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사회에 ‘탁’ 하고 나왔는데, 역시나 우려했던 거대한 바다에 직면합니다. 저한테는 배도, 구명조끼도, 잠수복도,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장비가 하나도 없었어요. 거기에 파도는 너무 거칠고, 이
런 느낌. 하지만 어쩌겠어요. 부딪히는 거 택했어요. 영화사 찾아가서 연출부 이런 자리 구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계속 굴리고 찾아가고 또 찾아가고 문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자꾸 찾아가면 나중에는 찾게 되요. 배우들도 자꾸 찾아가고 찾아가고 하면, 귤 2,000원어치 사가기도 하고 그러면, 그 귤 먹으면 해줘야죠. 사람에 대한 연민을 느낍니다. ‘아, 나도 저랬었지. 나도 두려움을 느꼈었지. 아, 얘는 두드리는 구나. 앉아서 기다리지 않는 애구나’ 합니다. 당연히 두렵죠. 소리치지는 않을까, 쫓겨나지는 않을까. 그런데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압니까?
대부분 걱정이란 걸 많이 하잖아요. 걱정에 휩싸여 있다는 건 몸이 편한 거예요. 그건 지금 안 하고 있다는 거거든요. 해결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세상 걱정의 3분의 1은 벌어지지도 않을 일이죠. 그리고 3분의 1은 걱정해봤자 달라지지 않는 일이고. 결국 60%의 걱정의 의미가 없는 거죠. 그래서 저는 걱정하는 것은 내가 지금 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게으르고 나태한 거죠.---pp.21-22(‘두려움: 두렵다고? 일단 뛰어!-장항준’ 중에서)
저는 제 인생의 상승기를 마흔다섯으로 잡았거든요. 동창회에 가면 “뭐하냐?” 물어요. 그럼 “나 놀아” 그래요. 그러면 아무 말도 안 하고 물어보지도 않아요. “나 대학원에서 뭐하고 있고…” 이런 게 재수 없는 거죠. 그냥 논다고 해요. 고등학교 수석하고 서울대 들어간 친구는 사오정 신세가 됐어요.
요즘 젊은 친구들 보면 진짜 꿈도 너무 많고 계획도 무지하게 많아요. 저는 그게 조금 갑갑하게 보여요. 뭘 그리 빡빡하게 살아요. 제가 서른에 대학 졸업할 때 주변에서 얼마나 겁을 주는지, 20대 넘어가면 취직도 안 된다고 했었어요. 전 그냥 그랬어요. ‘아, 그럼 안 가.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
그런데 다 가게 되요, 되더라고요. 미리 넘겨짚고 걱정하고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재미있게 살 수 있는 것들이 많은데 오히려 그걸 스스로 막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사회에서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게 있으면 반대로 해봐요. 과연 사회에서 도태될까요? 아뇨. 되레 주목을 받아요. 방송국에서 절 1주일 동안 쫓아다니면서 촬영한 적도 있어요. 연구원에 있는 사람이 클럽 다니는 게 신기하다고.
타협이 뭐죠?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사는 거잖아요. 왜 내비게이션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가야 하죠? 다른 길로 가도 되잖아요. 예전에는 내비 없어서 못 찾아갔나요? 저는 이런 게 굉장히 짜증이 납니다. 노래방이 생긴 다음부터는 가사를 못 외우겠고. 왜 자꾸 뭔가 나한테 주려고 하는 거죠? 주어지는 건 정답이 아니에요. 익숙한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춤을 춰보면 자기가 좋아하는 리듬이 있어요. 참 신기한 것이, 가장 편한 동작으로 움직이다 보면 춤이 되는데, 그 동작이 서너 시간 지나면 자유를 얻습니다. 그 상태가 되면 어떤 음악이든지 표현이 되요. 그때 그 춤을 추는 사람이 정말 아름답게 보입니다. 남을 의식할 이유가 없어요.---pp.43-44(‘타협: 말 안 듣는 청춘 되기-류재현’ 중에서)
문제는 ‘왜 스펙이 필요한가’예요. 스펙에 연연해하지 않고 당당하려고 했지만 현실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주눅이 들죠.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비교문화 사회예요. 어느 사회건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기준을 따라야 하죠.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하듯, 비교문화에서 자유로우려면 비교 우위에 서든지 아니면 비교문화를 떠나야 해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듯. 그런데 무조건 그 사회의 가장자리를 겉돌며 비난만 하는 건 문제가 있죠. 그 사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직 발도 못 디뎌본 곳을 바꾸기란 불가능하죠. 현재 우리 사회가 스펙을 요구하죠. 제가 결국 대학을 갔던 이유가 여러분이 대학가고 스펙 쌓는 이유와 똑같아요.
