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에 대한 태도는 곧 세상에 대한 태도다. 집 안의 사물들을 천천히 다시 보고 만져보고 사용하면서 그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때, 그들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때, 비천한 공간이라도 행복한 공간일 수 있고, 낡고 조잡한 상품이라도 더없이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닐까.
--- p.19, 「프롤로그-언제든 갈 수 있지만, 아직 제대로 가본 적 없는 그곳」 중에서
현관은 공항을 닮았다. 현관과 공항의 물리적 크기는 전혀 닮지 않았지만, 머뭇거릴 수 있는 곳, 한 번 더 숙고해볼 수 있는 곳, 엉거주춤 서 있을 수 있는 곳, 떠나는 누군가를 잡을 수 있는 곳, 떠나보내기 싫어하는 누군가에게 잡힐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현관과 공항의 심리적 크기는 닮았다. 가장 짧게 머무는 곳이지만 가장 긴 여운을 남기는 현관은 우리의 작은 공항이다. 여행에서 힘겹게 돌아온 당신을 껴안고, 야근으로 지친 당신을 다독이고, 취해 비틀거리는 당신을 부축하는 곳.
--- p.37, 「현관-나와 당신의 작은 공항」 중에서
취향은 기호와 소비의 목록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당신과 나누고,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내가 배우는 일의 목록이다.
--- p.48, 「거실-타인의 취향」 중에서
이 반 평의 공간에서 우리는 몽상하고 욕망하고 휴식하고 잠들고 꿈꾸고 깨어난다. 슬플 때, 아플 때, 피곤할 때 우리는 이 작은 공간에 몸을 누인다. 이곳에서 때론 절망하고 자주 슬퍼하고 종종 사랑한다. 그리고 대개 우리는 침대에서 태어나고, 마지막 호흡을 멈춘다. 사람이 살면서 조금은 겸손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침대의 공간 크기 때문이 아닐까.
--- p.85, 「침대-우리, 반 평의 공간」 중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슬픔을 위로하고 상처를 보듬는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공간. 온전히 혼자서 그 상처와 슬픔 앞에 마주 서는 공간. 가만히 앉아 있거나 광란의 퍼포먼스를 감행하며 자신의 상처와 슬픔 아래 남몰래 밑줄 긋는 공간. 화장실은 그런 곳이다. 생리적인 욕구desire를 처리하는 장소를 넘어 심리적인 요구needs를 처리하는 곳이다.
--- p.114, 「화장실-당신만큼 낮아지는 곳」 중에서
‘미니멀 라이프’가 우리의 생활을 더욱 심플하게 만들지만, 혹시 우리는 덜 쓰고 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마음껏 소비하고, 또 처분하고 있는 게 아닐까. 미니멀한 방식으로 맥시멀하게 채우면서 간직해야 할 기억과 추억과 감정마저 미니멀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슬픔도 기쁨도 윤리도 공감도 모두 미니멀한 상태로 살고 싶은 건 아닌지.
--- p.140, 「창고-순수 박물관」 중에서
종이책은 단지 어떤 내용만을 담는 사물로 여겨지지 않았다. 책은 그 자체로 자신을 표현하는 정직한 사물 같았다. 마치 산과 나무와 들꽃이 다른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물이 아닌 것처럼, 종이책은 그 자체에 향기와 표정과 풍경이 담긴 사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p.154, 「서재-쓸쓸하고 매혹적인 폐허」 중에서
어떤 장소에 있든,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보는지에 따라 거울은 미처 보지 못한 ‘다른 얼굴’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때론 화장실이나 화장대 거울 앞에서 화장이나 면도를 하지 않을 때, 달리 말하면 거울 앞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볼 때, 거울은 새로운 거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때 내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 된다.
--- p.171, 「거울-최초의 자화상」 중에서
감정은 공감이 있어야 존재한다. 이 두 가지는 마주 보는 시소의 양 끝처럼 한쪽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공감할 수 없으면 어떤 것도 감정을 가질 수 없고, 공감할 수 있으면 모든 것에 감정을 가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공감 능력이 확대된다면 감정을 가진 존재는 더 늘어날 수 있다. 다시 질문을 던지자. 사물에게 감정이 없을까?
--- p.187, 「냉장고-냉장고를 안은 밤」 중에서
이런저런 감정들이 내 안에 너무 많이 쌓였을 때, 그리고 그것들을 뱉어내고 싶을 때 베란다에 나가 서 있곤 했다. 어린 날처럼 베란다에서 소리쳐 노래 부를 수는 없지만, 이곳에서 지는 해가 천천히 세상을 물들이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다 보면, 나를 무겁게 만든 것이 조금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내게 지는 해를 보는 일은 무엇인가 채워가는 일이라기보다 비워가는 일이었다.
--- p.196, 「발코니-체념과 슬픔이 우리에게 주는 것」 중에서
마음껏 공상하고 싶을 때는 구석에 놓인 의자로, 당신의 냄새가 그리울 때는 작은 침대로, 누군가의 숨겨진 이야기가 궁금할 때는 조명이 만들어낸 빛과 그림자 속으로, 용기 있는 체념과 포기가 필요한 날에는 발코니로, 잘 구워진 위안의 냄새를 맡고 싶을 날엔 주방으로. 우리의 거주지는 그렇게 특별한 것 없는 생활이 차곡차곡 쌓여서 관계를 만들어낸 소중한 삶의 풍경이다. 그 풍경으로 우리는 매일 떠나고 매일 도착한다.
--- p.217, 「에필로그-매일 떠나는 여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