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메뉴
주요메뉴


소득공제
SK오디세이아
중고도서

SK오디세이아

정가
22,000
중고판매가
18,470 (16% 할인)
상태?
최상 새 상품에 가까운 상품
YES포인트
배송안내
  • 배송비 : 3000원(선불) ?
  • 할인에할인에서 직접배송
구매 시 참고사항
  • 중고샵 판매자가 직접 등록/판매하는 상품으로 판매자가 해당 상품과 내용에 모든 책임을 집니다.

  •  한정판매의 특성상 재고 상황에 따라 품절 가능
  •  문화비소득공제 신청가능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4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502쪽 | 150*223*35mm
ISBN13 9791198260505
ISBN10 1198260505

중고도서 소개

최상 새 상품에 가까운 상품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SK 그룹의 성장사는 선경직물부터 시작한다. 선경직물은 적산(敵産, Enemy Property) 기업이었다. 적산의 일반적인 의미는 적국이 국내 또는 점령지에 남긴 재산을 말한다. 한국에서 적산이라고 하면 해방 후 일본인들이 남기고 떠난 재산을 뜻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맥아더 장군 산하 서울의 미 군정(美軍政)은 재 조선 일본인들을 쫓아냈고 그들의 조선 내 재산 반출을 불허했다. 최종건 SK그룹 창업 회장이 선경직물을 불하받아 SK그룹의 모태로 삼게 된 배경은 꽤나 우여곡절을 거쳤다.

1930년대 말에 설립된 선경직물은 일제가 경성(서울)과 만주 일대에 직물과 주단을 공급할 목적으로 세웠다. 선경직물은 1940년 10월 수원시 평동 4번지의 공장 부지 8000평을 매입하려고 했다. 지주는 마을 유지 차철순 씨였다. 차철순 씨는 일본 기업에게 땅을 팔려고 하지 않았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토지를 일본인에게 파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최종건 회장의 부친이신 최학배 공이 등장한다. 부농으로 신망이 두터운 최학배 공은 마을에 대형 직물 공장이 들어서는 것은 마을 발전에 이익이 많다는 점을 들어 차철순 씨를 설득했다. 차철순 씨는 땅을 사려거든 자신의 소유 1만 2천 평을 모두 매입하라고 요구했다. 최학배 공은 중재안으로 선경직물이 필요로 하는 8000평을 우선 매입하고 나머지 4000평은 5년 이내에 매입한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성립시켰다. 선경직물과 차철순 씨는 1만 2천 평을 분할하지 않고 공동명의로 소유권 등기를 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런 인연으로 인해 최학배 공은 최종건 회장의 선경직물 입사를 주선할 수 있었고 훗날 이 합의는 최종건 회장이 선경직물을 불하받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SK그룹 창업 회장 최종건은 1926년 1월 30일 수원시 평동 7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 최학배 공과 모친 전주 이씨(동대, 同大)의 4남 4녀 중 장남이었다. 부친 최학배 공이 이재에 밝아 가세가 부유해 최종건 회장은 유년기를 유복하게 보냈다.

최 회장은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기질이었다. 장난이 심했던 소년 최종건에게 부친이 회초리를 들라치면 조부는 사소한 일로 자주 매를 들면 어린아이들의 호연지기를 꺾는다며 손자의 기를 한껏 살려 주었다. 최종건 회장은 보스기질이 강해 또래들이 많이 따랐다. 조부의 뜻에 따라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열 살이 되던 해 부친 최학배 공의 간청을 조부가 받아들여 일본어를 배우는 소학교에 입학했다.

최종건은 유달리 일본인 학생과 자주 싸움을 벌였고 일본인 선생과 마찰이 심했다. 소년 최종건은 은연 중 지배계급인 일본인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강했다. 최종건은 소학교 4학년 때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유급을 당했다.

1942년 수원 신풍소학교(新豊小學敎)를 졸업하고 같은 해 경성 직업학교 기계과에 입학했다. 경성 직업학교는 2년제 단기 직업학교였기 때문에 교과 과정이 실습 위주로 편성되었고 최종건은 이런 편제에 흥미를 느끼고 흠뻑 빠져들었다. 일본인 학생도 드물어 일본 학생과의 충돌도 없었다. 최종건 회장은 1944년 3월 경성 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기계 정비사 자격을 획득했다.

