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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들고 올라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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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들고 올라가기

: 슬픈 몸치의 운동 격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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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8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260쪽 | 328g | 122*188*20mm
ISBN13 9788960499614
ISBN10 8960499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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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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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계약직에서 일반정규직으로 패턴이 바뀌고 나니, 오늘을 망쳐도 내일 다시 출근할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 매일 같은 시간에 사무실에 도착해 매일 똑같은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것도, 출퇴근을 하며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시나브로, 내 생활은 규칙적으로 엉망이 되었다.
--- 「건강검진」 중에서

눈에 보이는 몸의 변화는 내 마음도 바꾸어놓았다. 그때 나는 혼자 파놓은 구덩이로 들어가던 중이었다. 아이를 돌보는 건 시간이 지나도 늘 어려웠고, 내 자신이 자꾸만 쓸모없게 느껴졌다.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계속 앞으로 나가는 동안, 집에서 아이만 보고 있는 나는 뒷걸음질만 치는 것 같았다. 아이를 재우고 조용한 집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나 같은 거 하나 사라져도 누가 알까 싶었다. 그런데 암장에 다니고, 벽에 몸이 붙기 시작하니까 몰랐던 감정들이 보였다. 떨어지기 싫었다. 그래서 악착같이 버티고 붙잡았다. 처음엔 전혀 안 되던 동작이 어느 날부터 되기 시작했다. 다시 성장기 청소년이 된 것 같았다. 나도 다시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생겼다.
모든 힘을 다 써버린 거 같았을 때, 더는 못 하겠다고, 너무 힘들어서 여기까지만 하겠다고 하면 싸부가 꼭 이렇게 덧붙였다. “진짜 더는 못 할 거 같을 때 있잖아요. 그때 한 번 더 하는 거, 딱 그만큼씩 더 나아지는 거야.”
--- 「이건 내 운동」 중에서

내 삶의 절반을 함께 보낸 사람인데도,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닌 듯했다. 그간 본 적 없는 집중력 가득한 표정과 한번도 그의 것이라 생각해보지 못한 승부욕, 손에 초크 가루를 잔뜩 묻히고 탁탁 털어낼 때 찌푸린 미간과 아무렇지도 않게 홀드에 몸을 던지는 용기가 낯설었다. 벽에서 내려와 사람들 한가운데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철은 정말 딴사람 같았다. 대체 무엇이 그를 달라지게 했을까? 겨우 운동이?
--- 「운동 친구」 중에서

‘하나, 둘, 셋… 완등이다!’
마음속으로 3초를 세고 떨어졌다. 축하해주는 이 아무도 없는 텅 빈 암장에서 내적 댄스를 마구 추었다.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났다. 돌덩이 몇 개 잡은 걸로 이런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니, 이 운동 마음에 드는걸?
매트에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거친 호흡이 정리되고 나서 다시 빈 벽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인다. 어지러운 미로처럼 얽혀 있던 벽 대신, 뚜렷한 길이 나 있는 정답지가. 생각해보면 클라이밍을 처음 했을 때의 즐거움도 그런 거였다. 1번 다음에 2번이 있다는 명확함, 정해진 번호를 따라 순서대로 가기만 하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단순함이 좋았다. 종일 사무실에 앉아서 보이지 않는 결과물을 향해 내달릴 때와는 완전히 다른 감각이었다.
--- 「정답이 있다면」 중에서

땅으로 떨어지던 순간 내가 빨랫줄을 움켜쥐고 멋지게 착지했던 것 같기도 하고, 옆집 아주머니의 얼굴이 고모의 얼굴로 기억나기도 한다. 하지만 바뀌지 않고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나는 하나가 있다. 내가 남자애들과 달리 내 몸을 올리지 못했다는 사실, 있는 힘을 다해도 창틀을 넘어갈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뒤로도 나는 철봉에 매달리기를 즐기는 어린이로 지냈고 왈가닥 소리를 제법 들었지만, 마음 한쪽에는 선 하나가 그어져 있었다. 턱걸이는, 혹은 힘쓰는 일은 내가 할 수 없다는 체념의 선. 별것도 아닌 그 선이 나를 꽤 오랫동안 주춤하게 했다. 이제 와 턱걸이 한 개 한다고 내 삶에 스펙터클한 변화가 생기진 않겠지. 하지만 그 선을 넘어버린다면 꽤 통쾌할 듯하다.
그래서 언젠가 내가 턱걸이 한 개를 가볍게 하는 날이 온다면, 창틀에 매달려 있던 나에게 보여주고 싶다. 나도 이렇게 붙들고 올라갈 수 있다고.
--- 「턱걸이 한 개의 꿈」 중에서

왜들 그렇게 벽에 붙어 있는지, 아주 조금 알게 되었다.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엔 재미가 붙어 있다. 완등 후 뒤돌아본 풍경엔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한 장면이 담긴다. 주말을 산에서 보낼 마음은 아직 없지만, 아주 조금은 자연암벽에 다시 매달려보고 싶어졌다.
--- 「바위에 붙다」 중에서

