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장에는 예로부터 오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음식과 섞여도 제맛을 내니 이는 단심(丹心)이요, 오랫동안 변하지 않으니 이는 항심(恒心)이요, 기름지고 비린내를 제거하니 이는 불심(佛心)이요, 매운맛을 부드럽게 하니 이는 선심(善心)이요, 어떤 음식과도 조화를 이룬다 하여 이를 화심(和心)이라 하옵니다.”
김항주는 놀랐다. 그러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틈을 주지 않았다.
“네 앞에 놓인 종지에는 된장이 담겨 있다. 맛을 보거라.”
철도는 떨리는 손을 뻗어 두 번째 주발을 젖혀 그 안에 놓인 종지를 더듬었다. 작은 종지 안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니 손끝으로 겉은 굳었으나 안은 말랑한 촉감이 느껴졌다. 그는 된장 종지 안에 손가락을 넣어 손끝에 그것을 찍었다. 그리고 맛을 보았다.
“아!”
철도는 소스라치게 놀라 저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그의 눈앞에 번쩍이는 번갯불에 드러나는 찰나의 정경처럼, 그러나 무엇보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영상들이 펼쳐졌다. 일곱 살 때, 장독 대에서 일하던 어머니가 된장을 찍어 입에 넣어주던 일, 열다섯 살 때 집안 어른들의 결정으로 산속으로 입산 수련을 떠나게 된 그에게 된장을 담은 작은 항아리를 건네주던 어머니의 인자하면 서도 안타까운 얼굴, 산속에서 굶주림과 두려움과 싸우며 뜯은 산나물을 된장을 찍어 입에 넣던 일…… 바로 그날 산속까지 철 도를 추격해 온 이복동생 일도와 그의 모친에게 고용된 칼잡이 들과 만나 생사가 걸린 결투를 하던 일 등…….
--- 본문 중에서
철도는 생각했다. 우금령은 예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사대부가의 잔치 음식들을 만들어 오는 동안, 그 어느 집에서도 우금령을 두려워해 소를 잡지 말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우금령을 범해 처벌을 받았다는 상민은 있어도 양반이 처벌을 받았다는 말 또한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양반들은 소고기 먹는 것이 기록에 남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한 것이다. 때로는 직접 소를 잡고, 소고기를 이용해 수많은 음식을 만들면서 양반들의 내밀한 밥상을 관장해 온 철도마저도 몰랐던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소를 먹었다는 것이 기록되어, 대대손손 전해질지도 모르는 연회도를 그리는 화공들만은 철저히 단속하는 양반들의 교묘함에 소름이 돋았다.
--- 본문 중에서
행랑채 부엌에서 어린 여종이 기름장이 담긴 종지들만 가득 올라간 소반을 들고 나오고 있었다. 여종은 긴 마당을 가로질러 점점 다가오며 얼굴을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향이다. 일도는 자신의 옆으로 막 지나가는 어린 여종을 옆눈으로 바라보았다. 일도는 지난밤에 한 일을 상기했다. 기름장을 미리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지금 저 계집아이가 들고 가는 모든 기름장에는 독약이 들어 있다. 어렵게 구한 극약이었다. 쌀 한 톨 만한 크기로 멧돼지가 죽었다. 장정 네 명이 겨우 들어올린 거대한 멧돼지였다. 우심적은 틀림없이 임금의 앞에 가장 먼저 놓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심적을 가장 먼저 먹는 것도 임금일 것이다. 임금이 우심적을 기름장에 찍어 입에 넣는 순간, 모든 것은 끝이 날 것이다. 독이 든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비명을 지르기도 전 임금이 구혈에서 피를 뿜고 죽는 것이 눈앞에 그려졌다.
--- 본문 중에서
윤홍은 동빙고 안에 들어가 봉인된 우심적 항아리를 뜯어보았다. 그 안에는 우심이 아닌 봉령군의 수급이 들어 있었다. 주저앉은 윤홍은 가까스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누가, 왜…… 이런 짓을?’ 누군가가 자신의 거사를 역으로 이용하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윤홍은 이 땅의 기득권자들의 사악함과 순발력에 치가 떨렸다. 한 줌도 안 되는 자들,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은 오판이었다. ‘농자천하지대본’을 내세우는 농자의 나라 조선에서 무분별한 소의 도살은 백성의 기아와 가난의 근본적 병폐였다. 그중에서도 우심적은 사대부의 가장 부도덕한 모순을 드러내는 상징적 음식이었기에, 잔칫집을 돌며 우심적을 먹는 몇 명만 독살해 경종을 울리면 사태가 해결될 것으로 믿었던 자신이 순진했고 우매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