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렇게 잘생기고 품위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단다. 얼굴에는 파우더를 발랐는데, 안색을 보니 맨 얼굴은 분명 희고 뽀얀 피부였을 거야. 자태가 여자처럼 섬세했고, 또 당시 우리가 ‘패치’라고 부르던 ‘애교점’을 붙였기 때문에 도드라져 보였어. 하나는 입술 왼쪽에 붙였고, 또 하나는 오른쪽 눈에 이어지는 점이었지. 옷 색깔은 푸른색과 은색이었고. 나는 이 아름다운 젊은 남자에게 넋이 나갔단다. 마담이 그를 데리고 와서 내게 소개를 시켰을 때, 나는 마치 천사 가브리엘이 내게 말을 걸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을 정도였어. 마담은 그가 ‘무슈 투렐’이라고 소개했고, 그는 나에게 프랑스어로 말을 걸었어. 난 그가 하는 말을 완벽히 이해했지만 똑같이 프랑스어로 그에게 응대할 엄두가 나지 않더라고.
그러니까 그 남자가 독일어로 바꿔 말하기 시작했는데, ‘쉬’, ‘스’ 발음에 부드럽게 혀짤배기소리를 내는 거야. 그게 참 멋져 보였어. 하지만 그날 밤이 무르익을 무렵이 되자 나는 그 부자연스럽고 꾸민 듯한 부드러움하며 여성스러운 태도가 점점 버겁게 느껴지고, 내게 표하는 과한 칭찬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어.
--- p.24~25
방 한가운데 테이블을 가로질러 붉은색, 푸른색, 보라색, 얼룩덜룩한 색으로 치장을 한 16세기, 17세기, 18세기의 사람들, 터키인으로 에스키모로 또 도미노 가면 복장과 광대로, 얼굴에는 화장을 바르고 꺼먼 코르크로 분장을 하고 분을 바른 시끌벅적한 인간들로 가득 찬 이곳. 나는 그 핏빛 일몰이 야생화 밭을 피바다처럼 휩쓸고 지나쳐 검은 연못과 바람에 굽은 전나무 숲 옆, 죽은 말과 함께 쓰러져 있는 크리스토퍼 러브록의 시신을 비추는 광경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습니다. 사방의 노란 자갈과 보라색 히스가 진홍빛으로 물들어버린 광경이었지요. 그러더니 그 시뻘건 배경에서 회색 모자를 쓴 옅은 금발의 머리가 드러나는 겁니다. 오키 부인의 그 멍한 눈, 그 기이한 미소. 나는 정신병원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간 것처럼, 그 광경이 끔찍하고 상스럽고 혐오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 p.176
폴이 그런 말투와 표정을 짓자, 릴리언은 둘의 위치가 바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폴이 주인 같고 자신이 하인이 된 것 같았다. 릴리언은 자긍심이 대단하고 고집도 센 성정이었지만, 아이 같은 마음으로 그런 생각이 딱히 싫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폴이 이제 돌아갈 시간이라고 말하자, 평소 같지 않은 유순한 태도로 그의 말에 따랐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릴리언은 옆에서 터벅터벅 말을 타고 나아가는 생각에 잠긴 폴의 얼굴을 몰래 흘끔흘끔 살펴보았다. 이전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폴은 한 번씩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아무 소리 내지 않았고, 가무잡잡한 이마엔 주름이 져 있었다. 한번은 자신의 연인을 생각하는 듯 사진이 있는 가슴에 손을 갖다 대기도 했다.
--- p.249-250
그리고 저기 나의 동포들은 파괴에 맞서 절망적으로 씨름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분투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비명을 들은 건 분명했다. 그들의 날카로운 고통의 비명이 포효하는 파도 소리 위로 날아왔다. 검은 파도가 산산조각 난 배의 파편을 여기저기로 날리고 있었다. 이내 난파선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 광경에 압도당해 끝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마침내 무릎을 꿇고 말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물결을 타고 해변 쪽으로 떠내려 오고 있었다. 그것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저게 인간의 형상인가? 점점 더 또렷해지고 있었다. 그러더니 마침내 철썩 하고 커다란 파도가 한 번 치자, 그게 둥실 떠오르더니 바위 위에 척 걸터앉았다. 선원의 사물함에 걸터탄 인간의 형상이었다! 인간이었다! 그러나 진짜 인간 맞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 p.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