“포기. 나 그냥 내려갈래.”
나는 줄에 매달리지도 못했다. 손을 덜덜 떨며 올라왔던 길을 다시 기어 내려왔다.
“안 될 거 같아도 움직여보지. 손 놓치면 그냥 떨어지면 돼. 추락도 해봐야 실력이 늘어.”
울상인 얼굴로 한구석에 앉아 있는 내게 선배 클라이머들은 떨어져봐야 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떨어져봐야 그 공포가 사라진다고, 그래야 떨어지는 것도 별것 아니란 걸 알게 된다고.
(중략)
회사를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한 지 1년이 넘도록 나는 계속 망설여왔다. 나이 마흔에 하는 진로 고민은 고려할 게 많았다. 다시는 원하는 일자리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아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 그만두고 나서 후회할지 모른다는 걱정에 나는 떨어지지도, 올라가지도 못한 채였다. 이렇게 매달려만 있으면 힘이 다 빠져버린다는 걸 알면서도.
--- 「매달려만 있으면 힘이 빠져버린다」 중에서

일요일 하루에 몰아서 경기를 하기 때문에 서로 맞붙는 팀을 비롯해서 앞뒤 경기를 하는 팀 선수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는데, 여자 수십 명이 유니폼을 입고 야구장 안팎에 있는 모습을 보는 게 낯설긴 하다. 아는 사이는 아니라도 여자 선수들을 보면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지만, 경쟁관계에 있기 때문에 슬쩍 곁눈질을 해보는 게 다다. 마땅히 몸을 풀 공간도 없어서 주차된 차들 사이에서 준비운동을 하고, 나무 사이에서 캐치볼을 하고, 인조 잔디도 없는 야구장에서 흙먼지를 마셔가며 뛰어야 하는 경기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여자가 이렇게나 많다니!
--- 「야구하는 여자들」 중에서

팀 경기는 혼자 하는 운동과는 완전히 달랐다. 내 실수가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걱정이 앞섰다. 게임을 즐기기보다는 ‘잘’해야만 할 것 같았다. 긍정적인 압박감은 운동 실력을 향상하는 데 도움을 주겠지만, 다른 이의 시선에 신경 쓰는 건 오히려 운동에 집중하는 걸 방해한다. 나의 엉망진창 플레이가 그 증거다. 실수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지나쳐 경기 흐름을 읽기보다는 ‘나 어떡하지’ 같은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고, 그러다 보니 몸이 더 경직되고 만다.
--- 「마이볼」 중에서

“엄마, 몇 개 풀었어?”
“지금 초록색 문제 세 개 풀었지.”
“난 그럼 파란색 풀 거야! 엄만 이거 못 풀지?”
벽에서 내려와 헉헉대고 있으면 강이가 다가와 내가 어떤 문제를 풀었고,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캐낸다. 그러고 나서 쉬지도 않고 다시 몸을 벽에 붙인다. 머리끝에 붙은 조바심이 눈에 보일 정도다. 집에선 유튜브를 보느라 의자와 한 몸이 되어 있어서 무기력한 아이인 줄만 알았는데, 너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구나.
(중략)
이기고 지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과정을 열심히 하면 된다고 스스로 애써 위로해왔다. 하지만 상대가 있는 팀 경기든, 어제까지의 나와 겨루는 싸움이든, 이길 수 있다면 이기는 게 훨씬 재밌다. 이기려고 악착같이 노력하는 쪽이 마지막 승패를 받아들이는 순간에도 더 즐겁고 말이다. 그래서 오늘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봐주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운동하러 간다.
--- 「승리의 감각」 중에서

완등한 사람들은 짐을 챙겨 더 위에 있는 큰 바위로 이동했다. 하나둘 사람들이 사라지더니, 결국 완등을 못 한 건 나뿐이었다.
“너도 올라가. 나 여기서 혼자 해볼게.”
응원해주겠다며 옆에 남았던 철이마저 보내고, 나는 바위 앞에 혼자 남았다. 그러니까, 이건 예전에 나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일단 자연 바위에 매달리겠다고 소중한 휴일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며, 나만 못 할 게 뻔한 이런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며, 나왔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 보기에 창피하다는 생각에 휩싸여 도전조차 못 했을 것이다. 아마도 잘하는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며 잔뜩 위축되어 있었겠지. 그러다 금세 포기했을 거고. 그런데 내가 그 바위 앞에 혼자 남았다.
--- 「근성 있는 여자」 중에서

강이는 ‘나이스’란 단어를 암장에서 배웠다. 칭찬과 응원, 때로는 감탄이 담긴 단어. 야구장에서도 ‘나이스’는 종종 들리는 말이다. 나이스 배팅, 나이스 볼, 나이스 샷. 이 말은 꼭 잘하는 사람에게 외쳐주는 건 아니다. 그가 처음보다 발전했을 때, 안 되던 걸 해냈을 때, 아니면 그의 노력이 보이는 순간 위로와 응원의 말로도 쓰인다. 감탄인지 위로인지는 ‘나이스’의 억양에서 티가 나지만, 어느 쪽이든 괜찮다. 그 말을 해주고 싶을 때의 마음은 모두가 비슷할 테니까 말이다.
오늘 나에겐 나만의 ‘나이스’한 순간이 있었다. 오늘은 그거면 됐다.
--- 「누구에게나 각자의 나이스가 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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