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연인

가을바람이
나무에 기대어
소곤거린다

바람이
나뭇잎을 사랑하는 까닭에
나뭇잎도
붉은색으로 깊어진다

가을바람은
나뭇잎이 그리워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려왔나 보다

나뭇잎을 만나면
고요해지는 바람은
나뭇잎을 위해 태어난
보이지 않는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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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잠에 빠진 바다

가을 햇살에
하품하며 누워있는
갈맷빛 바다

반짝거리는
이불을 덮고
초승달 같은 눈을
사르르 감는다

바다는
꿈을 꾸듯
깊은 잠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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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울 때만 소리 내어 운다

숨을 쉬고 있다 바람이
억새의 몸 사위로
사각거리며
구르는 낙엽의 소리로
살아있음을 알리고 있다 바람이

자신이 가는 길을 알리고 있다 바람이
풀들이 눕는 곳을 향해
여인네의 한복 고름이 날리는 곳을 향해
자신이 가는 곳을 알리고 있다 바람이

가을이 깊었음을 알리고 있다 바람이
백록담에서 윗세오름으로
소리 없이 내려오더니
가을바람으로 익은 단풍이 팔랑거린다

바람은,
없는 듯하나 있고
잠자듯 고요하나 늘 깨어있다
엉겅퀴밭도
귤나무과수원도 흔들어 깨운다

바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울 때만 소리 내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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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담을 보면

태초에 땅에서 솟아오른
서로 다른 돌덩어리가
밭담이 되었다

늘 그 자리에서
거칠게 다가오는 풍파를
가슴으로 막아주면서도
한결같이 겸손한 모습

밭담을 볼 때면
자연에 순응하며
한평생
자식을 키워온
아버지의 큰 가슴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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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서귀포 가는 길에는

서귀포 가는 길에는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햇살이 익어가는 길 따라
그 길을 걷고 싶어진다

유채꽃, 목련, 복숭아꽃, 벚꽃이
만발한 길 따라 걷다 보면
나는 어느새
꽃의 요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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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향기

들판에 찔레꽃
흐드러지게 핀 오후
하얀 향기에 취해
꽃잎 속에 파르르 떠는 벌이 되고

산 향기 가득한 저녁이면
내 마음도 맑아져
툇마루에 앉아
산 향기 붓으로 푹 찍어
한 송이 피워내는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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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가는 길

마음을 쉬려고
산책을 나섰는데

싱그러운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두 마리 참새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바람도 감미로워
버드나무 잎이
푸르게 익어가는 시간에
참새는 짹짹거리고
나는 휘파람으로 화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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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못

아름다운 돌담
산들거리는 바람에
하늘거리는 하가리 연화못 연꽃들
연분홍 연꽃이 수줍은 듯 피었네

바람의 움직임에
연꽃의 자태는
고요 속에서
찬란히 피었나니
그대는
물속에서 솟아난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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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이 익어 피어난 억새꽃

가을, 산굼부리 억새밭에 가면
여름과의 이별이 서러운
억새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계절의 이별이 아쉬워
세인 머리칼을
바람에 태워 쪽빛 하늘로 보내는 시간

