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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민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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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민율

서요나 | 파란 | 2021년 12월 1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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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2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239쪽 | 346g | 128*208*15mm
ISBN13 9791191897128
ISBN10 1191897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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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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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름의 역사

칼자국이 난 클루미 티셔츠를 입은 우리 둘
자동차 본네트에 걸터앉아
서로에게 괴담을 들려준다

괴담이 하나도 무섭지 않으면
그때마다 저녁이라는 말이 등 뒤에서
테레민이라는 말을 잘못 발음한 소리처럼 타이핑되어 흘러가는 기류에
기운이 빠졌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워크맨과 헤드셋을 저 멀리 벗어 놓고 있으면
악기가 화기로 변하는 소리가 들리지

이거는 너무 오래된 옛날이야기야
이를테면
공기에 비유할 대상이 아무것도 없어서
마치 공기가 없었을 것 같던 시절의 이야기

하지만 그런 건
시절이 아니라 계절처럼 느껴져 오고
계절처럼 느껴진다 싶으면
그냥 계보라는 이름에 더 가까울 것이다
싶었다

어째서 괴담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괴담 속에서 외롭게 보이는 걸까
온 세상에 사람이 마흔일곱 명뿐일 때
마흔일곱 명이 돌아가면서
단 일 초도 쉬지 않고 마흔일곱 개의 괴담을 발설해도
첫 번째 괴담
두 번째 괴담
마흔일곱 번째 괴담
그렇게 모든 사람 수만큼의 괴담을 쌓아 올리고 또 올려도
여기와 똑같은 세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여전히 주인공들은 이 지상에 혼자 있는 것처럼 외로워진다면
외로워지고야 만다면
그때는 소름이 끼쳐 오도록
나 강해질 수 있을 것만 같다

인간의 스물세 살이라고 허공에 중얼거려 보는 시간
그건 분명
짐승의 스물두 살을 생각해도 같은
계보로 상상되는데
스물세 살인 너의 허리에 고개를 파묻고 심장이 터질 듯 웃어 보면
너는 네 스물두 살의 계보가 아닌 것같이
뜨거워서 잠이 쏟아지고

너의 유년은 네 계보가 아닌 것
같고
계보가 아니라면 계절일까
혜린아 너는 어느 행성의 계절일까를 생각하는데

문득
악기 소리가 화기 소리로 들려오는 행성과
목소리는 아무리 멀리서 들어도 목소리인 행성이
같은 하나의 행성이라는 사실이
녹아내려 가는 체리 향 아이스크림처럼 되돌아가며 상기된다

그런 기억은 왜 이렇게 독한 것인지 항암제보다도
각성제보다도

마음이라는 어는점이
괴담에서 계단으로 계단에서 제단으로
하강하는 일은

괴담도 계단도 제단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려야 추동되는 걸까

등 뒤가 서늘해져 오는 건
죽지 않아도 시신의 냉기를 가질 만큼 너무나도
생명력이 지독한 사람과 사랑에 푹 빠져 버리는 기분이고
생명이 있는 것처럼
생명만 있는 것처럼
조심조심
조심조심

그런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와 주석과 발문들이 이끼처럼 돋아나도
끝끝내 사람만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건 영원히 괴담으로 남을 것 같아

결말은 있지만 영원한 이야기
그런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네가 들려주는 음성은
숨이 끊어지는 소리까지도 윤문되어 울려 나갔다

서령아, 귀신도 아닌데 귀신의 질료를 가진 것들이 사방에 많아
천사보다 아름다운 것들이 이 땅에는 넘쳐나는데
천사만 없다는 사실이
나를 공포에 질리게 해 서령아

정말로 공포에 대해 생각하면
그다음엔 절망하기에도 어색하고
간절해지기에는 더욱더 어색하고

아무런 불순물 없이 홀로 남은 공포의 주인은
얼마나 아리따울까
내가 오로지 나의 공포만을 원형으로 가진다면
오로지 나의 애정만을 원본으로 가진다면
나는 얼마나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울까

찢어진 클루미는 펄럭이고
너와 난 자동차 본네트에 걸터앉아 괴담을 주고받았다

워크맨이 툭
하고 꺼지는 소리에 우리가
마음이 뒤바뀌어 버릴 듯 화들짝 놀란다
본네트는 흔들리지 않고
본네트는 찌그러지지 않고
그림으로 그려 본다면
귀신보다
사람보다 위협적인 것을
그려 넣어야 할 것이라고 상상되었다