최종건 회장의 18세 때의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최 회장이 기계정비 분야에 기초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최 회장의 기계정비 지식은 추후 전화에 폐허가 된 선경직물의 직기(織機)를 재조립해 공장이 돌아갈 수 있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부친 최학배 공은 1944년 4월 최종건 회장을 선경직물에 입사하도록 주선했다. 최학배 공이 그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이야기한 수원시 평동 선경직물 공장 부지 8000평 매입에 도움을 주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최종건 회장의 선경직물 입사 최초 직급은 공무부 견습 기사였다. 최종건 회장의 유능함은 이때부터 빛나기 시작했다. 최 회장은 입사 반년 만에 직포반 제2조장이 되었다. 최 회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주로 여성으로 구성된 100여 명의 제직조(製織組) 직원들을 이끌면서 제직 기술(베를 짜는 방법)에 관한 기술과 경험을 쌓았다.

20대에 근접한 최 회장에게는 천금의 기회였다. 일생 중 가장 흡수성이 강한 시기였다. 훗날 최종건 회장이 부서진 공장에서 부품들을 찾아내어 직기 20대를 만들어 선경직물을 창업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에 얻은 지식과 경험이 절대적이었다.

선경 치안대 조직

1945년 8월 15일, 조국은 광복을 찾아 기쁨이 넘쳐 흘렀지만, 한편으로는 혼란과 파괴행위가 극심했다. 특히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주택이나 공장, 농장에 대한 파괴행위는 극심했다. 선경직물도 예외는 아니었다.

1945년 8월 16일, 선경직물의 정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선경직물도 파괴 대상 1호일 수 있었다. 최종건 회장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비록 일본인의 재산이지만 자신의 일터였고, 공장은 온전히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파괴되는 것을 막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판단했다.

최종건 회장은 선경직물 직원과 마을 청년들을 모아 선경 치안대를 조직하고 선경직물의 보호에 나섰다. 일부 청년들은 일본인 재산을 보호하는데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평소 최 회장의 신망과 따르는 사람이 많아 치안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최 회장 20세 때의 일이다. 선경직물은 미 군정이 들어서기까지 1개월 동안 고스란히 보전되었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 38선 이남에 군정(軍政)을 선포하고 미 군정은 일본인 재산의 무분별한 거래로 야기되는 경제 혼란을 막기 위해 군정 법령 2호를 발동, 일본인의 재산 이양을 금지하고 이미 이양된 재산이라 할지라도 일본 정부가 포츠담 회담 선언을 수락하기로 내정한 1945년 8월 9일 이후 성립된 매매 행위에 대해서 효력을 박탈한다고 공포했다. 포츠담 회담 선언(Potsdam Declaration)이란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독일 교외 포츠담에서 열린 연합국 정상(미국 트루먼 대통령, 영국 처칠 수상, 소련 스탈린) 회담에서 일본이 포츠담 회담 선언을 인정했기 때문에 한국(조선)은 1945년 8월 9일 독립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일본인 재산에 대한 거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퇴각하면서 한 푼이라도 건지려 했고 횡재를 꿈꾸는 조선인들 사이에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일부 한국인(조선인)들은 횡재를 하기도 했다. 일본인이 경영하던 일부 생산 공장에서는 조선인들의 자치 위원회가 복수로 조직되어 조선인들끼리 경영권을 둘러싼 주도권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선경직물 역시 1945년 11월 11일 적산(일본인 재산)으로 지정되고 미 군정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 그해 12월, 미 군정은 적산 관리요령에 의거 선경직물 관리인으로 황청하, 김덕유 두 사람을 관리인으로 위촉했다. 두 사람은 조선인으로 각각 1백 주의 주주였다. 두 사람은 서울 사람이었다.

최종건 회장은 선경직물의 정상적인 가동을 원했다. 그러나 공장을 가동하려면 두 관리인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최종건 회장은 서울로 올라와 두 관리인을 만나 공장을 정상가동 시킬 것을 요구했다. 관리인 김덕유는 ‘일단 관망해 보자’는 소극적인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두 관리인들에게는 최종건 회장은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광복 직후 혼란기에 최종건 회장이 선경 치안대를 조직, 그 리더로 공장을 지켜온 것이 고마운 것이 아니라 위압적인 존재로 보였다. 그러나 두 주주는 최 회장의 열의와 집념을 언제까지나 무시할 수 없어 결국 최종건 회장을 생산부장으로 임명해 공장 가동에 들어가게 했다. 1946년 초 최 회장이 만 20세 때 일이다.