왜 스펙에 목숨을 걸까요. 결국 우리가 무능해서 그래요. 스펙 외에는 특별히 내세울 게 없어서 그래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기여할 기술도 없고 재능도 딱히 없고, 아이러니컬하게도 무능하니까 스펙 쌓는 거죠. 비교문화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우위에 서든지, 이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을 갖추든지, 아니면 이 사회에 남아 있지 않으면 돼요. 예를 들어 농촌으로 가세요. 거기는 비교문화가 없어요. 그건 당연히 싫겠죠. 도시의 화려함을 맘껏 즐기고는 싶은데 그 화려함이 요구하는 스펙은 싫은 거예요. 농촌 가면 화려함이 없어 싫을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은 투정쟁이인 거예요.---pp.70-71(‘스펙: 내가 만드는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유수연’ 중에서)
3가지 사고방식이 있어요. 이 오륙만 가지 생각을 어떻게 경영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져요. ‘연역’, ‘귀납’, ‘발상’, 이렇게 3가지예요.
‘연역’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대전제―소전제―결론’이죠. 가령 제가 친구랑 만나서 얘기한다고 해봐요. “우린 왜 남자 친구가 없을까?” 하고요. 그럼 대전제가 세워져요. “남자들은 김태희 같은 여자들 좋아한다.” 이제 소전제, “나는 김태희 만큼 예쁘지 않다.” 결론, “나는 남자 친구가 없을 것이다.”
‘귀납’은 부분에서 전체를 추리하는 것, “A오빠도, B오빠도, C오빠도 김태희 같은 얼굴을 좋아한다”―“나는 김태희처럼 안 생겼다”―“망했다”, 이런 거.
‘발상’은 “아, 시끄럽고! 어떻게 해야 남자친구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 사고방식을 우리가 선택할 수 있어요. 생각나는 게 아니라 생각하는 거죠. “서울대를 가야 잘나간다”―“난 서울대 안 나왔다”―“그래서 난 망했다”, 연역이죠. “잘나가는 애들 A·B·C 다 서울대 나왔다”―“난 서울대 안 나왔다”―“그래서 난 망했다”, 귀납이에요. 그런데 발상을 할 수도 있죠? “아, 시끄럽고! 어떻게 해야 잘나갈까?”
발상을 해야 해요. 대부분의 청춘들이 노인과 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요. 뭐가 아니라서 못한다는 사고방식 말예요. 연역·귀납으로 생각하면 우울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어요.---pp.132-133(‘한계: 한계는 한 개의 의견일 뿐-박신영’ 중에서)
인생은 잘 놀다 가지 않으면 불법입니다. 잘 노는 게 어떤 건가요. 사람이 성장기가 끝나면 20대가 되잖아요. 기운 좋게 살 수 있는 건 그 후 30년이에요. 이 고작해야 30년을 잘 놀아야 해요. 돈 내고 노래방 가서 노력하고 춤추면 재밌죠? 돈 받고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은 재밌을까요? 재미가 없어요. 왜? 일이기 때문이죠. 돈 내고 걷는 골퍼는 재미있지만 돈 받고 걷는 캐디는 짜증이 나요. 골퍼는 즐겼지요. 스포츠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캐디는 그저 노동이고 일거리일 뿐이었어요. 그러니까 생각을 슬쩍 바꾸면 돼요. 자존심을 뒤집어엎으면 돼요.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늘 시달림을 당해요. 현대에 와서 보고 들은 게 너무 많아요. 괜히 내가 세상에 손해를 봤다는 의식이 생겨요. 이걸 ‘손실 혐오’라고 해요. 일테면 제게 공돈 10만 원이 생겼다고 쳐요. 이걸 한 사람에게는 만 원을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9만 원을 주면 만 원 받은 쪽에서 기분 나빠요. 손해를 봤다고 느껴요, 어차피 공돈인데도 말이죠. 대한민국에서 얼굴과 몸매에 가장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누굴까요? 바로 연예인들이에요. 얼굴과 몸매로 경쟁하며 먹고 사는 바닥이라서 그래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세요. 세상에 나보다 잘난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걸 인정해야죠. 날마다 근심, 걱정, 짜증, 두려움, 고통, 실패, 좌절, 아픔… 수도 없이 겪어요. 다 마음의 쓰레기예요. 쓰레기는 버려야죠. 왜 스스로 쓰레기를 마음속에 넣고 살아요.---pp.184-186(‘열등감: 누구도 권하지 않은 나만의 착각-김홍신’ 중에서)
구체적으로 바라보세요. 문제가 있으면 일반화시키지 마세요. 영어 못한다고 공부 못하는 거 아니죠. 사귀던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세상 여자들이 다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고요. 그런데 실연 한번 당하면내가 여자들이 싫어하는 남자라는 생각 들죠. 심지어 지나가는 개가 짖으면 ‘개도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해결할 때는 일반화하지 말고 쪼개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덩어리로 인식하지 마세요. 자세히 들여다보고 쪼개보세요.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를까’ 생각하기 쉬운데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모든 면에서 다 그런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게으름은 고쳐야 하지만 손쉽게 허물어뜨릴 수 있는 것, 쉽게 할 수 있는 것부터 고치면 됩니다. 자세히 보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퇴근 후나 주말에 별 생각 없이 빈둥대는 건 잘못되고 잘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 나 너무 한심한 것 같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어요. ‘이제는 뭐 좀 해볼까’ 하고 편하게 생각하시면 돼요.
---pp.251-252(‘게으름: 무기력에 이르는 병-문요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