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디자이너로서, 동시에 디자인 회사 프리젠트의 대표로서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왔다. 유리가 없는 종이 벽시계, 주방용품, 성인과 유아가 같이 사용할 수 있는 변기 커버 등 일상에서 필요한 제품들을 디자인하고 개발했다.
이때 새로운 제품 개발에 뛰어들 것인지를 결정하는 나만의 기준이 바로 ‘그 시장의 1등 제품과 차별화된, 나아가 1등 상품을 뛰어넘는 제품을 만들 수 있느냐’다. 그럴 수 있다는 자신이 있으면 뛰어든다. 예전에는 국내 1위가 목표였다. 하지만 이제 대한민국 1위가 곧 세계 1위와 마찬가지인 상황이라 국내 1위 목표는 자연스럽게 세계 1위를 목표로 하는 것과 차이가 없어지고 있다.
어쨌든 나는 우리나라의 각 제품군 시장에서 1위 상품이 사용자의 욕구를 만족시켜주지 못한 부분을 찾아낸다면, 그리고 이를 공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과감히 뛰어든다. 예를 들어, 유아용 변기 커버를 개발했을 때도 그랬다. 기존의 유아용 변기 커버 시장 제품들은 성인용과 유아용을 따로 구비해야 했는데, 무척 번거로운 일이다. 이 부분을 보완하면 충분히 1등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도 ‘유아 겸용’이라는 점만을 차별화 요소로 두지 않았다. 아이와 부모 모두 사용하기에 편해야 했기에 인체공학적인 요소를 고려했고, 아이들이 사용하는 상품에는 특히 민감한 부모들의 성향을 고려해 향균 기능을 추가했다. 이런 기능적인 측면에 더해 아름다운 상품이 되어야만 진정한 차별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제품이 프리젠트의 효자 상품인 두리(DURI) 변기 커버다.
여러 가지를 고려하다 보니 개발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두리는 별다른 홍보나 마케팅 없이도 시장 1등 제품이 되어 지금까지도 많은 고객의 사랑을 받으면서 수년째 회사에 큰 수익을 가져다주고 있다. 이게 바로 당시 시장 1위 상품조차 놓치고 있던 점을 발견해 차별화한 결과로, 기성 제품들이 주지 못하는 새로운 가치가 있는 제품을 만들겠다는, 가장 디자이너다운 발상 덕에 거둔 성공이었다.
--- p.32~34
“학교 내에서 이루어지는 디자인 수업만으로 좋은 디자이너가 육성되지 않습니다.”
제법 긴 시간 동안 교수라는 직함을 달고 대학 강단에 섰던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늘 이렇게 말해왔다. 그렇다고 해서 대학에서의 디자인 교육과 수업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자격증이 디자이너의 감각까지 보증해주지 못하는 것처럼, 대학의 정규 교육이 디자이너의 역량을 담보해주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국내 최고로 꼽히는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해서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지 않는다. 반대로 제대로 된 디자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좋은 디자이너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학교 수업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 것과 실제 디자이너로서의 활동은 다르다. 이는 내가 디자인학과 교수로서 수많은 학생들을 보고 느낀 것이기도 하고, 디자인 회사의 대표로서 직접 디자이너를 뽑고 같이 일해본 결과이기도 하다.
물론 직업인으로서의 디자이너가 되고자 한다면 디자인을 전공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저 디자이너 같은 안목을 갖추고 싶은 것뿐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그런 안목을 갖추는 방법만 안다면, 나머지는 얼마나 노력하느냐, 어느 정도의 관심을 기울이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학생들에게 그리고 디자인 감각과 안목을 키우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많이 보라’는 것이다. 너무 뻔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많이 보는 것만큼 좋은 수업도 드물다. 실제로 글을 쓰는 세계적인 작가들은 하나같이 ‘양질의 글을 많이 읽은 것’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당연하게도,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직접 해보기까지 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방금 말한 그 작가들 또한 ‘많이 써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지만 실제 글을 많이 써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반면 ‘많이 보는 것’은 관심을 가지고 조금만 노력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준전문가 정도의 지식을 쌓는 사람도 많다. 특히 오늘날은 인터넷과 SNS 그리고 유튜브를 통해 예전보다 세계 도처에 깔려 있는 양질의 정보를 훨씬 쉽게 접할 수 있어 ‘정규 수업 없이 전문가’가 될 길이 활짝 열려 있다.
--- p.115~117
나는 학생들에게 자주 ‘이왕이면 정신’을 강조한다. 그게 뭔가 싶어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려는 사람이 있을까 봐 하는 이야기인데, 검색해볼 필요 없다. 내가 만들어낸 말이니까.
“이왕이면 아름다워야 한다.”
“이왕이면 기존 제품보다 더 편리해야 한다.”
“이왕이면 좀 더 쉽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왕이면 재미있어야 한다.”
이처럼, 같은 제품을 디자인하더라도 이왕이면 더 아름답게, 더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디자이너가 아니더라도 새겨야 할 말이다. 사람이든 제품이든 작은 차이가 결국, 성과에 큰 차이를 가져올 때가 많다. 작은 차이가 결국, 선택을 받느냐, 외면을 받느냐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왕이면 정신’이 무조건 ‘아름답게’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왕이면 더 편리하게’ 만드는 데 집중하기도 한다. 물론 그때도 아름다움을 놓쳐서는 안 되니,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 할 수 있다.
오래전 유럽 여행 중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걷던 내 발길을 붙잡은 멋진 디자인을 만난 적이 있다. 도심 속 건물의, 화재 발생 시 사용하는 수전이었다. 내가 그동안 봐 왔던 수전은 단 하나의 형태로 된 빨간색 소화전이다. 그런데 내가 스위스 시아소 거리에서 본 소화전은 귀여운 병정 복장의 조형물이었다. 소화전 하나도 도시의 거리에 존재해야만 한다면, 본연의 소화전 기능 이외에도 이왕이면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다면 좋지 않겠는가! 실로 재미있는 발상이었다.
--- p.242~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