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 세계와 나는 어울리지 않는다. 어떤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흔들림, 흔들림뿐이었다. 나는, 한스는 하나의 흔들림이었다. 물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은 적이 없다.” --- p.14
“신부는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크앙 크앙 크앙. 신랑은 강물에 노을이 번져가는 것처럼 외롭습니까? 크앙 크앙 크앙. 그날 이후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망보다는 관망을, 희망보다는 관망을 택하는 불투명하고 불량한 삶의 자세를 취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 p.32~33
“「한스의 방」을 쓴 뒤로는 한스도, 포캣맨도, 교회 선생님도, 기린천도 전부 허구처럼만 느껴졌다. 아무것도 쓸 수 없는 게 사실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소설이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이런 마음을 차정 씨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글을 쓸 수 없는 마음, 말하지 못한 마음에 잠을 뒤척일 때면 차정 씨가 추천한 벌거숭이라는 밴드의 「삶에 관하여」를 반복해서 들었다.” --- p.45
“전쟁을 겪지 않아도 전쟁소설을 쓸 수 있는 거지. 다른 나라 작가들은 잘도 쓰잖아. 왜 우리는 그게 안 되는 걸까.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도 말라고,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현실의 목소리는 너무 지지부진해. 소설의 리얼리즘은 체험 수기가 아니잖아. 민족주의! 가족주의! 빈궁주의! 감상주의! 도덕적 어눌함! 머리 없는 산책자! 이데올로기로 사지가 찢어진 사람도 있겠지. 억울하게 목소리를 잃은 사람도 있겠지. 전쟁 중에도 사랑하고 엉뚱한 모험을 하고 무언가에 홀려 살인을 했겠지. 동성애와 동반 자살도 있었을 거야. 모던하고 섹시한 전쟁소설을 써야겠어. 텅 빈 사상의 깊이와 무채색의 사나운 문체로. 제주도부터 시작해야 해. 거기서부터 모든 게 잘못되었으니까. 제주 4?3을 배경으로 어떤 여자의 손부터. 서사의 전방에서 언어 폭탄을 터트리는 나, 여성 화자로 말이야. 근데 왜 소설을 쓸 때보다 소설을 떠올릴 때 더 흥분되고 뭔가 열리는 기분이 드는 걸까. 막상 쓰기 시작하면 흥분은 가라앉고 기분의 문은 소리를 지르며 닫히고 마는데.” --- p.57
“밤거리는 차가웠고 마른 낙엽을 밟는 소리가 온몸으로 진동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낙엽이 유칼립투스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지금 내 기분으로는 유칼립투스가 되어도 좋다. 내가 유칼립투스, 유칼립투스, 유칼립투스라고 반복해서 부르자 유칼립투스가 되는 것이다.모든 언어는 세 번 이상 반복하면 의미가 생긴다. 그 의미는 머릿속에서 다시 소리를 만들고, 모든 소리는 음악이 될 수 있다.” --- p.151
“조니, 내가 어떻게 보여? 조니의 눈이 빛난다. 너의 눈에는 세상이 어떤 색깔로 물들고 있을까? 조니와 조니, 가엾은 조니, 이제 조니의 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조니의 눈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지, 신문 속 조니의 눈, 화면 속 조니의 눈, 하지만 그건 조니의 눈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조니의 눈은 그해 여름에 남아 있어, 여름은 끝났고 삼십 년이 흘렀네, 하순한스는 생각한다.” --- p.239
“한 개인의 고통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이고 상대적으로 비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다리를 잘라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전과는 다른 색깔로 세상이 물들어 갔다.” --- p.240
“절망과 어둠 속에서 엷은 빛이 드는 길을 만들어 주는 것은 허구의 언어 세계와 음악뿐이었다.”
--- p.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