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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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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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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9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208쪽 | 268g | 124*188*13mm
ISBN13 9791196373856
ISBN10 119637385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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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도 올 수 있어?”
밤색머리는 검정머리가 그렇게 물어본 적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뉴욕에서 누군가 내일도 나를 기다리고 있다니. 밤색머리는 배부름과는 다른 편안함을 느꼈다. 그것은 뉴욕에서 느낀 아주 작은 행복이었다.
밤색머리는 검정머리가 그렇게 물어본 적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뉴욕에서 누군가 내일도 나를 기다리고 있다니. 밤색머리는 배부름과는 다른 편안함을 느꼈다. 그것은 뉴욕에서 느낀 아주 작은 행복이었다.
“그럼요, 내일도 나는 배고 고플 테지만, 월세 때문에 식비를 아껴야 하니까.”
“그럼 내일 이 시간에 여기서 만나.”
밤색머리는 고맙다, 는 말이 아니라 다른 말이 하고 싶어졌다. 고맙다, 는 말은 충분히 많이 했다. 가끔은 소녀처럼, 가끔은 처녀처럼, 또 가끔은 늙은 할머니처럼, 어쩌다 거리의 갱스터처럼 그렇게 말했지만 어쨌든 너무 지겨워질 정도로 고맙다고 했다.
“미세스 마, 당신을 영원히 기억할게요.”
검정머리는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눈가에는 깊은 주름이 팼다. 검정머리는 안경을 벗은 다음 앞치마로 슬쩍 닦고 다시 썼다.
“너는 맨해튼의 럭키스타가 될 거야. 나는 그럴 알아볼 수 있어.”
“그럼, 당신은 내 첫 번째 팬이네요.”
“그리고 아마 행운아가 되면 너는 나를 잊어버릴 거야.”
“세상에, 말도 안 돼요.”
--- p.41~42

벽은 돌회색으로 칠해놓았는데, 아름다운 터키블루 빛깔 침대 덮개가 그 벽과 충격적일 정도로 예쁘게 어울렸다. 미나의 화장대는 거울과 섬세한 금속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추고 있으니, 화장대와 벨벳 의자에 어울리는 바닥 깔개까지 놓인 이런 방을 가지면 어떤 느낌이 들지 상상을 해보게 된다.
천천히 서랍 하나를 열었는데 화장품이 눈에 들어와 다시 닫았다. 두 번째 서랍에는 편지봉투가 들어 있었다. 세 번째가 내가 찾던 것이었다. 오른편 구석 깊숙한 곳에 있는 벨벳 상자에서 목걸이가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나는 목걸이를 집어 들고 바라봤다. 정말 아름다운 물건이었고, 혹시 상표가 새겨져 있지 않은지 걸쇠를 살펴봤지만 글자가 너무 작아 알아볼 수 없었다. 어떤 모양으로 늘어지는지 보려고 목에 걸어봤다. 그런 다음 전화기를 꺼내 사진 몇 장을 찍고는 목걸이를 제자리에 되돌려놓았다.
그런데 다른 목걸이 하나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반짝이는 금줄에 커다란 오팔. 이것도 정말 근사했다. 역시 목에 걸고 사진을 찍은 다음 제자리에 되돌려놓았다. 어느새 나는 서랍 속의 모든 상자를 열어서 반지며 팔찌며 목걸이를 착용해보고 있었다. 값나가는 보석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런 것들은 어딘가에 잠가놓고 보관하고 있을 테니까. 미나가 하고 있던 티파니 다이아몬드나 반 클리프의 클로버, 까르띠에의 시계 같은 보석들 말이다. 그녀에게 여기 있는 것들은 그저 숨겨둘 가치가 없는 진열용 장신구일 뿐이다. 나는 미나의 취향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로즈골드와 아주 작은 다이아몬드들로 만든 얼굴 모형 반지는 숨이 멎을 정도였다.
--- p.77~78

그날 밤 영호는 혼자 그라운드 제로를 찾았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각. 영호는 아직 시차에 적응하지 못하고 새벽에 잠을 설친 덕에 온몸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지쳤지만 지금 잠들면 새벽에 깨어나 다시 잠들지 못할 것 같아 최대한 깨어 있기로 했다. 호텔을 나와 발을 내딛었지만 마치 바닥에서 1센티 정도 붕 떠서 걷는 기분이었다. 고층 건물을 타고 내려오는 강풍에 영호의 머리카락이 춤을 추었다. 거리는 이미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몇몇 관광객 무리가 어디론가 바삐 길을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모두들 각자의 자리를 찾아 서둘러 맨해튼을 비웠다. 그라운드 제로는 호텔에서 차로 10분 거리지만 걸어서도 10분 거리였다. 영호는 낮에 보았던 검은 벽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50여 미터 정도 되는 허리 높이까지 올라오는 검은 대리석 벽이 정사각형 모양으로 빙 둘러서 있었다. 벽으로 다가가자 10여 미터 높이로 움푹 파여 있었는데, 그 벽을 타고 마치 폭포수처럼 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게 보였다. 9. 11테러로 쓰러진 쌍둥이 빌딩 터였다. 벽의 윗면에는 그날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폭포수가 흘러 들어가는 가운데에는 가로, 세로 길이가 각각 10미터인 정사각형 모양의 검은 구멍이 있었다. 물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검은 구멍으로 쉴 새 없이 흘러들어갔다. 구멍은 주위의 모든 중력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영호는 그것이 마치 우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꾸로 흐르는 우물. 몇 시간이라도 그 검은 우물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영호는 지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세 번의 신호가 가자 지희가 전화를 받았다.
--- p.99~100