가을, 산굼부리 억새밭에 가면
이별이 익어 피어난 억새꽃이
가을 들판에 난무하고 있다

이금미의 시에서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공감의 감정이 가득하다. 자신의 가족은 물론 타자에 대한 공감의 마음이 가득한데, 무엇보다 어머니에 대한 감정에서 시인의 공감 서정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어느 시인이든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각별하지만, 특히 이금미의 시에서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어머니 연작시가 가능할 정도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리운 어머니」, 「어머니 마음 닮은 벚꽃」, 「어머니의 미소」, 「메밀꽃으로 피어난 어머니」, 「어머니와 도시락」 등 이루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br/><br/>사무치는 그리움에<br/>천상에서<br/>바람으로 태어나<br/>먼 길을 달려와<br/>제 볼을 어루만집니다<br/><br/>눈에 보이지는 않지만<br/>살아생전 말씀하셨던<br/>따뜻한 음성이 들려옵니다<br/><br/>부드러운 미소가 <br/>바람이 되어<br/>내 몸을 감싸고 있습니다 어머니<br/>- 「그리운 어머니」 부분<br/><br/>「그리운 어머니」는 저세상으로 떠나가신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한 사모곡 思母曲이다. 어머니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은 “천상에서/ 바람으로 태어나/ 먼 길을 달려와/ 제 볼을 어루만집니다”로 표현된다. 나에 대한 관심은 타자에 대한 공감보다 더 강하며,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보다는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더 공감과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는 공감의 감정이 사랑의 깊이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시인에게 “어머니의 미소는/ 내 마음의 연못에 핀/ 한 송이/ 연꽃입니다” (「내 마음의 연못에 핀 꽃」) 라고 표현된다. 공감과 사랑의 감정은 공통적으로 따뜻한 마음이 전제될 때 가능하다. 시인의 이런 감정은 「나를 닮은 아이」, 「당신」, 「손녀를 보며 2」, 「외국인들의 고향」과 같은 시에서 잘 드러나듯이 가족은 물론 이웃들에게도 확산된다. <br/><br/>가을바람이 <br/>나무에 기대어<br/>소곤거린다<br/><br/>바람이 <br/>나뭇잎을 사랑하는 까닭에<br/>나뭇잎도 <br/>붉은색으로 깊어진다<br/><br/>가을바람은<br/>나뭇잎이 그리워<br/>거친 숨을 몰아쉬며<br/>달려왔나 보다<br/><br/>나뭇잎을 만나면<br/>고요해지는 바람은<br/>나뭇잎을 위해 태어난<br/>보이지 않는 연인<br/>- 「바람의 연인」 전문<br/><br/>시집의 표제작인 「바람의 연인」에서 가을바람은 나무에 기대어 소곤거린다. 가을바람은 나뭇잎이 그리워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려왔다. 바람은 나뭇잎을 만나면 고요해지고 나뭇잎을 위해 태어난 보이지 않는 연인이다. 또한 「벚꽃의 연서 戀書」에서는 봄바람에 살포시 피어나는 벚꽃잎이 되어 꽃향기 그리워 한 마리 나비로 날아오기를 바란다. 「바람의 연인」과 「벚꽃의 연서 戀書」에서 보듯이 시인은 봄바람, 벚꽃잎, 나비가 되어 그들과의 낭만적인 사랑을 꿈꾼다. 일견 이금미의 시에서 주목하는 삶은 소박하다. ‘낭만’ 속에서 자연의 대상과 하나가 되기<br/>를 꿈꾸는 시인의 삶은 크게 화려하지도 않고 대수롭지 않은 일로 보인다. 그러나 메를로 퐁티가 말하듯이, 시인은 이처럼 대수롭잖아 보이는 현상에 ‘시적 폭력’을 가하고, 이런 낭만적 풍경들을 통하여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의미를 생생하게 살려낸다. <br/>한 존재가 다른 존재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며 그 소리와 모습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 그러니까 타자 앞에 서서 그들의 소리를 듣는 것, 큰 목소리가 아니어도 오직 세상과 자연의 목소리를 순수하게 듣고 바라본다는 것은 결코 예사롭지 않다. 이런 공감이야말로 어떤 거창한 규율이나 법칙에 앞선 중요한 삶의 윤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금미의 시에서 인간과 자연의 공감은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br/><br/><br/>*시인의 말<br/><br/>먼 길을 돌아와 <br/>쉼표하나 찍는 마음으로<br/>첫 시집을 출간합니다<br/><br/>시는 <br/>내 삶의 흔적들을<br/>하나씩 풀어내는 <br/>나의 벗이고<br/><br/>내 삶의<br/>희로애락을 품어주는<br/>인생의 동반자입니다<br/><br/>시는<br/>내가 받은 선물 중에 <br/>가장 큰 선물입니다<br/><br/>시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br/>내가 받은 뮤즈의<br/>가장 큰 선물이었으며<br/>시를 쓰는 순간은<br/>잉태를 위한 산고의 시간들이었기에<br/>행복했습니다<br/><br/>2021년 11월 가을에<br/>이금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