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웃을지 모르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내게 있던 큰 고민거리는 ‘나도 장가를 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혼이 남들에게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내게 있어서는 아주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 같은 처지에 있는 총각에게 시집오려는 아가씨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곱게 키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딸을 줄 부모가 있을 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안양천 둑을 따라 형성된 판자촌에서 살았습니다. 세상살이에 실패하고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어 뒤엉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더럽고 허름한 동네였습니다. 건축허가 없이 대충 짓고 대충 살던 판잣집들은 주소가 따로 없었습니다. 당시에 우리 주소는 “경기도 광명시 소
하읍 소하 5리 500번지”였는데 근처의 모든 집이 같은 주소를 사용했습니다. 똑같은 주소에 대략 2~300여 명이 모여 살았던 덕분에 우편배달원이 일일이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과 집을 확인하고 편지를 전해주어야 했습니다.
판자촌에서는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가장 불편한 문제는 화장실이었습니다. 화장실이 집집마다 있지 않고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그것도 앞뒤가 트인 화장실 두 개를 여러 집이 공동으로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몰리는 아침 무렵에는 아무리 급해도 꾹 참고 먼저 들어간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가로등이 없었기 때문에 한밤중에, 혹은 달이나 별이 뜨지 않아 특히 어둔 밤에 화장실에 가야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판자촌 화장실이라는 것이 그저 구덩이를 깊이 파고 얇은 판자로 대충대충 칸을 막아서 만든 것입니다. 겨울철에는 찬바람이 그대로 들어와 용변을 볼 때 한낮에도 덜덜 떨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밤이 깊거나 잠자리에든 뒤에는 웬만하면 화장실을 가지 않으려고 참습니다. 어쩔 수 없이 화장실에 가야 한다면 낡은 옷을 잔뜩 껴입고 가야 했습니다. 그러니 이런 집에 누가 시집오려할까요?
그런데 가난하고 허름한 판자촌에서 산다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문제가 내게 있었습니다. 저는 불구자였다는 점입니다. 사실 불구로 태어나지는 않았습니다. 몸이 약해서 자주 병치레를 할정도로 몸이 허약하기는 했지만 온전한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열심히 뛰어다니며 놀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내가 어느 날 불구의 몸이 된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는 경제 능력이 없으셨습니다. 그런 아버지 대신에 어머니가 허드레 일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여름 땡볕에도 남의 밭에 나가 풀을 뽑아주고 푼돈을 버셨습니다. 그렇게 번 돈은 우리 식구가 굶어죽지 않게 먹고사는 데만도 벅찼습니다. 우리 사 남매는 학교에 준비물을 사갈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수업에 참석하지도 못 한 채 교실 밖에서 벌을 서곤 했습니다. 저는 장남이었습니다. 그래서 일거리를 찾았습니다.
초등학생 때는 밭에 나가 무를 뽑기도 했고 시장에서 신문지를 깔고 앉아 시금치를 팔기도 했습니다.
본격적인 돈벌이는 신문배달이었습니다. 동아일보 지국에 찾아가 신문배달 일을 하게 해달라고 사정했는데 초등학생인 저를 채용해주었습니다. 처음에 신문 돌릴 때는 자전거가 없어서 신문 뭉치를 옆구리에 끼고 다녔습니다. 아침에 돌려야 할 신문 뭉치는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겨울에 눈이 내리는 날은 신문 돌리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손은 시렵고, 몸은 더디게 나아가고, 돌려야 할 신문은 많고… 몸도 마음도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중고 자전거를 하나 구했을 때는 정말 하늘을 날듯이 기뻤습니다. 이제무거운 신문 뭉치를 옆구리에 끼지 않아도 됩니다. 걷고 뛰는 속도보다 자전거가 빠르고 힘도 덜 듭니다. 신문을 더 많이 돌릴 수있었습니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자전거 페달을 신나게 밟으며 신문 지국으로 갔습니다.
