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오래도록 감정을 내보이지 않고 살았다.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대체로 견딜 만했고 쉽게 잊었다. 그녀는 자신이 감정을 통제한다고 믿었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불가능해진 지금,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이전의 삶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 p.10
”환한 낮에는 모든 게 쉽게 드러나고, 사람들은 드러난 것들에 대해 떠드는 걸 좋아하니까. 시야가 좁아지는 한밤에야 사람들의 무시무시한 호기심도 비로소 잠이 드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두운 쪽을 골라 디디며 공원을 한 바퀴 더 돈 다음 공원 입구 쓰레기통 앞에 멈춰 선다. 그런 뒤엔 반듯하게 접은 편지를 꺼내고 그것을 찢어 버린다. 거기 담긴 자신의 감정을 폐기하겠다는 듯이. 두 번 다시 그런 감정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듯이.“
--- p.11
”남들과 선을 긋는 말들. 다른 사람들을 멀리 내모는 말들. 결국 자신의 올바름과 정의로움을 도드라지게 하는 말들, 그러나 그녀에게 그 모든 말들은 차이가 없다. 사람들의 말은 그녀가 지나온 시간들을 상기키시니까. 여전히 모든 게 조금도 잊혀지지 않았다는 증거니까. 언제까지나 이런 식으로 끈질기게 자신의 이름이 회자될 거라는 경고니까. 그건 그녀의 자격지심이고 피해 의식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는 휘말리고 싶지 않다. 그게 무엇이든, 어떤 일이든, 더는 연루되고 싶지 않다.“
--- p.15
“그녀는 거기까지 생각하다 펜을 들어 아무거나 쓰기 시작한다. 새하얀 편지지 위에 동그랗고 길고 뾰족한 무늬가 어지럽게 생겨난다. 어쨌든 읽을 수 있는 글자는 아니다. 그녀는 태주에게 말을 전할 자신이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지런하게 나아가는 이런 반듯한 형식으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 p.28
“그녀는 환하고 넓은 길과 어둡고 좁은 길 사이에 위치한 자신의 집을 돌아본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못한 상태로 상반된 두 세계의 경계가 된 집. 그녀는 정처없이 떠오르는 기억을 따라 걷는다. 그러면서 어떤 기억을, 어떤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지난날의 자신을 상기한다.”
--- p.34
“그녀의 눈에도 순무의 상태는 좋지 않아 보인다. 그녀는 한 손으로 해를 가린 채 다른 한 손을 흔들어 본다. 순무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본다. 환한 햇살 속에서 그녀와 순무의 눈이 마주친다.”
--- p.46
“어느 순간, 그녀는 자신과 그 작은 생명체 사이에 어떤 가느다란 유대감이 생겼났음을 알아차렸다. 인간과 동물. 언어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이. 다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정도로, 아주 최소한의 행위만 허락된 관계. 서로에게 완벽하게 무지하다는 난관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진심이 순무에게 전해졌음을 느꼈다. 아니, 그것은 이상한 확신이고 터무니없는 바람일지도 모른다.”
--- p.88
“동정, 연민, 연약하고 가여운 동물에게 느끼는 흔해 빠진 감정.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자신이 인타까워하는 것이 순무를 사로잡은 고통인지, 그런 고통에 노출된 삶인지, 고통을 견뎌 온 지금까지의 시간인지, 얼마가 될지 모르는 앞으로의 시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것이 순무에 대한 것인지, 자신에 대한 것인지, 그 둘이 뒤섞인 것인지도.”
--- p.109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선택일 수 있고, 때로는 뭔가를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말을 그녀는 삼킨다. 그런 이유로 그녀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니니까. 이것은 결정이라기보다는 보류에 가까운 선택이니까.”
--- p.155
“오전에 보는 순무는 나른하고, 오후에 보는 순무는 기진맥진하며, 밤에 보는 순무는 약간의 생기가 있다. 새벽은 그녀가 짐작하기 어려운 시간이다. 순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새벽을 보내는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 p.157
“그녀는 거기까지 쓰고, 끝까지 쓰기 위해 몇 개의 단어를 고쳐본다. 내부적으로라는 말을 은밀하게로 바꾸고 비밀스럽게라는 단어를 추가한다. 준비라는 단어를 모의, 작당, 공모, 같은 단어로 바꿔보기도 한다. 무표정에 가까웠던 편지에 어떤 표정이라 할 만한 것이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그녀가 단 한 번도 내보이지 못했던 감정들. 부적절한 마음들. 드러내는 즉시 보복으로 돌아올 단어들. 그러므로 이것은 다시금 보낼 수 없는 편지가 되어버린다.”
--- p.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