계산대에 있던 직원은 줄곧 무시하는 투로 여자에게 되물었다.
“아가씨, 뭐라고요?”
여자는 남자의 짙은 피부색만 보고 과연 그가 자신보다 영어를 더 유창하게 할까 싶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정말로 여자보다 우월하며, 하찮고 무력한 존재가 자기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더 큰 목소리로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물론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다.
“도대체 뭘 달라는 거예요!”
참다못한 남자 직원이 여자를 향해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 소리에 너무 놀란 여자는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동시통역이 일어나는 상황에 짜증이 밀려온 나머지 그나마 남아 있던 에너지마저 바닥이 나고 만 것이다. 뉴욕에 온 이후 잔뜩 날을 새우고 지내다 하루를 마칠 때면 어김없이 상실감에 빠졌으며, 밤새 잠을 뒤척인 탓에 아침에도 여전히 방전 상태였다. 언제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생각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생각하지 않고도 완벽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었던 때가 언제였는지 아득하기만 했다.
--- p.130~131

“어제 학교에서 뭐 배웠어?”
“하우…… 아알…… 유? 안녕하세요? 아알…… 유…… 오케이? 너는 어때? 괜찮아? 맞지?”
아이는 턱을 쳐들고 우쭐한 눈빛으로 엄마의 칭찬을 기다렸다.
“응. 맞아.”
수연은 아이가 알아듣든 말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엄마! 하우 아 유? 에이취, 오우…….”
아이가 좀 더 큰 소리로 알파벳 글자를 하나하나 힘주어 불렀다.
“엄마, 대답해야지!”
“아임 파인, 땡큐. 앤드 유?”
수연은 유진을 흉내 내며 대답했다. 그녀의 남편은 유창하진 않지만 영어로 대화할 때면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고 같은 말을 반복해서 쓰지 않으려는 강박이 있었다. 그러나 누가 “하우 아 유”라고 인사하면 자기도 모르게 어릴 때 학교에서 배운 대로 “아임 파인, 땡큐. 앤드 유”라는 대답이 저절로 나온다고 했다. 그리고 죽어가는 순간에도 누가 “하우 아 유”라고 묻는다면 똑같이 대답하게 될 것 같아 무섭다는 얘기도 우스갯소리처럼 했다.
“내 이름은 ‘앤드 유’가 아닌데…….”
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자신 있게 대답했다.
“마이 네임 이즈 엠마 리. 아임 두잉 그레이트!”
--- p.168~169

음악이 멈추는가 싶더니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엄마의 목소리. 불현듯 패트릭의 차가운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이불을 박차고 방을 나왔다. 그러나 매들린의 방까지는 조심조심 다가갔다. 엄마도 매들린도 놀라게 해선 곤란하니까. 엄마의 발작,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매들린의 방은 비어 있었다. 다시 들려오는 소리.
복도 끝, 엄마가 쓰는 방이었다.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간결한 선율은 어린 아이의 것이었다. 이어 원숙한 반주가 더해져 소리가 합쳐졌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매들린과 엄마가 각자 자신의 바이올린을 어깨에 얹은 채 나란히 앉아 있다는 것을. 나는 두 사람의 연주를 문 앞에 선 채로 들었다. 합주가 끝나자 정적이 흘렀다. 두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는 듯했다.
매들린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나, 유튜브에서 사라 장이 연주하는 걸 봤어.”
“그랬어?”
“할머니, 나, 그런 바이올리니스트, 되고 싶어. 그럴 수 있을까?”
다시 또 정적. 나는 문 가까이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잠시 후,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가 알고 있는 소리다. 토닥토닥. 누군가를 꽉 끌어안고 등을 두들겨야 나는 소리. 아스라한 기억으로 남아 있으나 언젠가부터, 그러니까 내가 엄마에게 받길 원하는 걸 포기하고 난 후부터 더는 갈망하지 않게 된 바로 그 소리. 엄마와 거리를 만들자고 수만 번을 다짐하면서 스스로 상처 입고 있었던 아이의 깊은 우물 속에서 긴 시간 공명하던 소리.
--- p.206~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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