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책을 읽고 나의 머릿속에 곧 떠오른 것은 사투리가 강하셨던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하시던 세 가지 말이었다. “어쩔 수 없지 뭐.” “어떻게 되겠지 뭐.” “별 일 아니다.”
늘 끙끙대며 후회하거나 운명을 탓하지 않고, 부지런하게 오늘을 살다 보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온다. 남과 비교하거나 부러워하지 않고, 지위와 부귀에 관계없이 자기 나름으로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이 칭찬받을 사람이다. 어머니가 42세에 남편과 사별하고 다섯 아이들을 키우느라 빈궁한 생활에 허덕이면서도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고 담담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준 것은 이 세 가지 말이었을 것이다.(32쪽)
마쓰이는 “어릴 때 부모가 그림책을 읽어주지 않았던 사람은 그림책을 읽은 것이 아니다”고 잘라 말한다. 그림과 언어를 아이가 혼자서 페이지를 넘기면서 더듬어 가는 것만으로는 마음속에 강한 감동을 받아 기억에 새겨지는 체험이 되지 않는다. 부모가 이야기의 전개에 맞게 감정을 실은 목소리로 읽으면서, 때로는 말이 막혀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가 때로는 으스스한 분위기를 만들었다가 때로는 웃기도 한다. 그 입체적인 느낌과 시간의 흐름이 아이들을 그림책의 세계에 끌어들이고, 감성과 이야기를 맛보는 힘을 기른다.(63쪽)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유리구슬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어릴 때 그것은 조가비였거나 조약돌이었거나 단추였다. 어른이 되면 기념할 무엇이거나 특정한 취미거나 사람에 따라서는 일이거나 연구거나 한다. 그런 것들이 마음을 채색해 주고, 마음의 지주가 되고, 살아가는 보람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것은 금전적인 평가나 세상의 굴레와는 무관한, 어린 날의 유리구슬이 아닐까.(93쪽)
“그림책은 인생에 세 번”
‘인생에 세 번’이란 먼저 자신이 아이였을 때, 다음에는 아이를 기를 때, 그리고 세 번째는 인생 후반이 되고 나서, 라는 의미다. 세 번째로 그림책을 들 때는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읽는다는 점에 최대 포인트가 있다. 물론 ‘인생에 세 번’이란 일반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사람에 따라서는 아이 때 가난하여 그림책을 구하지 못했거나, 결혼하지 않아서 ‘두 번째’ 읽어주기를 하지 않는 등, 사정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요는 생애를 통해 그림책을 손에서 떼지 말라는 의미다.(165쪽)
사별체험을 다룬 작품이 잇달아 출판되는 것은 역시 시대의 요구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여, 즐거운 꿈을 부풀려라…… 이런 말만 하고 있기에는 지금의 시대는 몹시 가혹하다. 슬픈 일이 너무도 많다. 지진으로 인한 죽음, 수해로 인한 죽음, 사고사, 암으로 인한 병사……. 그런 괴롭고 슬픈 체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후를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른에게나 아이에게나 중요한 문제다. 아이에게 죽음을 이야기해 봐야 모를 테니 가만히 놔두는 편이 좋다는 것은 아이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중요함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 어른의 제멋대로의 생각이며 상상력의 결여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아이를 잃은 부모 모임의 사람들이나 어린이 카운슬링을 하고 있는 카운슬러 등의 이야기를 꼼꼼히 듣는다면, 엄중한 현실을 조금은 알게 될 것이다.(176쪽)
인간 세상은 참으로 불행하게도, 아이 때 자유롭게 발달한 상상력과 판타지를 그리는 힘이 고등학교, 대학교로 진학하면서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익힘에 따라 오그라들고, 직장에 취직하면 거의 으깨어지고 마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인생으로 되어 있다. 진정한 인간적 성숙이란 아이 때의 순수한 감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회적으로 자신의 전문 업무를 수행하고, 어른으로서 타인과의 교제 방법도 터득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현실은 별로 그렇지가 않다. 직업인이 되어 아이와 같은 천진함과 순수함을 보이면 “언제나 아이처럼 군다”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이 얼마나 쓸쓸한 인생인가.(192쪽)
돈과 물질에 제1의 가치를 두는 사람들에게 시인은 단지 말장난을 하는 쓸모없는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폐쇄적이 되고 사람들의 마음이 회색으로 물들었을 때, 창문을 열어 빛을 쏘이고 세계에 색채를 되찾아 주며 살아가는 에너지를 솟아나게 하는, 그런 언어를 울리는 사람은 시인이다. 권력의 억압에 사람들이 질식했을 때 흔히 시인이 혁명의 기수로 떠받들어지는 것은 상징적이다.
마음의 위기, 언어의 위기가 이 나라 사람들 위에 덮치고 있는 지금, 그림책 또한 시에 뒤지지 않는, 마음의 재생 역할을 할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207쪽)
이런 그림책을 읽고 자신이 어렸을 때의 노스탤지어에 잠기는 것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스탤지어는 때로는 창조적인 표현 활동이나 마음을 부풀리는 삶의 에너지 창고를 자극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힘겨운 사회생활 속에서 메말라 버린 마음에 물기를 되찾아 주는 것이다. 곁에 그림책을 두고 그림책에 나타난 멋진 상상력과 즐거운 판타지를 날마다 그저 10분씩이라도 맛본다면 마음 어딘가에서 변화가 생길 것이다. 뭔가가 변할 것이다.(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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