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를 낸 것은 제가 바로 수사학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수사학도이기 때문에 이교도 시인들의 작품을 많이 읽습니다. 저는 이교도의 작품이라 해도 기독교의 진리를 보여주고 있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렇게 믿습니다. 아무튼,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베난티오는 다른 서책 몇 권의 이름을 들먹거렸고, 호르헤 노수도사는 베난티오의 말에 몹시 화를 내었습니다.'
'어떤 서책의 이름이 등장하던가?'
베노는 머뭇거렸다.
'기억이 나지를 않습니다만, 이 일과 그 서책의 제목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 p.210
진정한 앎이란, 알아야 하는 것, 알 수 있는 것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니야, 알 수 있었던 것, 알아서는 안 되는 것까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190-
.....나도 이제 깨쳤는데, 그것은 죽음이라는 것이야.
<죽음은 나그네의 휴식... 모든 수고의 끝mors est quies vitoris.... finis est omnis laboris>....
-133-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 허나 내 가슴은 무엇인가를 감지하지. 가슴으로 말하고 얼굴에 묻되, 남의 혀에는 귀를 기울이지 말게
-125-
--- p.125
이것 보아라, 아드소. 내 너에게 뭐라고 하더냐? 우리 같은 운수 행각승은, 세상이 위대한 책을 통해 우리에게 펼쳐보이는 사물의 정황을 유심히 관찰한는 법이라고 하지 않더냐? 일찍이 알라누스 데 일술리스는 이렇게 노래하셨느니라.
옴니스 문디 크레아투라
구아시 리베르 에트 픽투라
노비스 에스트 인 스페쿨룸
--- p.49
세상에 이단 아닌 것 없고 정통 아닌 것 없다. 어느 한 세력이 주장하는 신앙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그 셰력이 약속하는 희망인 거이야. 모든 이단은 현실, 즉 소외의 가치와 같은 까닭에 있다. 이러한 이단자들을 긁어 보면 바닥에 잇는 문둥병 자국이 보일 것이다. 이단 전쟁은 오로지 문둥이는 문둥이로 소외시킬 것을 요구한다.
--- p.330
[윌리엄 수도사]
* 내 말은, 그들이 주장하는 교리와는 별개의 문제로, 이러한 이단 교파들이 무식한 사람들 계층에서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식한 사람들에게 다른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지요. 내 말은, 무식한 사람들은 카타르 파, 파타리아 파,심령파를 혼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장님, 무식한 사람들의 삶이란 현명한 사람들의 분별력이나 학식을 그리 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질병과 가난, 무지로 인한 눌언(訥言)과 더불어 삽니다. 그들 중 상당수의 사람들에겐 이단자들의 모임에 가담하는 것이, 그들의 절망을 외치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직자의 완벽한 삶을 요구하기 때문에 추기경의 사저에다 불을 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직자가 가르치는 지옥은 없다고 믿기 때문에 불을 지를 수도 있습니다. 이 땅에 이미 지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저질러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들의 목자가 아닙니다. (172쪽)
부끄러움을 모르는 돌이 광야를 구른다...매미가 땅 속에서 운다....점잖은 무화과...나는 희극에 대한 세빌레 사람 이시도레의 정의를 생각해보았어요. 희극이란, <스투프라 비르기눔 에트 아모레스 메레트리쿰>....<비참한 처녀와 사랑스러운 창부>...어쨌든 뭔가가 도치되고 역전된 이야기라고 했지요...<코메디(희극)>이란 말은 <카마이(시골 마을)>에서 나왔지요. 말하자면 희극이란 <카마이>에서 식사나 잔치 뒤에 벌어지는 흥겨운 여흥극인 게지요. 희극이란 유명한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비천하고 어리석으나 사악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깁니다. 희극은 보통 사람의 모자라는 면이나 악덕을 보여줌으로써 우스꽝스러운 효과를 연출해냅니다.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을, 교육적 가치가 있는, 선을 지향하는 힘으로 파악합니다. 거짓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실상이 아닌 것을 보여주고 있긴 하나, 희극은 기지가 번득이는 수수께끼와 예기치 못한 비유를 통해 그 실상을 다시 한번 검증하게 하고, 아하, 실상은 이러한 것인데 나는 모르고 있었구나, 하고 감탄하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실재보다 못한, 우리가 실재라고 믿던 것보다 열등한 인간과 세계를 그림으로써, 성인의 삶이 우리에게 보여준 서사시보다, 비극보다 열등한 것을 그림으로써 진리에 도달하는 것, 어떻습니까?(531쪽)
[아드소]
나는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감히 신학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필연적인 것이 가능성에만 매달려서야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과, 태고의 카오스는 무엇이 다릅니까? 하느님의 절대전능하심과, 선택에 관한 하느님의 절대 자유가 같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지 않습니까?
윌리엄 수도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며 대답했다.
* 네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식자가 어떻게 배운 것을 풀어먹겠느냐?
나는 그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반문했다.
*진리의 기준이 없으면 실행 가능한 학문도, 펼 수 있는 학문도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신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그럴 기회를 드리지 않아 아시는 바를 더 이상 펴실 수 없다는 말씀이신지요?
<<장미는 예로부터 그 이름으로 존재해 왔으나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영락한 이름뿐>>
--- p.
