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구석기는 함경북도 동관리 유적에서 발견되어 그 존재를 나오라 노부오[直良信夫]가 주장한 적이 있지만, 재인식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였다. 1960년대에는 함경북도 굴포리 서포항(굴포리문화 Ⅰ·Ⅱ기), 평양시 흑우리(검은모루), 충청남도 석장리, 1970년대에는 경기도 전곡리, 평양시 만달리, 1980년대에는 충청북도 수양개, 금굴, 강원도 심곡리 등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현재 전기·후기 구석기 유적이 전국적으로 20개 이상 알려져 있다. 한반도 북부의 흑우리동굴이나 점말동굴에서는 홍적세의 동물화석이 출토되는데, 홍적세 말기(15만~1만 년 전)에 중국 대륙에서 대마도 해협을 통하여 황토동물군(黃土動物群, 헤미온말·큰뿔사슴·들소 등)이 일본열도를 북상하였다. 일본에서는 10만 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주구점(周口店) 석기군과 관련 있는 유적도 발굴되고 있다. 1984년에는 요동반도의 끝 부분에 위치한 금우산(金牛山) 동굴에서 28만 년 이전으로 추정되는 화석인골·동물화석이 발견되었으며, 멀지 않은 한반도에서도 양호한 인류화석과 동물화석이 발견되었다. 또한 전곡리 유적 등 임진강 유역에 전기 구석기 유적이 존재하여 앞으로 남북 연구자의 공동조사·연구에 기대를 건다. --- 「고구려 이전의 동북아시아」중에서
통구성은 집안평야의 서쪽, 통구하의 동안에 있으며, 남쪽에는 압록강이 흐른다. 1902년에 집안현이 설치된 이래 현성으로 이용되었으며, 때대로 수축하였다. 1905년에 이곳을 방문한 도리이 류조[鳥居龍?]는 “성벽의 높이는 현재 1장 또는 1장 2~3척이지만 과거에는 이보다 높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1913년에 조사한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동서 양문이 옹성을 이루었으며, 주위를 물을 채우지 않은 호를 돌렸다는 사실 등을 확인하였다. 1921년과 1931년에는 성벽과 성문 등을 상당히 많이 고치거나 보수하였다. 현재는 성안에서 성 밖까지 시가지가 확장되어 북벽과 서벽 등으 제외하면 상당히 파괴되었다. 근년의 실측에 따르면 북벽 715.2m, 동벽 554.7m, 남벽 751.5m, 서벽 664.6m로 거의 방형이며, 총길이는 2686m이다. 잘 남아 있는 곳을 보면 기저부의 폭 7~10m, 높이 4m 정도이다. 이 현성을 집안현 문물보관소가 1975년부터 1977년까지 10곳에 대한 단면조사를 실시했는데, 북벽에서 한 곳(T8), 남벽에서 두 곳(T4, T5) 석축 성벽의 하층에 판축한 것으로 보이는 토층이 확인되었다. 단면의 폭은 7~8m, 높이는 1.7~2m이며 활 모양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곳에 원래 토성이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트렌치에서는 검출되지 않아서 동벽과 서벽은 미확인 상태이지만 현성과 같은 규모의 토성이 있었다고 생각해도 좋을 듯하다. 토층에서는 석부·석도·환상 석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전국 시대에서 한 대에 걸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토성은 분명히 한 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한의 토성 자리로서 문제가 없다. 조사한 염의지(閻毅之), 임지덕(林至德)은 현도군 고구려 현성일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앞으로의 연구를 기대하였다. 한편 서개마현 혹은 불이9불내)현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으나 이 책에서는 고구려현설을 취하고자 한다. 고구려의 발상지에 있는 큰 규모의 토성으로서 고구려현이라는 이름이 어울린다. 또한 토층 위의 석축은 트렌치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3단계에 걸쳐 조성된 곳이 있다. 각층에서 출토된 유물로 볼 때 위의 두 층은 집안현 성립 이후에 보수된 것이며, 최하층은 고구려 시대에 축조된 것이다. 현재 지표면에는 장소에 따라서 그중 어떤 층은 노출되어 있다. 특히 북쪽의 성벽은 고구려의 축조면을 잘 알 수 있다. --- 「전기와 중기의 왕도」중에서
정찬영은 강상·누상형 분묘에서 고구려 적석총의 기원을 찾고,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 전후에 무기단적석총이 성립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다무라[田村]는 “고구려 초기의 적석총의 원류는 기원전 3세기경의 요동지구, 그것도 압록강에 가까운 지역의 청동기를 부장한 적석총이며, 그곳에서는 이미 방형 사다리꼴의 적석총도 확인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적석총은 기원 전후 시기에 압록강 유역 일대에서 발달하였다. 이제 적석총이 성립된 역사적 환경을 살펴보자. 청동기 시대의 중국 동북지방에 적석총이 분포한다. 그 상한 시기는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하한 시기는 강상묘·누상묘 등 적석총의 상한 시기에 접근한다. 청동기 시대의 적석총은 산의 능선, 구릉 위, 해안부에 위치하며 산돌이나 강돌로 쌓는데, 분포의 중심은 요동반도이다. 또한 요동의 적석총은 화장이 원칙이며, 일정한 묘역을 가지지만 부정형이다. 부장품이나 묘실의 규모로 보아 계층 차이가 있다. 요동반도의 적석총은 집단묘(공동묘지)이며, 가족을 단위로 한 촌락 규모의 집단이 조영한 공동묘지라고 할 수 있다. 연무리 2호분은 초기의 적석총으로 기원 전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분구에 한 사람만 묻었다[單葬]. 강상묘에서 누상묘로 변천하는 과정에서 분구와 묘역이 기획되고, 무덤 주변에 열석(列石)을 배치하게 된다. 고구려 적석총과 많이 유사하지만, 이 무덤들은 어디까지나 한 분구 내에 여러 사람을 묻는[多葬] 집단묘지이다.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 전후한 시기에 이 묘제를 수용하여 고구려 적석총이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적석총은 고구려 특유의 묘제로 발전했으며, 동북아시아의 여러 지역과 여러 민족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게 된다.
--- 「적석총의 성립과 발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