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이야기와 내가 쓴 자작시들을 부끄럽지만 한데 묶어서 세상에 내놓는다. 내 삶의 길목 길목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이겨낼 힘을 얻기 위해 쓴 시들이었기에, 내 삶에서 그 시들을 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듯했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청춘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품속에 고이 간직해둔 꿈들을 꺼내들라고. 나이가 조금 많은 청춘, 아직도 꿈이 많은 청춘, 나 김영환이 돌아보니, 지난날의 꿈이야말로 내 앞에 길이 되어주었다고. 그렇다면 지금 찾고 있는 길 또한 지난날의 꿈속에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내 삶의 이야기를 통해 말해주고 싶었다.
지난 일이 온통
아픔이 되는 때가 있다
지난날이 온통
슬픔이 되는 때가 있다
바람
부는 대로,
꽃잎
지는 대로,
흘러간 날들이
온몸으로
어둠을 밀어가는 때가 있다
밤이 진다
꽃잎 진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내가 대학에서 제적되고 노동 현장에서 일할 때였다. 나는 급히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로 달려갔다. 당시 아버지의 체중은 40킬로그램도 나가지 않아서 앙상한 다리에는 얇고 부드러운 가죽만이 뼈를 뒤덮고 있을 뿐이었다. 하루에 심장마비가 다섯 번이나 찾아오는 동안 아버지의 입술은 포도 껍질처럼 말라버렸다. 병원에서도 가망이 없다고 했다. 집으로 모셔온 날, 아우가 급히 청계천에서 공업용 산소통을 사오고, 나는 치과대학을 5년 다닌 실력이랍시고 노란 기저귀 고무줄을 사다가 아버지의 코에 밀어 넣었다. 아버지는 그해 겨울을 그렇게 넘기셨다.
부당해고에 항의하여 벌인 첫날의 출근투쟁은 회사에 끌려가 몇 시간 동안 집단 폭행을 당한 것으로 결말을 보고 말았다. 그날 그 자리에는 부천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입회해 있었지만, 그들은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을 말리기는커녕 우리를 유치장에 처넣어버렸다. 나중에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인 권인숙 씨가 수사를 받았던 바로 그곳이다. 결혼한 지 하루 만에 아내는 나와 동료들을 위해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달려왔다.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숙인 나를 향해 따뜻하게 말을 건넸다. 마치 남편이 월급봉투를 들고 퇴근했을 때처럼 상냥한 목소리였다.
“형, 수고하셨어요.”(그때, 아내는 나를 형이라 불렀다.)
나는 아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이런 나를 보다 못해 동료들이 아내에게 농담을 던졌다.
“행수님요, 신혼여행을 유치장으로 오는 사람이 어데 있습니꺼?”
아내가 미소를 지으며 창살 사이로 내 손을 잡아주었다.
박정희 정권에서 입학했다가 제적당하고, 전두환 정권에서 다시 제적당하고, 노태우 정권에서 복학한 뒤 졸업하고, 김영삼 정권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김대중 정권 때 정치에 입문하며 병원 문을 닫았다. 늦깎이 치과의사로서의 삶조차 이리도 파란만장했다.
나는 가끔 함께 입학한 친구들보다 10여 년 늦게 의사가 된 일을 돌이켜보곤 한다. 어찌 보면 엄청난 인생의 손실이고 고통이었으나, 긴 인생을 돌아볼 때는 그리 쉽게 단정할 일이 아니었다. 요즘 대학 입학이나 취업 과정에서 1~2년 또는 그 이상 뒤처지는 것을 두고 크게 낙담하는 청춘들을 볼 때면, 나의 늦깎이 졸업에 대해 말해주고 싶다. 인생은 길게 봐야 한다. 인생은 수많은 우여곡절과 전화위복이 있고, 반전이 있는 한 편의 드라마다. 눈앞에 보이는 성과나 좌절에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한다. 인생은 길고, 우리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기간 또한 필요할 때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나이 든 ‘노땅’이라고 여기겠지만, 나는 아직도 설레며 기다린다. 내 인생에 남은 앞으로의 수많은 반전을.
안정된 삶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다시 가진 것 하나 없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안정과 평안한 인생은 애초부터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내게 주어진 ‘의무’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안정된 삶을 살아야 할 ‘이유’보다, 치열하게 살아가야 할 ‘의무’만 바라보기로 결심했다. 그게 나라는 사람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문익환 목사님을 떠올리며 말했다.
“저는 반드시 천국 가야 하겠습니다. 문익환 목사님께서 제가 만든 틀니 끼고 세상 떠나셨는데, 제가 천국에 못 가면 그 틀니 누가 수선하겠습니까?”
나는 정말로 착하게 살아야 할 운명인가 보다.
신(神)은 결국 디테일에 있다고 했던가! 이제야 감동의 정치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일들이 세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나 또한 학교라고는 문 앞에도 못 가본 무학의 중국집 주방장의 아들로 태어나 자랐고, 노점상에서 메리야스, ‘사리마다’(속옷 따위를 이르는 일본어)를 팔던 어머니 덕으로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참 소중한 중국집이고 고마운 포목상이고 노점이 아닌가! 골목이 보이고, 골목의 아우성이 들리고, 골목에서 자란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작은 것이 소중하다. 예전에는 다들 대기업만 중요한 줄 알았지만, ‘중소기업 살리기’와 ‘골목상권 살리기’가 중요하다. 젊은 날 ‘정치 민주화’를 위해 살아왔던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경제 민주화’다.
나는 경합을 벌였던 젊은 친구들과 다 빈치 이야기를 나누며 물었다. “스티브 잡스라고 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해서, 이 오디션을 통과할 수 있었을까요?”그 물음에 미소 짓는 청춘들. 내 앞에는 경쟁에서 이기고 진 문제를 떠나, 지난 시간의 노력과 결실 앞에서 후련하고 뿌듯한 표정의 아름다운 청춘들이 있었다. 살짝, 부럽고 질투마저 일었다. 그들이 진정 아름다웠던 탓이었다. 나는 꼰대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말했다.
“오늘의 마에스트로가 인생의 마에스트로가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빛나지 못했지만, 미래의 잡스와 다 빈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경합에서 이기지 못한 사람은 절치부심할 것이고, 마에스트로로 선정된 사람은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기본으로 돌아가 인문학을 공부하고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십시오. 도전하고, 창조하고, 자신의 역사를 쓰십시오. 그렇게 겸허히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감사하게도 나는 3선 국회의원, 과학기술부 장관, 국회 지식경제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며 한국 사회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요즘 세태를 보면 정치판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환멸을 느끼는 사람이 늘어나는 듯하다. 먹고살기 바빠 무관심한 사람도 있고 분노하는 사람도 있다. 나 역시 내 가정의 앞날을 걱정하고 우리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깊이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다. 서로 방식이 다를 뿐, 아끼고 걱정하는 마음은 모두가 같을 것이다. 한 사람의 가장이자 정치인으로서 그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노력하고 있음을, 아끼고 있음을,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기 위해 발로 뛰고 있음을.
(/ '에필로그' 중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