"놈들이 그러더군. 벤티벵가 일파가 … 고문에 못 이겼는지 …"
"동물의 의식을 일깨우는 데 기쁨보다 유효한 게 딱 하나 더 있지요. 바로 고통이랍니다. 고문을 당하면 몽환 약초를 먹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됩니다. 고문을 당하면, 어디서 들었던 것, 어디에서 읽었던 게 고스란히 머리에 떠오르지요. 흡사 천당이 아닌 지옥으로 실려 가고 있는 것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고문을 당하면, 조사관이 알고 싶어하는 것뿐 만이 아니라, 조사관을 기쁘게 할 만한 것까지 모조리 말하게 됩니다. 고문당하는 자와 고문하는 자 사이에 어떤 유대(이거야말로 악마적인 유대가 아니겠어요)가 생겨나기 때문이지요 …. 우베르티노, 나는 알아요. 하얗게 단 쇠붙이로 진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편에 서 본 적이 있어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알아 둬야 합니다. 자백을 강요하는 그 쇠붙이는 바로 강요당하는 자들의 불길에서 달구어졌다는 것을 …. 고문을 당하면서 벤티벵가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했는지도 몰라요. 왜냐? 말하고 있는 것은 벤티벵가가 아니라 벤티벵가의 열망, 즉 벤티뱅가의 영혼 안에 자리잡은 악마였을 테니까요."
--- pp.123-124
[윌리엄 수도사]
* 내 말은, 그들이 주장하는 교리와는 별개의 문제로, 이러한 이단 교파들이 무식한 사람들 계층에서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식한 사람들에게 다른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지요. 내 말은, 무식한 사람들은 카타르 파, 파타리아 파,심령파를 혼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장님, 무식한 사람들의 삶이란 현명한 사람들의 분별력이나 학식을 그리 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질병과 가난, 무지로 인한 눌언(訥言)과 더불어 삽니다. 그들 중 상당수의 사람들에겐 이단자들의 모임에 가담하는 것이, 그들의 절망을 외치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직자의 완벽한 삶을 요구하기 때문에 추기경의 사저에다 불을 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직자가 가르치는 지옥은 없다고 믿기 때문에 불을 지를 수도 있습니다. 이 땅에 이미 지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저질러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들의 목자가 아닙니다. (172쪽)
부끄러움을 모르는 돌이 광야를 구른다...매미가 땅 속에서 운다....점잖은 무화과...나는 희극에 대한 세빌레 사람 이시도레의 정의를 생각해보았어요. 희극이란, <스투프라 비르기눔 에트 아모레스 메레트리쿰>....<비참한 처녀와 사랑스러운 창부>...어쨌든 뭔가가 도치되고 역전된 이야기라고 했지요...<코메디(희극)>이란 말은 <카마이(시골 마을)>에서 나왔지요. 말하자면 희극이란 <카마이>에서 식사나 잔치 뒤에 벌어지는 흥겨운 여흥극인 게지요. 희극이란 유명한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비천하고 어리석으나 사악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깁니다. 희극은 보통 사람의 모자라는 면이나 악덕을 보여줌으로써 우스꽝스러운 효과를 연출해냅니다.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을, 교육적 가치가 있는, 선을 지향하는 힘으로 파악합니다. 거짓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실상이 아닌 것을 보여주고 있긴 하나, 희극은 기지가 번득이는 수수께끼와 예기치 못한 비유를 통해 그 실상을 다시 한번 검증하게 하고, 아하, 실상은 이러한 것인데 나는 모르고 있었구나, 하고 감탄하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실재보다 못한, 우리가 실재라고 믿던 것보다 열등한 인간과 세계를 그림으로써, 성인의 삶이 우리에게 보여준 서사시보다, 비극보다 열등한 것을 그림으로써 진리에 도달하는 것, 어떻습니까?(531쪽)
[아드소]
나는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감히 신학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필연적인 것이 가능성에만 매달려서야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과, 태고의 카오스는 무엇이 다릅니까? 하느님의 절대전능하심과, 선택에 관한 하느님의 절대 자유가 같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지 않습니까?
윌리엄 수도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며 대답했다.
* 네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식자가 어떻게 배운 것을 풀어먹겠느냐?
나는 그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반문했다.
*진리의 기준이 없으면 실행 가능한 학문도, 펼 수 있는 학문도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신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그럴 기회를 드리지 않아 아시는 바를 더 이상 펴실 수 없다는 말씀이신지요?
<<장미는 예로부터 그 이름으로 존재해 왔으나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영락한 이름뿐>>
--- p.
"놈들이 그러더군. 벤티벵가 일파가 … 고문에 못 이겼는지 …"
"동물의 의식을 일깨우는 데 기쁨보다 유효한 게 딱 하나 더 있지요. 바로 고통이랍니다. 고문을 당하면 몽환 약초를 먹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됩니다. 고문을 당하면, 어디서 들었던 것, 어디에서 읽었던 게 고스란히 머리에 떠오르지요. 흡사 천당이 아닌 지옥으로 실려 가고 있는 것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고문을 당하면, 조사관이 알고 싶어하는 것뿐 만이 아니라, 조사관을 기쁘게 할 만한 것까지 모조리 말하게 됩니다. 고문당하는 자와 고문하는 자 사이에 어떤 유대(이거야말로 악마적인 유대가 아니겠어요)가 생겨나기 때문이지요 …. 우베르티노, 나는 알아요. 하얗게 단 쇠붙이로 진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편에 서 본 적이 있어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알아 둬야 합니다. 자백을 강요하는 그 쇠붙이는 바로 강요당하는 자들의 불길에서 달구어졌다는 것을 …. 고문을 당하면서 벤티벵가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했는지도 몰라요. 왜냐? 말하고 있는 것은 벤티벵가가 아니라 벤티벵가의 열망, 즉 벤티뱅가의 영혼 안에 자리잡은 악마였을 테니까요."
--- pp.123-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