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덕소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63년《여원》에 단편소설「늪 주변」이 당선되었으며, 1975년 단편소설「사랑의 기쁨」과 「어떤 시작」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소설집으로 『폭설』(1979),『겨울나무 사이』(1986),『알마덴』(1988),『돌아온 날개』(1993),『꽃철에 보내는 팩스』(2002) 등이 있고, 중편소설『잠과 꿈』(1987), 연작소설『물이 물속으로 흐르듯』(1991), 자매소설집『먼 집 먼 바다』(1977),『집?그 여자는 거기에 없다』(1996), 장편소설『모래시계』(1986),『꽃을 든 남자』(1989),『소금의 시간』(1996),『낭만의 집』(1998),『물빛 물소리』(2005) 등이 있다. 1997년 중편소설「사랑의 예감」으로 제21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1999년 마이클 뉴튼의『영혼들의 여행』을 공저로 번역했고, 2009년 아버지 김동환의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을 각색해 동명의 시극(詩劇) 극본으로 발표했다. 2013년 1월 30일 향년 71세의 나이로 뉴욕 맨해튼에서 타계했다.
진주는 문득 뻗어 있는 이 길 끝까지 달려가 대륙의 저 끝에 파도치는 바다까지 가볼까 생각했다. 그곳은 지금 한여름 철로 열대식물이 우거지고 파인애플 같은 달이 둥글고 맛있게 떠 있을까. 진주는 가끔씩 이런 종류의 판타지를 보고는 했다. 불이 환히 켜진 대륙 횡단 버스 같은 것을 타고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흔들려 가는 것. 책임 없이 생각 없이 그렇게 끝까지 실려 가보는 것. 그러나 진주는 이 대륙에서는 뉴욕 외에 아무 데도 알지 못하고, 또 가장 쓸쓸한 것은 그렇게 가봐도 별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 p.26
오늘 아침 진주는 길을 가다가 ‘진주’ 하고 부르는 그 특별한 억양의 기의 목소리를 듣고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 그가 이 세상에는 아무 데도 없음을 깨달았다. --- p.127
언제나 기대했던 일은 이렇게 되고 말아, 혜기는 흐르는 물에 손을 놓고 오늘을 기다려왔던 자기를 생각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기쁜 일이 생기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내 인생은 늘 같은 빛깔이야, 미인 대회에서 왕관을 쓴 여자들은 웃으면서도 눈물을 흘렸었다. 눈물이 날 만큼 기뻐 죽을 일은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 p.198
온 세상이 움직임을 멈췄다. 혜기의 심장은 고동을 멈추고 꿀벌이 한 마리 졸며 나는 듯 귓속은 태고의 울림으로 떨고 있었다. 앞으로 무슨 큰일이 날 것 같아, 무슨 큰일? 이 세상이 삥 벽을 만들고 운명의 우리 두 사람이 세상과 싸워야 하나? 서윤은 지금 어쩌고 있나. 시선을 밑에 두고 있기 때문에 혜기로서는 서윤의 움직임을 알 수가 없었다. --- p.200
혜기에게 선생님의 매력은 마법 병에서 나온 뭉게구름같이 커지고 또 커지고 또 커졌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사람 중의 특이한 어떤 인물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 느낌이었다. 이 사람을 잘못 소개해줬소, 이 사람하고 앞으로 무슨 큰일이 날 것 같아. 선생님의 말은 신의 음성처럼 의미심장했다. 어쩌면 나는 전기(傳記)에 오를 여인이 될지도 몰라. --- p.208
너를 끌어올려 주고 싶은데 그러다가 네가 상처받을까 봐 겁난다, 언젠가 혜기에게 선생님은 이렇게 아리송한 말을 했었다. 그게 무슨 뜻일까, 나를 어떻게 끌어올린다는 것인가, 끌어올리면 거기에 무엇이 있을까. 선생님이 던진 그 말의 구체적인 의미는 몰랐지만 그 말을 들을 때 혜기는 더없이 행복했었다. 부성적(父性的) 인 모습으로 선생님이 부각되고 자신이 섹시하고 사랑스러운 여자로 느껴졌었다. --- p.218
이번에는 혜기가 땀에 젖은 선생님을 안았다. 스팀이 소리를 내며 들어오고 성에가 낀 유리창이 햇볕에 반짝였다. 정말 괜찮아요, 이 세상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것 같은 부웅 뜨는 느낌 속에 한 발씩 성숙해갈 때마다 고독해질 자신의 미래를 혜기는 보았다. 선생님 안녕히, 혜기는 마음속으로 선생님에게 작별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