1983년 3월 14일, 제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중학교에 입학한지 10일도 지나기 전인 이날도 자전거를 타고 동아일보 지국으로 향했습니다. 왕복 2차선 도로에서 제 앞을 달리던커다란 덤프트럭이 멈춰 섰습니다. 도로 오른 쪽에는 도랑물이있어서 그쪽으로 지나가면 흙탕물에 옷이 젖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트럭 왼쪽으로 가자니 중앙선을 넘어야 하는데, 언제차가 달려올지 겁이 났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트럭이 출발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국에 늦게 도착하게 될까봐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군기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지각하거나, 일을 제대로 못하거나, 사고를 치면 형들이 기합을 주거나 엎드려뻗쳐를 시켜놓고 대걸레 자루로 엉덩이를 사정없이 때리곤 했습니다. ‘형들에
게 두들겨 맞을까’하는 두려움이 점점 커졌습니다. 트럭이 출발하기를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서 왼쪽의 중앙선을 넘어 트럭을 지나쳐 가는데 그때 반대편 차선에서 덤프트럭이 달려왔습니다. 난생처음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저는 트럭에 치여 바닥에 나동그라졌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를 치고서 멈춘 덤프트럭이 제 쪽으로 후진을 했습니다. 덤프트럭의 커다란 뒷바퀴가 먼저 제 자전거를 밟아서 박살을 낸 다음에는 제 왼팔을 깔고 지나갔습니다. 제 팔은 그 자리에서 으스러지고 말았습니다. 만일 머리나 몸이 바퀴에 깔렸다면 즉사했을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그 덤프트럭이 왜 후진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처구니없는 황당한 사고를 당했지만 저는 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살과 뼈가 다 으스러진 채 옷과 힘줄 때문에 축 늘어진 왼쪽 팔을 붙잡고 일어섰습니다. 왼쪽 팔에서는 피가 대책 없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아직 운전석에 앉아 있던 아저씨를 향해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행히 기사 아저씨는 저를 병원으로 데려 갔고 저는 병원에서 의식을 잃었습니다. 만일 병원에 조금만 늦게 도착했다면 저는 과다출혈로 죽었을 것입니다. 의식을 회복하고 보니 왼쪽 팔이 어깨 아래 부분부터 잘려서 없어졌습니다. 덤프트럭의 뒷바퀴에 팔 전체가 모조리 으스러져
서 살려낼 방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졸지에 저는 불구의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술 직후에는 진통제를 계속 주입한 탓에 통증을 견딜 수 있었지만 진통제를 줄여가면서는 통증이 점점 더 커져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짜리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큰 아픔이었습니다.
아프고 힘들었던 이야기는 그 정도로 하고 다시 장가가는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어떤 부모도 결코 자기 딸을 시집보내고 싶지 않을 동네 판자촌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막막한데 몸까지 불구가 되었으니 도대체 누가 귀한 딸을 저와 같은 사람에게 시집보내려 할까요? 중고등학생이 결혼을 걱정한다는 것이 특이하겠지만 아무튼 그 당시 저의 처지는 몹시 불우했고 제 인생길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해결책은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말 그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저 같은 사람이 장가를 간다고 하는 불가능할 것같은 일조차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게 딱 맞는 좋은 아내
를 허락해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이십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제 기도는 점점 더 강열해졌습니다.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제게도 짝을 주시옵소서! 제게도 배필을 허락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지금 당장 교제를 할 수는 없어도 나중에 하나님이 아내를 주시면 되니까 말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기도뿐이었습니다. 하
나님께 매달리고 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애인은 둘째 치고 여자 친구 한 명 없이 이십대 후반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기도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평생 혼자 살아라. 그게 내 뜻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니 제가 먼저 포기할 필요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
고 더 더 더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서른 살이 되었고, 지금의 아내와 교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가장 좋은 점은 성격이 밝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어둡게만 살아왔던 저였기에, 까르르 웃으며 늘 밝게 사는 아내의 모습 그 자체에 저는 정말 매혹되었습니다. 게다가 아내는 피아노를 잘 쳤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피아노를 잘 치는 아가씨가 최고의 배우자감으로 여겨
지던 때였고 저 역시 그런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우리 둘은 틈만 나면 붙어 다녔습니다. 만나는 장소는 주로도서관이었습니다. 함께 공부를 하다가 손을 잡고 도서관 주변을 산책하는 것이 데이트의 전부이다시피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도서관에서 라면이나 밥을 사먹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영화를 보러간 적도 없었습니다. 그저 산책만 죽어라 다녔
지만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러다가 결혼을 생각하니 저에게는 큰 짐이 있었습니다. 저에게 시집오면 고생할 것이 너무나 뻔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른 손에 물건을 들면 문을 열수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어야 할 경우 물건을 내려놓고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나서 짐을 다시 들어야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문이 도로 닫히곤 합니다. 결국 누군가가 와서 문을 열어줄 때까지 계속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내가 아기를 낳아도 저는 아기를 안아줄 수가 없습니다. 아직 목을 가누지 못하는 아기를 안을 때는 한 손으로 등을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 머리를 받쳐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손이 하나뿐이니 아기의 등을 받치면 목을 받쳐줄 손이 없어 아기가 다칠 위험이 너무 큽니다. 그렇다고 아기 목을 잡아 들어 올릴 수도없으니 아기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저의 불구는 저 혼자 불편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결혼을 한 뒤에는 아내가 아주 많은 힘겨운 짐들을 감당하고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내에게 결혼하자는 말을 꺼내기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그대로 있을 수만도 없었기에 용기를 냈습니다. 만약 아내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거나 자신 없다는 말을 하면 깨끗하게 놔줄 생각을 하고 결혼 이야기를 꺼낸 뒤 바짝 긴장한 상태로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나에게 시집오면 고생할 텐데 그래도 시집올래?”
