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가시화된 현실은 참담할 때가 더 많았다. 쪽방촌에 들어서자마자 파고드는 악취, 동네에 방문할 때마다 눈앞에 보이는 온갖 구토와 비둘기 떼의 습격, 주민들 사이에서 빈번하게 드러나는 크고 작은 폭력, 동네를 울리는 고성방가, 극도의 알코올 중독이나 갑자기 추워지는 날씨 또는 혹독한 외로움의 영향으로 일상화된 죽음들은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쉬이 익숙해지는 것들이 아니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이곳을 스냅숏처럼 스치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그런 지저분한 풍경으로만 기억되어 끝내 치워 버려야만 하는 공간일 것이다.
그러나 난 판이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 쪽방촌 안에 분명히 사람들의 생동하는 끈질긴 생명력 또한 존재한다는 단호한 믿음, 흡사 아비규환과 같은 겉보기와 달리 사람들이 그곳에서 고통을 공유하며 여러 방식으로 서로 돕고 살아가고 있다는 그런 믿음. 선험적일 뿐이었던 투박한 믿음은 낭만화의 위험성을 자각하고서도 시나브로 두 눈으로 충분히 검증되며 어느덧 실재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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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방촌의 도시빈민들이 녹여낸 목소리에는 쪽방촌이 평당 타워팰리스보다도 값비싼 월세를 지불해야만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 그럼에도 주민들의 가난을 이용해 부당하게 돈을 벌어들이는 일부 사람들의 존재로 인해 세입자들이 월세를 현금으로 내면서도 여전히 비인간적인 공간, 예를 들어 비가 새고 곰팡이와 바퀴벌레가 가득한 천장을 바꾸어 달라고 요구를 꺼내기조차 어렵다는 점, 그러면서도 해당 지역의 개발이나 건물주의 변심으로 인해 이곳에서마저 쫓겨나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라며 서울시의 확고한 개입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쪽방촌이 철거 이슈와 닿으면서 문화제의 주제로 자리잡게 된 배경에는, 쪽방촌이 단순히 ‘빈곤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기존의 일차원적 인식을 넘어 그곳에 ‘추방 현상의 역학’, 즉 ‘쫓아내고 쫓겨남의 다이내믹’이 작용하고 있음을 이제는 사회에 폭로하고자 한다는 의지가 서려 있었다. 이것은 해당 문제가 방임할 수 없을 만큼 정말로 심각한 사안이 되었다는 점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문제를 발언하고 주체적으로 거주의 권리를 주장할 만큼 쪽방촌 주민들의 역량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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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6일, 전원 퇴거 요구(1차) 이후 석 달간 기다릴 대로 기다렸다고 판단한 건물주는 본격적인 리모델링 작업을 위해 철거 반원들을 들여 건물 4층에 있는 공실 두 개의 문짝을 뜯어냈다. 부서진 문 안쪽의 402호에는 아직 거주하는 주민이 있는 상황이었다. 뜯어낸 벽돌과 자재들이 방바닥과 복도의 입구에 널려 동자동 9-20은 세입자들의 출입조차 지장을 받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공사는 아랑곳 않고 진행되었고, 6월 1일에는 화장실 문을, 6월 9일에는 인부들을 동원해 쇠망치로 공실의 내벽을 해머로 허물고 세면장의 수도를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쪽방촌 사람들에게 세면장은 빨래도 하고, 쌀도 씻고, 세수도 하는 복합적 공간이었다. 남아 있던 세입자들은 지하 및 1층 화장실에 문 1개를 다시 달아서 사용하며 버텼다.
