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남산이라는 공간이 담고 있는 남산의 역사와 그 맥락을 조금 더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 여정 속에서 나 자신, 그리고 우리 사회 앞에 놓여 있는 여러 문제들을 비추어 본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역사는 멈춰진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계속 살아 숨쉬고 있으니까요. 질곡의 세월을 견뎌 낸 남산이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한 번쯤은 귀를 기울여 봤으면 합니다. 책을 통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뜨거운 울림으로, 혹은 깨달음으로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연대하며, 우리 사회에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의 바람이 불기를 기대합니다.
---「들어가며」중에서
이렇게 일본은 남산에 신사, 통감부, 헌병대 같은 식민통치를 위한 시설을 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랜 세월 한양을 풍수지리적으로 지켜준 이 신성한 산을 차지해서 한국인의 기세를 한풀 꺾겠다,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마음을 품어서 그런 건지, 일제는 남산을 원래 자신들의 구역인 양 잠식해 들어갔어요. 이미 이 동네에 살던 일본 사람들을 위한 왜성대공원(1897)이 있었음에도 또다시 회현동 일대를 영구대여 형식으로 차지해서 한양공원(1910)을 만듭니다. 이 한양공원의 표지석은 고종에게 써달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고종 임금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감히 상상이 가질 않아요. 공원 터는 지금까지도 흔적이 남아 있는데, 표지석 뒷면은 누가 꼴 보기 싫었는지 글씨를 정으로 까 버렸어요. 이처럼 조선의 ‘남촌’은 일제의 본거지로 탈바꿈하여 각종 식민통치 기구와 일본식 종교기관의 집합처가 되어버렸습니다.
---「대한제국 시대의 남산 「저물어 가는 조선 왕조」」중에서
1898년, 한성에 있던 일본거류민단은 일본의 이세신궁에 모셔진 신체(神體) 일부를 가지고 와서 남산 왜성대에 남산대신궁을 창건합니다. 이로부터 17년이 지나 1915년에 정식 신사가 되면서 경성신사로 개칭하게 되죠. 이 경성신사가 국폐소사로 격상되는 건 1936년, 무려 20여 년이 지나고 나서입니다. 그리고 3·1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 조선총독부는 조선신궁 창립을 공표합니다. 처음에는 조선신궁이 아니라 조선신사로 계획을 하고 짓기 시작했다고 해요. 공사 중에 신사에서 신궁으로 격상된 거죠. 1920년에 본격적으로 건설에 착수하여 5년 만인 1925년에 완공해요. 조선신궁하고 경성신사하고는 무척 가깝습니다. 걸어서 한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거대한 신사를 또 지은 거죠. 약 13만 평(42.3만m2)의 부지에 조선신궁을 위한 수백 개의 돌계단과 건물들이 들어섭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남산의 경사면을 따라 이어지던 한양 도성이, 특히 회현 자락 쪽의 성벽이 크게 훼손됐어요. 일제는 숭례문에서 조선신궁 앞까지 참배객의 편의를 위해 성곽을 허물고 찻길을 낸 거죠. 이곳은 지금의 소월길의 모태이기도 합니다. 사실 남산에 있는 도로들은 거의 다 그때 난 거예요.
---「일제 강점기의 남산 「남산자락 곳곳에 자리 잡은 침략의 흔적」」중에서
고고한 위용을 자랑하던 저 남산의 소나무가 대대적으로 벌목된 것은 바로 일제에 의해서예요. 일제는 남산 일대에 자신들의 공공시설을 지으면서 소나무를 벌채하였고, 특히 조선신궁을 짓기 위해서 13만 평에 달하는 남산 중턱과 정상부 일대의 수목을 베어냈죠. 1930년대에도 철도 부설 등을 이유로 질 좋은 남산 소나무를 마구 베었어요. 이로써 남산은 제 모습을 잃었고 생태계는 파괴되었습니다. 게다가 해방과 6·25 전쟁 뒤 복원은커녕 각종 건물과 시설들이 줄줄이 들어서는 바람에 훼손은 더욱 가속화되었죠. 특히 살길을 찾아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은 남산의 소나무를 거의 남김없이 잘라냈어요. 반듯한 나무는 집을 지을 목재로, 자잘한 솔가지는 땔감으로 베어져 남산은 거의 민둥산이 되다시피 했답니다.
---「일제 강점기의 남산 「남산의 공원화: 파괴하고 파괴되는 것」」중에서
조선 시대에는 왕권의 신성함을 알리는 장소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의 번영과 위세를 뽐냈으며, 광복 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위업을 과시하는 무대가 되었던 남산은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경제 성장과 정치적 기능이 집약된 요충지가 됩니다. 위정자들이 권력을 과시하고, 명분을 세우며 정권을 수호하기 위한 공간으로 쓰인 거죠. 특히 1961년에 중앙정보부가 세워지고, 1964년에 반공교육의 본산지가 된 자유센터가 들어서면서 남산은 보다 딱딱한 장소로 변합니다. 그 상징적인 이미지를 제목에 담은 「남산의 부장들」(2020)이라는 영화도 나왔지요.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예전에 남산이 이렇게나 정치적으로 강압적인 이미지를 띤 장소였었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낍니다. 한때 ‘남산으로 끌려가고 싶으냐’라는 은어가 종종 쓰였으니까요. 한편으로 이곳에는 정부의 경제발전 계획에 따라 외국자본 유치와 기술 이전을 위한 외국인들의 전용 공간이 들어섰고, 정부가 앞장서서 규제를 완화하면서 개발사업들을 유치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경유착도 있었고요. 남산에는 재벌기업들의 고급 호텔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그 주변 땅들은 계속 무분별하게 훼손되었습니다. 1960년대 초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30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남산을 차지했던 기관들과 유명한 장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과정에서 어떤 것들이 되살아나고 파괴되었을까요?
---「군사정권 시대의 남산」중에서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제가 남산 지역을 그들의 본거지로 점거한 것은 그 당시 남산 기슭에 사람이 살지 않고 국유지인지라 대한제국 정부의 허가만 얻으면 점유가 가능했고, 일본인 집단 거류지가 가까운 이점도 작용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해방 후엔 우리나라의 형편이 열악한데 일본인들이 떠난 남산 지역에 시설은 그대로 있었으니 사용했던 것이고, 6·25 전쟁 후에는 불타 버린 빈 땅에 급한 대로 필요한 시설들을 지어 이용했겠지요. 해방과 전쟁으로 갑작스레 월남민 등이 몰려들어 해방촌도 생기고, 역사적 의미를 따질 겨를도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1990년대에 국가안전기획부가 남산에서 나갈 무렵은 대한민국의 형편이 조금은 좋아졌을 때인데 그 시점에도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공간 하나를 제대로 만들 생각을 안 했다는 점은 무척 아쉽습니다. 저는 역사 교육의 교훈이 될 만하게 ‘홀로코스트 코리안 버전(Holocaust Korean Version)’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홀로코스트는 나치가 유대인 대량 학살하던 것을 뜻하는데 이것을 기억하기 위한 기억공간이 전세계44개국에 351개나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월드센터가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어요. 이름이 ‘야드바쉠’이에요. 이스라엘 말로 ‘잊지 말자’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홀로코스트 기억공간에 필적할 만한 것, 홀로코스트 코리안 버전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것을 아직 만들지 못한 것 같아요. 저는 그런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남산 「모든 이에게 소중한 남산이 되는 날까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