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사론이 한국사 이해에 적극 원용되기 시작하면서, 종래의 '민족주의사학'에 대한 질타가 계속되고 있다. '긍정적' 사실만을 기술하고 '부정적' 사실을 외면함으로써 결국 자민족 예찬에 빠지고 말았고, 민족의 정체성을 과도하게 강조함으로써 패쇄성과 배타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사 연구자들이 경청하고 자성해보아야 할 지적들이다.
그러나 한국사 이해를 이렇게 만든 장본은 의사 민족주의 사학이지 진정한 '민족주의사학' 이 아니다. 흔히 민족주의사학이라고 부르는, 고대와 중세를 거치면서 장구한 세월 발전해온 우리의전통 역사학을 근대적으로 성립시킨 정통 역사학이 제대로 발전을 계속하였다면 우리의 역사가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의 독자성과 존엄성을 주체적으로 인식하더라도, 제 자신의 잠재적 능력뿐 아니라 한계를 명확히 알고, 그럼으로써 다른 국가나 민족의 주체성과 고유성을 존중하는 방향에서 역사의 연구와 교육이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근래의 비판과 자성은 정통 역사학의 회복으로 진전되어야 한다.
한국사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 인식을 원용하는 연구가 진척되면 피지배층의 일상과 심성 등 종래의 역사학이 등한시해왔던 측면에 대한 이해가 넓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이 작업들이 국가와 민족중심의 역사 인식이 가질 수 있는 폐해를 지적하는 것에 골몰하여 그 의의를 극구 부인하려는 점은 신중히 재고해볼 부면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종래의 잘못된 방향을 돌리기 위한 반작용이 아니라, 본디 어떠했어야 했는지 정도를 되찾는 일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본디 국가 계획과 통제에 반발하여 진행된 1960년대의 사회 변화를 배경으로 대두한 사조였다. 즉 1917년의 러시아 혁명으로 정점에 달했던 국가 계획의 구상과 1929년부터 시작된 세계 대공황의 타개책으로 제시된 케인즈의 국민경제에 대한 국가통제 이론이 구현됨으로써 전 세계가 국가중심의 사고를 강화해오던 터에 일어난 저항의 한 형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안목에서 본다면 국가와 민족중심의 역사 이해는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런 반발이 오히려 '신경제'라는 강화된 자본주의 체제를 범세계적인 것으로 확산시키는 데 기여한 측면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지향한 바가 아니었다.
인간의 삶은 사회적 맥락이나 원인에게 자유로울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맥락을 판단할 준거를 거부하고 사상시킨 결과, 뜻하지 않은 역할을 본디의 지향에 반하여 수행하게 된 것이다. 국가나 민족의 장벽을 허문 것이 자본주의의 변용과 강화에 이용된 측면이 있다면, 적어도 현 상황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스스로 그 지향을 재검토해보아야 할 단계에 이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국가와 민족의 역할은 아직 긑나지 않았다.
민족중심의 역사 이해가 한국사를 왜곡으로 이끌었다는 지적은 부당하다. 민족중심의 사관과 역사 서술은 우리가 완성하고 이루어내야 할 과제다. 그것은 민족의 성장과 발전 과정을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 원리 위에서 체계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민족의 독자성과 자존심을 지키는 동시에, 각 민족의 특수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며 공존ㆍ공영을 추구하는 사관(史觀)이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이것이 제대로 서지 않았기 때문에 의사 민족주의가 세를 얻고 역사교육이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 pp.315~316
19세기 말의 '세기말적 현상'을 연상시키느 정치적 변동과 지적 위기의식이 20세기 말을 흔들고 그 여진이 21세기 벽두에도 지속되고 있다. 소비에트 연방 및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해체에 이은 미국과 이슬람 문명권의 충돌은 기존의 국제 질서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학문 분야에서의 소위 '포스트모던적 도전'은 인문ㆍ사회과학 분야에서 통용되던 오래된 가설과 이론들을 위협했다. 국제 정치와 지성계를 휩쓴 세기말적 위기의식의 파장은 역사학계에까지 미쳤다. 마치 현대판 용가리처럼 대단한 식욕을 자랑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라는 괴물의 파괴력 앞에 역사학의 기본 명제들마저도 무장 해제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적 사실과 인과론, 텍스트와 저자, 경험과 언어 등 역사 연구와 서술에 필요 불가결한 기존 개념들을 희롱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횡포에 많은 전문 역사가들도 방향 감각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통칭되는 20세기 후반의 지적 현상이 역사학과 역사 서술에 끼친 긍정적ㆍ부정적 영향들을 이해하는 것을 기본 목표로 한다. 과연 포스트모더니즘의 긍정적인 종착역은 '역사의 종말'인가?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사실'을 추구하는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은 여전히 가능한가? 이와 같은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보기 위해 필자는 최근 미국 역사학계와 일반 독서계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두 권의 대중적인 역사서인『역사에 대한 진실 말하기』와『20세기 사학사』가 제기한 이슈들을 소개ㆍ분석하고자 한다. 이 두 저서들을 이 글의 주원료로 선택한 것은 다음의 몇 가지 이유에 근거한다.
첫째는 순전히 개인적인 것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역사학과 관련된 수많은 논문들과 저서들을 모두 섭렵하여 소개하기에는 필자의 역량과 지식이 역부족이라는 자각이다. 주지하듯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역사학의 위기와 위상에 대한 논의는 서양에서 이미 수 십 년 전에 시작되어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학문적 화두이며 끈질긴 유행이다. 이를 둘러싸고 다양하고 복잡하게 전개된 논쟁들을 완전히 소화하여 설명하지 못할 바에야 제3자가 명확하게 재구성한 논쟁을 꼼꼼히 요약ㆍ해석ㆍ평가해서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연구자의 올바른 '서비스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외국 학자들이 벌린 학문적 향연에 대해 국내 서양사학자들이 언제까지 '학문적 설거지' 를 해야 하는가라는 자조(自嘲)적인 한탄도 있겠지만,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학문적인 부실 공사' 보다는 성실한 '학문적 뒤치다꺼리' 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 pp.8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