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 같은 것들은 지난 몇 년 사이에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자주 목격되었다. 얇거나 두껍거나 쭈글쭈글한 것들, 제대로 된 몸을 갖추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몸을 버리지도 못하는 딜레마 속에서 나름의 자세를 취하고 경로를 모색하는 사물들이 우글거렸다. 관람자는 그 배치를 이미지들의 모험이 상연되는 일종의 연극처럼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미지들은 전통적 분류 체계를 고수하기 어려운 오늘날의 물질적 조건에서 새로운 연합을 구성하려 애쓴다. 그러나 우리는 외부적 관찰자의 위치에서 한가롭게 그 분투를 구경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 이미지들이 우리의 닮은꼴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껍질은 한쪽에서 보면 이미지의 몸이지만 다른 한쪽에서 보면 몸의 이미지다. 그것은 자족적이지도, 자립적이지도 않은 몸의 불완전함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껍질은 몸의 잔상이 사물화된 것으로서 또 다른 몸을 주조하는 거푸집이 될 수 있고, 이를 통해 과거와 미래, 여기와 저기의 몸들을 분절하고 연계하는 매개체로 작동할 수 있다. 만약 껍질을 하찮은 부산물이 아니라 변성을 수반하는 운송 수단으로 보고 그에 탑승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예기치 못한 곳으로 데려다줄지도 모른다.
--- p.16 ~17
우리는 통제에 실패하는 주체이자 통제를 회피하는 대상이다. 지구 전체를 조망하는 광범위한 데이터 시각화의 평면에서 우리 같은 개체들은 인간과 비인간을 불문하고 한 무더기의 입자들로 표시된다. 거시적 관점에서 우리는 미세먼지처럼 관측되고 바이러스처럼 억제되고 플라스틱 쓰레기처럼 규제를 벗어난다. 우리는 너무 많이 알려진 동시에 일일이 알 필요가 없는 것으로서 앎의 공백을 내포한 데이터의 껍질이 된다. 정말로 우리는 어떻게 재현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는 우리가 과연 재현될 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불안이 은밀하게 깔려 있다. 이러한 재현의 위기가 발생하는 까닭은 세계가 더 이상 인간이 귀속되는 장소이자 인간의 성취를 보여주는 활동의 무대로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가 인간의 존재를 의미 있게 하는 배경에 머물지 않고 나를 둘러싼 것들과의 관계와 경계가 불분명해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알 수 없는 대상이 된다. 우리가 무엇이고 무엇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영역 전체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 같은 인식의 구멍은 어떤 맥락도 필요하지 않은 자명하고 잘 보이는 이미지들로 메워진다. 그것은 인간 형상이든 아니든 간에 우리를 대신해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재현보다 대체물에 가깝다.
--- p.76
노년의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최후의 심판〉을 제작하면서 천상의 바르톨로메오가 든 육신의 텅 빈 껍질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고 전해진다. 일그러진 표정의 껍질은 폭력적인 분리가 수행되고 각인되는 장소로서 예술가의 초상이 된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자에게 남는 것은 축 늘어진 껍질밖에 없다. 〈동굴〉은 이 껍질들이 뭉쳐지면서 말 그대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보여준다. 이빨 사이에는 조그만 인간들이 끼어 있고, 피부는 녹아내리는 이미지로 뒤덮였으며, 눈과 코가 있어야 할 자리는 주저앉아 시커먼 동굴이 되었다. 이렇게 훼손되고 훼손하는 몸은 정말로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것은 뭔가 나쁜 것에 홀렸나, 아니면 원래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인가? 일그러진 이미지, 얄팍한 살, 복구 불가능한 구멍으로 이루어진 손상된 몸들은 달콤한 과자의 집, 한없이 늘어날 수 있는 위장, 부서지지 않는 이빨을 꿈꾼다. 또한 그것들은 회화와 조각을 꿈꾼다. 더할 나위 없는 시각성의 몸체가 되어 온전히 자기만의 시공간을 확보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특별한 사물들만 오를 수 있는 천국이 있어서 그곳에서 평온하게 세계를 관조하는 일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도 있다. 미술은 또 다른 과자의 집이 아닐까? 불완전한 몸들은 허기에 사로잡힌 채 생각에 잠겨 있다.
--- p.127~128
극 중에서 씨앗을 찾는 사람들이 허술한 방호복으로 무장하고 해변을 뒤지는 동안, 해양 쓰레기를 겹겹이 뒤집어쓴 정체불명의 방문자는 황폐한 풍경을 떠돌며 어긋난 시간과 장소를 비춘다. 씨앗을 추적하는 몸짓과 씨앗을 연기하는 몸짓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물결에 휩쓸리고 땅에 파묻힌 사물들, 어떤 경로로 거기까지 왔는지 알 수 없는 물건들을 발굴하여 조심스럽게 자기를 겹쳐 본다. 비가시적 내부를 구획하는 씨앗의 폐곡면은 각자의 시점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암시하며 눈에 보이는 세계를 대하는 다른 관점들을 이끌어낸다. 결국 씨앗은 과거의 잔해 속에서 결정화된 미래의 입구다. 각각의 궤적 속에서 저마다의 기억과 가능성을 숨기고 있는 모든 사물과 사람과 장소가 씨앗의 형상과 연합될 수 있다. 하지만 씨앗은 또한 인간과 비인간,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하의 입구다. 씨앗을 따르는 사람들은 반복해서 꽃과 열매 사이, 줄기와 뿌리 사이, 식물이 자라거나 자라지 못하는 땅에 눕는다. 웅크린 몸들이 잠들었는지, 죽었는지, 아니면 외부 활동을 멈추고 내부를 재구축하는지 겉보기로는 알 수 없다. 씨앗의 소문은 무엇이 씨앗이고 그것이 자라 무엇이 될지 모른다는 불확정성을 전파하면서 그에 연루된 것들을 조용히 진동시킨다.
--- p.194 ~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