6월 10일, 인부들은 남아 있던 주민의 존재 여부를 따지지 않고 건물 4층의 천장을 뜯어냈다. 주민의 신고로 경찰이 도착했으나, 민사상의 문제라 인부들에게 주의 조치를 취하는 것 외에는 딱히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난감한 것은 철거 작업을 하던 인부들도 마찬가지였다. 건물주와 회사에서는 세입자들이 모두 이사를 마무리했다며 작업을 들어가라고 하고, 세입자들은 철거를 중지하고 나가라고 하니, 공사한 흔적이 있어야 돈을 받을 수 있는 인부들 또한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괴로운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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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누려야 할 기본적 주거의 권리에서 소외된 이들 동네는 대중들이 빈곤(구조)과 빈민(사람)을 구별하지 못하게끔 하는 착시의 공간이기도 하다. 흑인인권운동가 맬컴 엑스Malcolm X는 1960년 연설에서 ‘빈곤의 구조에 편승한 세력은 피해자들의 삶을 계속 공격하면서도 오히려 피해자들이 자신들을 공격했다고 고발한다’고 지적한다. 피해자로 둔갑한 가해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이 민주주의이며 정의라고 여겨지는 현실은 위선이다. 따라서 가시화된 빈곤밀집지역의 존재를 통해 규탄하고 변화를 도모해야 할 영역은 빈곤과 빈곤의 밀집을 자아내는 구조여야 마땅하다. 하지만 지금도 되레 일차적 피해자인 빈민이 게으름과 노력의 부족 등으로 그 공간을 탈피하지 못하고 동네를 황폐화한다며 낙인을 뒤집어쓰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또는 집중된 빈곤 그 자체가 혐오 대상이 되기도 한다.
윤리적으로 부자연스러운 이 현상은 빈곤밀집지역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와 관련해 연구자들이 관심을 두어 온 주제였다. 서구에서는 그곳이 온갖 사회 문제의 진원지로 지목되어 해당 지역 주민들의 생활을 위축시키고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친다는 근린효과의 설명 방식에 의해 문제시되면서, 비윤리성을 빈곤밀집지역에 투영해 왔다. 즉 빈곤의 밀집이란 단순히 도시빈민의 집단 주거지라는 물리적 주거 공간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그들 생활 방식의 부정적 변형을 좌우하는 일종의 억압적인 사회생태적 환경으로 작용한다는 관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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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판자촌에 빈곤문화가 부재하다는 학문적 성과들도 당시 시대의 조류였던 판자촌의 재개발과 해체의 절차를 거스르지는 못했다. 판자촌의 부재야말로 밀집된 빈곤의 위험을 극복하고 경제 성장에 성공했다는 국가적 차원의 징표였기 때문이다. 국가는 판자촌을 도시빈민의 ‘불법적 무단 침입’으로 만들어 낸 불량촌으로 명명해 왔고, 그것을 효율적 국가 발전을 위협하는 요소, 따라서 박멸해야 할 공간으로 여겨 왔다. 이를 고려할 때, 광주대단지사건(1971)을 비롯하여 목동투쟁(1984), 사당동판자촌투쟁(1985), 상계동철거반대투쟁(1987) 등의 사건에서 무자비한 철거와 불충분한 이주비의 지급으로 20세기 후반 내내 도시빈민과 마찰을 빚어 왔던 당시 정부의 시각 저변에는 그들을 하대하고 그들에게 빈곤의 책임을 전가하며, 끝내 그들의 공간과 생존 방식을 부정하는 빈곤문화적 관점이 전제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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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에 노출되는 빈곤의 모습도 실제 빈민이 처한 상태를 사실적으로 가감 없이 보여 준다기보다는 치열한 경합을 거치며 생존한 서사일 것이다. 미디어로 생성되는 가난에 대한 인식은 그 서사에 걸려 있는 특정한 이해利害 관계에 밑바탕을 둔 이해理解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발생하는 사실에 대해 의도적 선택과 배제를 거치면서 미디어가 만들어 내는 서사는 주어진 사안을 대중이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에 기초적 자료가 된다.
미디어가 어떠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부각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그것은 위계질서에서 주변화된 다른 이야기의 강요된 침묵을 의미한다. 이렇게 미디어는 어떠한 고통을 우리가 비탄하고 애도할 가치가 있는 성질의 것으로 편집하거나 혹은 그 가치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고통의 주체를 향한 사회적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사회 구성원들의 고통이 다루어지는 방식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어떠한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진단하는 잣대가 된다. 물론 빈곤을 고통으로 치환하는 것 역시 하나의 프레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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