사람들의 혈액을 조사해보았더니, 우리 몸을 방어하는 NK세포의 활동성이 감소되었고, 면역 세포들을 활성화하는 마이토겐mitogen 반응도 감소된 것으로 밝혀졌다.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도 마이토겐 반응이 감소되어 있었다. 이런 결과는 동물 실험에서도 나타났다. 연구진은 어린 원숭이를 어미로부터 떼어놓고 키워보니 어린 원숭이의 혈액에서는 몸을 방어하는 세포인 T세포의 활동성이 떨어졌고, 마이토겐 반응도 감소되었다. 그런데 어미와 재결합을 시키자 면역 지표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기타 여러 연구를 종합해봐도, 스트레스는 우리 몸의 면역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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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알 수 없는 운명의 상자들 가운데서 살아간다. 일부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일부는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의 상자는 동화 속의 상자처럼 금은보화만 들어있거나, 도깨비만 들어있지 않다. 어떤 상자를 선택하든 그 상자 속에는 기쁨과 슬픔이 함께 들어있고, 행복과 불행이 함께 들어있으며, 아름다움과 추함도 함께 들어있다. 우리가 열어본 상자에서 기쁨을 느낄 때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상자 바닥 속에 숨어있던 슬픔이 나오면서 우리는 후회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선택하지 않은 상자 속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있었을까?’ 하고 궁금해 한다. 이러한 궁금증이 반복되면 미련이 된다. 남의 떡이 더 커보이듯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상자 속에는 행복만이 가득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상자 속에도 행복 뿐 아니라 또 다른 불행이 함께 들어있기 마련이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슬픔이 가슴 속에 밀려올 때, 우리는 먼저 상자를 탓한다. 왜 나는 남들처럼 좋은 상자를 가지지 못했을까? 왜 내게는 이런 슬픈 상자가 주어졌을까? 신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해보기도 한다. 남들은 모두 행복한데 자신만 불행한 것 같다. 그러나 행복만이 가득한 상자는 애당초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자를 소중히 해야 한다. 때로는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가슴을 쥐어뜯지만, 흥분이 가라앉으면 상자를 다시 정리해야 한다. 슬픔과 불행과 추함이 나오지 않도록 상자 속에 잘 갈무리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과 기쁨과 아름다움에 감사하며 오늘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부족한 상자를 가지고도 모자란 상자를 가지고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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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까지 살린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글쎄요……. 100명, 아니 200명 정도 되나요?”
혜진 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사실은 저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살린 사람들 가운데는 부자이고 권력 있는 사람도 있었고, 난하고 힘없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의사가 부자를 치료하는 것과 가난뱅이를 치료하는 것이 무엇이 다를까요? 사
에게 중요한 것은 생명이지, 그 생명의 주인이 부자인지 가난한 사람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렇겠죠.”
“그렇다면 멋진 공연장에서 클래식을 잘 아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과, 어수선한 돌잔치에 온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죠? 음대 교수가 되어서 대학생을 지도하는 것과, 어린 시절의 혜진 씨와 같이 바이올린 연주자를 꿈꾸는 꼬마들을 가르치는 일이 뭐가 다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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