서로를 과녁처럼 너무 오래 바라보던 중이어서
누군가 오래오래 목을 조른 것같이
목이 시큼했다

그건
내 목이 나도 모르게
혼자서 꾸는 꿈이라고 믿었다

-------------------------------------------------------------

울리 리모네크

이 세상은 지상과 천국의 교배종이라고 배웠다

오늘 검은색 풍선들이 저 하늘을 뒤덮으며 흘러가고
울리야
오른쪽 손목의 동맥 속에 너는 전부 밀어 넣지
온 마음을
조금 더 많이 놀라고 싶어서

풍선들의 표면에는 리모네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리모네크
리모네크

세상의 모든 표피들이 무엇인가의 내피였던 시간들
우리는 그 단어를 이렇게 해석한다

물도 너무 오랜 세월을 살면 척추가 돋아날 거라는 믿음 대신
너를 사랑할 거라는 믿음만 가지고 싶어
라는 말은 오싹하지만

울리야 오직 너의 미호가
가짜 문을 뜯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교실 앞문을 열고
상처 하나 없이 새파란 맨발로 걸어 들어오는 걸 본 날
너 깨달았어
손잡이 없는 대검처럼 다시는 서로를
쉽게 만질 수 없겠구나
팅그르르 팅그르르
발로 치이는 소리밖에는 들려줄 수 없겠구나
너 정확히 알게 된 날
울리 네가 푸른 전원(田園) 사이로 걸어오며
콧속이 아프도록 울고 있었을 때
머릿속에 산양의 얼굴을 집어넣고
산양이 대신 흘려 주는 눈물을 눈꺼풀 사이로
쏟아 보내던 유월 십칠 일에

생일 축하해 난 집에 갈래

그날 하루의 처음이자 마지막 말을 꺼내고
집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지

어디까지 더 진화해 볼 수 있을까 우리
울음소리도 말로 들려올 수 있는 미래를 기다리며
이 세상의 어른들과 어른들의 어른들은 성장만을 가르치고
진화는 가르쳐 주지 않아

울음이 먼저 태어나고
그 위로 우는 사람이 자라나고
우는 사람 위로 무엇이
조명탄이 비추는 무기의 빛들처럼 눈부신 것이
솟아나길 기원하고 있으면

그사이에 네가
반대 방향을 돌고 돌아
몇 번이나 집 앞에 무사히 도착하고 또 도착하게 될지
그러다 보면

울리가 나보다 더 먼저 떠올리고
또 빠르게 까먹어 버릴지 알고 싶었다
공포라는 말은 노래의 제목으로
먼저 태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추론을

얼굴은 이미 아득한 하나의 관통상이었기에
얼굴에는 상처를 내선 안 된다고 모두가 외치는
이 행성에서
상처란 생겨나는 것이 아닌
고작 없어지는 것에 불과하다고
아무도 속삭여 주지 않는 이 모래 위에서

너는 매번 얼굴이 소거될 만큼 먼 곳에서만 나를 챙겨 주었다
나의 생일, 수술, 졸업, 성년
그리고 집으로 갔다
너라는 상처가 자꾸만 사라지는 시절에도
그다음 시절이 초록빛으로 쏟아져 스며드는 물약의 냄새처럼
밀려들어 왔지만

내 이름은 울리
숨어 버릴 수 있다면
나를 찾고 싶어 하는 사람이 모두 죽고 난 뒤에도 숨어 있고 싶어
캔버스화로 찍은 발자국
대각선으로 그어진 볼펜 자국투성이의 문제집도
남기지 않고 나를 감춰 버렸을 때 나 울리의 삶이
지금 막 인쇄된 백색의 폴라로이드 필름이라면
그 위에 영영 아무것도 현상되어 나타나지 않기를
인류가 모두 사라지고
사라진 인류를 기억하는 자들도 모두 사라지고
수천 번의 개체들이 멸종하고 또 탄생하고 다시 멸종하는 동안에도 영영
아무것도

풍선들은 끝없이 저기 저 위를 저기 저 아래처럼 지나가고
리모네크 하나
리모네크 둘
두 개의 사육장처럼 나란히 서 있는 오늘 우리

울리 너는 오른쪽 손목의 동맥 속에
기분과
기분의 기분들을 전부 다 밀어 넣는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압도되려고

너의 눈과 귀가 시들어 버리자
풍선들이 일제히 불타올라 사라진다

살아 볼 거야
터져 오르며 머리 위를 덮쳐 오는 오색 빛깔 폭죽들과
날아드는 차가운 케이크로도
감춰지지 않는 이 얼굴을 들고서라도

난 집에 갈래
축하해

울리 리모네크
울리 리모네크
울리야
하루가 유년보다 길고
유년이 이생보다 길었구나

슬픔의 단서만으로 영해 하나를 건널 수 있는 날들이어서
진짜 슬픔이 이렇게 사람처럼 방문해도
우리는 귀신이었네

-------------------------------------------------------------

비처럼 비밀처럼 비망처럼

소설도 아니고 르포도 아닌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을까
비처럼
비밀처럼
그런 게 있다면
비망처럼

