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불교도들은 붓다를 일체지자(一切知者) 혹은 전지자(全知者)로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일체지자 혹은 전지자란 ‘모든 것을 다 아는 자(the Omniscient One)’라는 뜻이다. 만일 붓다를 전지자로 이해하게 되면 신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붓다는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일체지자 혹은 전지자에 해당하는 빨리어 원어 ‘삽반뉴 (sabbannu)’는 니까야에 몇 번 나오지만, 모두 당시의 외도들이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사용했던 말이다. 예를 들면 자이나교의 교주 니간타 나따뿟따(Niga??ha N?taputta)는 자신을 ‘일체를 아는 자이고, 일체를 보는 자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붓다는 자신을 전지자라고 지칭한 적이 없다.
왓차곳따(Vaccagotta)라는 유행자가 붓다를 찾아와 사람들이 ‘붓다도 일체를 아는 자이고, 일체를 보는 자’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러자 붓다는 “그들은 내가 말한 대로 말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거짓으로 나를 헐뜯는 자이다.”(MN.Ⅰ.482)라고 말했다. 이처럼 붓다는 자신을 ‘삽반뉴(一切知者)’라고 호칭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붓다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일찍이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진리의 길을 발견하여 그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붓다는 전지자인가?」중에서
그리고 붓다는 마지막으로 아누라다 존자를 칭찬하고 이렇게 말했다. “아누라다여, 나는 예나 지금이나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가르칠 뿐이다.”(SN.Ⅲ.119) 이 부분을 각묵 스님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첫째는 세존께서 사후의 문제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답변하지 않고,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의 소멸에 도달하는 실천적인 길을 설할 뿐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둘째는 여래란 무상한 여러 현상이 합성된 것이요, 그래서 괴로움이요, 그래서 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그래서 이것은 단지 인습적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에 대한 모든 사유나 설명은 단지 인습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습적인 것에 대해 설명은 하지 않고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인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만을 천명한다는 것이다. 각묵 스님은 첫 번째 이해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두 번째 해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필자는 붓다가 “나는 예나 지금이나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가르칠 뿐이다.”(SN.Ⅲ.119)라고 선언한 이 대목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오직 붓다의 관심은 중생들의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붓다가 평생 설한 가르침은 오직 중생들의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설법이었다.
---「인간 가운데 가장 높으신 분」중에서
단다빠니(Da??ap??i)라는 삭까[釋迦族] 출신의 사람과의 일이다. 단다빠니가 붓다께 “무엇을 설하시는 분이냐?”라고 공격적이고 무례한 질문을 했을 때, 붓다는 “나는 그 누구와도 논쟁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즉 세속적인 잣대로 따지는 사람에게 논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때는 차라리 논쟁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상윳따 니까야』(SN22:94)에서는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다툰다. 법을 말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다.”(SN.Ⅲ.138)라는 경문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 경전의 말씀은 붓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경전에 설해져 있다고 해서, 아무나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라한이 아닌 범부(凡夫)는 단 하루도 세상과 다투지 않고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중에서
붓다의 가르침은 이상적인 인간 형성의 길을 제시한다. 즉 아라한(阿羅漢)이 되는 길을 제시한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아라한이란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일을 다 해 마친 사람’을 말한다. 불교의 궁극 목적은 열반을 실현하는 데 있다. 그 열반을 실현한 사람을 아라한이라고 한다. 누구나 지금·여기에서 아라한이 되어야 하며, 아라한과를 얻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나 다름없다.....내세의 존재 여부는 현재의 삶에서 증명할 수 없다. 붓다는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지 말고, 오직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고 했다.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가르침이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면 내세의 생천(生天)은 보장된다. 굳이 사후에 천상세계에 태어나는 것[生天]을 목표로 삼을 필요는 없다.
---「불교는 인간을 위한 가르침」중에서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지금·여기(here and now)’에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 즉 지금 여기에서 실현하는 열반을 말한다. 이것을 불교 용어로 ‘현법열반(現法涅槃, di??hadhammanibb?na)’이라고 한다. 열반은 이승에서 실현하는 것이지 죽은 뒤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열반을 이루기 위해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초기불교에서는 죽어서 하늘에 태어나는 것, 즉 생천(生天)을 이상으로 삼지 않는다. 현법열반은 죽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이 몸을 가진 상태에서 무지와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하기만 하면 곧바로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불교를 신행하는 목적은 ‘지금·여기’에서 최상의 행복인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붓다는 현세의 즐거움을 버리고 내세의 즐거움을 추구하라고 한 적이 없다. 어떤 사람은 열반을 죽어서 얻는 것으로 잘못알고 있다. 하지만 열반은 살아 있는 ‘지금·여기’에서 획득하는 것이며, 사후에 기대되는 낙원이 아니다.
---「‘지금·여기’에서 실현하는 열반」중에서
인간의 삶은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은 현실을 떠나서는 단 하루도 생존할 수 없다. 깨달음을 이룬 성자라 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없다. 육체를 가진 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음식물을 섭취해야 하고 잠도 자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특히 그중에서도 경제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다. 어떤 사람은 현실을 아주 초월한 것처럼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깨닫기만 하면 배우지 않은 것도 모두 알 수 있고, 신통력까지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들은 깨달음이라는 신기루와 같은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깨달음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 붓다는 비관주의자도 낙관주의자도 아닌 자기 경험에 바탕을 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현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르게 직시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어떻게 모든 사람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또한 붓다는 과거의 일에 매달리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미리 걱정하지도 말고, 오직 현재의 삶에 충실히 하라고 가르쳤다. 이보다 더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가르침은 없을 것이다.
---「네 가지 왜곡된 견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