“전도사님, 제가 전도사님의 한 팔이 되어 드릴게요.”
이 말에 저는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아내의 고백으로 시를 썼습니다. 수필도 한 편 썼습니다. 마침내 저는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어릴 때부터의 기도는 확실하게 응답받았습니다.
아내는 정말 제 한 팔이 되어 주었습니다. 지금도 아내는 거의 매주 외부 집회로 바쁘고 피곤한 저를 위해서 기꺼이 운전기사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전라도 광주에서 집회 인도를 하면 광주까지 운전을 해준 뒤에 자신은 KTX를 타고 서울로 돌아갑니다. 제가 집회를 마치는 날에 다시 KTX를 타고 내려와서 제 차를 운전해줍니다. 집회 지역이 구미일 때도, 대전일 때도 그렇습니다. 당일로 다녀오는 경우에는 그날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서 운전해줍니다.
아내는 형광등을 교체하는 것도, 세면대를 교체하는 것도, 변기를 수리하는 것도, 다 혼자서 합니다. 저는 옆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아내는 짜증을 낼 수밖에 없을 텐데도 언제나 기쁨으로 감당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리공이 될 걸 그랬어요.” 하면서 웃는 아내의 모습을 볼 때마다 제 마음은 감사로 가득 찹니다.
위의 이야기는 제가 응답받은 기도 내용의 극히 일부분입니다. 앞으로 다양한 기도 응답의 내용들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어떤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단 이 책에서는 기도의 정의(기도란 무엇인가?), 기도의 내용(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기도의 우선순위(무엇을 먼저 기도하고 어떤 순서로 기도할 것인가?), 기도의 방법(어떤 방법으로 기도할 것인가?)같은 것들은 다루지 않겠습니다. 단지, 응답받는 비결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다루겠습니다.
이 책을 읽고 기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고 더욱 기도하게 되며, 그로 인해서 기도 응답을 받는 사람들이 더 많이 생겨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들어가는글」중에서
기도하면 다 되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확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다 됩니다. 기도는 주문이 아닙니다. 염불 따위가 아닙니다. 혼자 중얼거리는 것도 아니고 막연한 기대와 소망을 드러내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상달되는 것입니다 계 8:3. 기도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거룩한 통로입니다.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 하나님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아프리카 여자 선교사님의 글 하나를 인용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기도하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또한 그런 기도에 얼마나 놀랍게 역사하시는지를 잘 보여주는 글입니다.
어린 소녀의 기도(아프리카 여자 선교사님의 글)
어느 날 밤이었다. 나는 분만실에서 한 산모를 보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조그마한 미숙아와 세상이 떠나가라고 울어대는 두 살짜리 딸을 남겨 두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미숙아의 생명을 유지시키기는 참으로 힘들 것이 분명했다. 우리 병원에는 인큐베이터도 없었고 아기에게 영양을 공
급해 줄 수 있는 특별한 기구들도 없었다(사실 당시 우리 병원에는 인큐베이터를 가동할 전기도 없었다).
우리는 적도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밤에는 생각지도 못하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으스스할 때가 많았다. 한 간호학교 학생 산파가 이런 아기들을 위해 준비해 둔 상자와 아기를 쌀 면 수건을 가지러 갔다. 또 다른 산파는 물을 끓이기 위해 불일 피웠다. 잠시 후
그녀는 당혹스런 모습으로 돌아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물을 끓여서 고무 보온병에 넣는 순간 그만 보온병이터져 버렸어요.”
“그런데 그게 저희에게 있는 마지막 보온병이었습니다!”
열대 기후에서는 고무가 쉽게 상하기 마련이었다. 그녀가 소리쳤다. 엎질러진 우유를 놓고 아무리 울어도 소용없다는 서양 속담처럼 이곳 중앙아프리카에서 터진 보온병을 놓고 아무리 울어도 소용이 없을 판이었다. 주전자가 나무에서 자라는 것도 아니고, 숲을 나가면 약국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괜찮아요!”
“아기가 안전할 정도로 가능한 한 불 가까이 눕히세요. 그리고 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문과 아기 사이에 누우세요. 당신의 일은 아기를 따뜻하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다음 날 정오쯤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자원하는 고아원 아이들과 함께 기도하러 갔다. 나는 어린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기도 제목을 내놓았다. 덧붙여 갓 태어난 작은 아기를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했다. 나는 보온병 이야기를 하면서 그 아기의 체온
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설명했다.