그건 인간의 육신으로는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슬플 것 같아

그 애는 이제 오지 않아
더는 기다리지 마
저쪽 한켠에서 심해의 물고기처럼 입을 벌린 화장실이 있고
주인 없는 욕조에서 피어나는 회색 꽃들이 보이니
나의 시력같이
그 애는 이제 없어
최초의 성탄절처럼

신문 1면에서 그의 이름을 봤어
그 애가 숨어들어 있다던
하얀 종이의 모서리보다 뾰족한 지붕의 저택을 사진으로 내려다보고 있었어
수십 명의 사람들이 신문 가판대 앞에서 허리를 수그리고
내려다보고 있었어
그 애를 하늘에서 본 건 모두가 처음이었겠지
하지만 땅에서 본 사람은 있었을까?

그 애가 지나가는 곳마다 힘없이 눈이 내리던 작년 사월을 기억한다
확실히 아름다웠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사람인지 짐승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그 따가운 아름다움을 견딜 수 없을 때마다
기절했어 포근하게
깨어나서 거울을 마주 보면
쌍둥이를 마주친 신처럼 화들짝 놀라고 말았어

그 애는 확실히 악마 같았어
악마가 지나간 자리처럼 눈송이들이 힘없이
힘없이 운명을 달리하며 아스팔트 위로 추락하고 있었네

악마는 조수석에 앉기를 싫어했어
그래서 조수석의 가죽 커버가 주검처럼 차갑게 식어 갔어
감기 걸릴 것 같았어

나는 그 애를 랭글러 뒷좌석에 앉혀 놓고
질질 끌고 다녔어
일정 시속 이상으로는 그와 나란히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었다

앞좌석과 뒷좌석의 간격 안에서
우리는 뉴스처럼 서로에게 말해 주었다

탱고 들을래?

너는 탱고도 발음할 줄 모르는구나
바보 babobabo

나는 목줄을 맨 채 주인보다 더 멀리 앞서가는 개처럼
그를 질질 끌고 다녔어
끌고 다니다가
목이 졸리도록 끌고 다니다가

내가 기어이 사람이 된 것 같았단다
이게 온전한 사람이 되는 거로구나

각자가 완전한 사람이 될 때 우리 보지 말자
그 애가 공중전화 너머로 해 준 이야기가
어떤 뜻이었는지
언어를 이해하게 된 개처럼

기억이 났지 뭐야

그 애는 오지 않아 기다리지 마
혹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만 기다려

가디언즈 신문 1면에서 그의 이름을 봤을 뿐이야
그가 숨어들어 있던
하얀 종이의 모서리보다 뾰족한 지붕의 저택 위로
무자비한 폭격이 가해졌다는 기사를 지나치듯 읽었다

회색 연기가 영원토록 꺼지지 않을 듯이
허공 위로 솟구치고 또 솟구쳐 올랐다는 기사를
읽었을 뿐이야

CNN도 아니고 가디언즈라니
사랑스럽고 천박해
babobabo 바보

비망처럼
비밀처럼
비처럼

이렇게나 지독한 아리따움을 내게
보균시켜 놓고
CNN도 아니고 가디언즈 속에서 불타 버렸다니

얼굴만 지워도
피부만 벗겨 놓아도
미워할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그 애 그런 가사도 없이
노래 불렀지

잘 들어 봐
빠르게 듣거나
느리게 들으면
가사가 들릴 거야 하면서
잘 들어 봐

잘 좀 들어 봐
하면서
그 애

두 번 다시 들이닥치지 않을 거야

전쟁처럼
혼탁해지는
이 안구의 유리액처럼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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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요나의 시는 부른다. 두고 온 이름을 부르고 보고 싶은 사람을 호명하고 속삭이듯 허밍하듯 노래를 부른다. 누군가를 부를 때 그 소리는 자신의 몸 안에서 가장 먼저 울려 퍼진다. 그건 먼 곳을 가까이 당겨 오려는 목소리이며 미지에 가닿고자 하는 발걸음이기도 하다. 그렇게 마음에게로 번져 간 마음이 시인의 세심한 문장을 통해 읽는 이에게 스며드는 듯하다. 부드러운 고백과 어두운 길을 걸어가는 슬픔이 뒤섞인 시들은 한 편 한 편이 드물고 귀하다. 멀어서 아름답고 가까워서 슬픈 사람들. 관계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유려한 표현의 색을 입고 시집 전반을 물들인다. 요나와 이마를 맞대고 “1과 1이 11이 아니게 하는 거리는 몇 센티부터 시작되는가”를 고민하다 보면 어느새 시인이 불러 모은 친구들이 곁에 다가와 있다(「시크릿 시거렛 스크럼」). 다정한 이름들을 되뇌며 서요나의 시를 읽는 지금은 “너의 꿈이 나였다고 고백해 줄 시간”이다(「구애의 산란」).
- 이혜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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