아기의 체온이 내려가면 아기는 쉽게 죽을 수 있었다. 나는 또한 아이들에게 엄마가 죽어서 울고 있는 두 살짜리 아이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기도 시간에 열 살 된 룻이라는 여자아이가 우리 아프리카 아이들이 보통 그렇듯이 무뚝뚝하고 간결하게 기도했다.
룻은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우리에게 보온병을 보내주세요.
하나님 내일이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 때면 아기가 죽을 겁니다.
그러니 제발 오늘 오후에 보내주세요.”
나는 그 대담하고 용감한 기도에 가슴이 미어질 판이었다. 그러나 룻은 마지막에 이렇게까지 덧붙였다.
“그리고 하나님!
보내실 때 저 어린 소녀를 위해 작은 인형도 하나 보내주세요.
하나님이 그 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애가 알 수 있게 말이에요. 아셨죠?”
아이들과 함께 기도할 때 자주 그렇듯이 나는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정직하게 “아멘”할 수 있었을까? 나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실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물론 나는 그분이 무슨 일이든 다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내 마음속엔 상당히 큰 “그러나”들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 특별한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고향에서 부친 소화물을 나에게 보내시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아프리카에 거의 4년을 있으면서 고향에서 소포(소화물)를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설령 누군가 나에게 소화물을 보낸
다고 하더라도 누가 거기 보온병을 넣어 보내겠는가? 난 적도에 살고 있는데!
오후가 반쯤 지날 무렵, 나는 간호사 훈련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들어와서 내 집 앞에 차가 한 대 와 있다고 전해 주었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차는 가고 없고 베란다에 10킬로그램짜리 꾸러미가 하나 놓여 있었다. 나는 눈물이 찔끔
나는 것을 느꼈다. 나는 혼자서 그 꾸러미를 열 수 없었다. 그래서 고아원 아이들을 데리러 보냈다.
우리는 함께 조심스럽게 끈을 하나하나 풀었다. 우리는 포장지를 함부로 찢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접었다. 우리는 흥분되기 시작했다. 30-40쌍의 눈동자들이 큰 종이상자에 맞춰졌다. 맨 위 상자에서, 나는 밝은 색 니트 셔츠들을 꺼냈다. 옷을 아이들에게 나
눠주자 아이들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다음 상자에는 나환자들을
위한 붕대들이 들어 있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다음 상자에서는 건포도가 들어 있었다. 주말에 건포도 롤빵을 만들어 먹으면 딱좋을 것 같았다. 그다음 나는 다시 자루에 손을 넣었다. 그런데 무언가 잡혔다. 정말일까? 나는 그것을 끄집어냈다. 정말이었다. 상표가 그대로 붙어 있는 고무 보온병이었다. 나는 소리 내어 울었다.
나는 하나님께 그것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내 주실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룻은 아이들 맨 앞에 있었다. 룻은 앞으로 달려 나오며 소리쳤다 .
“하나님께서 보온병을 보내셨으면 틀림없이 인형도 보내셨을 거예요!”
룻은 상자 바닥까지 뒤적이다가 작고 예쁜 옷을 입은 인형을 꺼냈다. 룻의 눈빛이 빛났다. 룻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룻은 나를 올려다보면서 이렇게 물었다.
“엄마, 저랑 같이 가서 그 아이에게 이 인형을 전해줄래요? 하나님께서 그 애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애가 알 수 있게 말이에요?”
그 소화물이 배달되는 데는 꼬박 5개월이 걸렸다. 그 짐은 내가 가르쳤던 주일학교 학생들이 보낸 것이었다. 지금 이들을 지도하는 선생님은 적도에 보온병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긴급한 명령을 듣고 순종했다. 그리고 그 반 여자아이 하나가 “그날 오후” 인형을
주시리라고 믿고 기도한 10살 소녀의 기도에 응답하여 한 아프리카 아이를 위해 인형도 하나 넣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믿고 간구한 아프리카 소녀의 기도는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많습니다. 환경, 처지. 장애물, 문제, 상황 등 다양한 것들을 이유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 있다고 믿지 못한 채 염불을 외우거나 주문을 외우듯이 기도하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너무 오래 사셔도 늙고 병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김빠진 콜라처럼 맥없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역사하시는 전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땅에 추
락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것을 응답받으며 살아가는 것은 우리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불신앙에 갇혀 있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앞에서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들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들을 많이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경험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성경에 뿌리를 둔 것들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면서 깨닫게 된 원리들을 실천한 것이거나 기도 응답 후 그 근거를 말씀에서 찾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기도 응답은 매우
실제적인 것이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기도 응답을 통해 기쁨이 넘치는 신앙생활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_요 16:24
---「나오는 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