1946년 2월 선경직물은 조업을 재개했고 최 회장은 방치되었던 직기들을 점검하고 수리했다. 두 주주는 공장장에 황철하(황청하 주주의 실제)와 총무부장에 표덕은(김덕유 주주 생질)을 임명했으나 두 사람은 직물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선경직물은 최종건 회장의 책임하에 운영되었다.

1947년 직물 업계는 호황기를 맞이했다. 미 군정이 해방을 맞이한 한국민들에게 생활의 기본이 되는 의류를 원활하게 지원해 준다는 정책과 업계의 자율적인 노력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선경직물은 급증하는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작업반을 주야간으로 편성하고 24시간 가동했다. 북한은 1948년 5월 14일 예고 없이 남한에 전기 공급을 끊는 단전(斷電) 조치를 했다. 직물 업계 생산 활동은 위축되었다. 선경직물은 자가발전 시설이 완비되어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고 정상가동을 계속했다. 선경직물은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따라 미 군정청으로부터 대한민국 정부에 이관되어 국무총리 직속 기관인 관재청으로 넘어갔다.

1949년 3월, 만 23세가 된 최종건 회장은 교하 노(盧)씨 노순애 여사를 아내로 맞이한다. 최종건 회장은 그해 여름 선경직물 생산부장직을 사퇴했다. 사퇴의 사유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다. 선경직물이 1947년 수준의 생산량을 보였던 것을 감안하면 의외의 선택이었다.

최종건 회장은 퇴직 후 원사(原絲) 도매업에 뛰어들었다. 여기서도 최종건 회장의 수완은 뛰어났다. 원사 도매업계 경쟁은 치열하다. 시장 흐름은 변화무쌍하다. 최 회장은 남다른 사교성과 신용을 바탕으로 외상 거래가 가능할 정도가 됐다.

최 회장은 원사의 비수기와 성수기를 꿰뚫어 보는 안목이 뛰어났다. 1950년 6월 최 회장은 원사 확보의 결정적인 시기라고 판단, 선경직물 퇴직 후 모은 자금을 총동원해 원사를 확보했다. 최 회장은 원사 열 한고리를 확보해 서울시 동대문구 창신동에 있는 창고에 보관했다. 원사 열한 고리는 당시로서는 대단한 물량이었다. 그날이 6월 24일이었다.

다음날 6월 25일 북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했고 최 회장의 원사 확보를 통한 막대한 수익을 창출해 보겠다는 꿈은 깨지고 말았다. 최 회장은 일신의 안전이 시급한 문제였다. 최 회장은 수원 인근의 친척 집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수원이 북 인민군에게 점령당하자 어느 좌익 인사의 밀고로 최 회장은 1950년 8월 체포되어 수원시 팔달면 내무서로 압송되었다. 최 회장의 죄명은 ‘반동분자’였다.

유엔(UN)군의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은 최 회장에게는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전세의 불리함을 느낀 인민군이 남한 우익인사들을 학살하기 시작하는 시점인 것이다. 최종건 회장은 대동청년단 총무 이성길 씨의 도움으로 수원 내무서를 탈출했다. 사지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최 회장의 탈출 후 행보가 눈길을 끈다. 처음 간 곳이 선경직물이었다. 공장은 9월 미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공장 골조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한편 최 회장은 서울 창신동 창고에 보관해 놓은 원사 열한 고리를 찾아 나섰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원사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최종건 회장의 사업 생애 중 섬유 산업을 떠나 이종 사업에 손을 대고 방황하는 시기가 이때 시작되었다.

최 회장은 인견사 열한 고리를 동대문 시장에서 매각하고 꽤 큰돈을 쥐게 되었다. 그리고 전시에 유흥 사업에 뛰어들기도 했고, 석유 판매, 비료 판매 사업도 했다. 전시 하의 석유나 비료는 암시장이 형성되어 있어 초보자는 이 시장에서 성공하기가 쉽지 않았다. 최 회장은 자신이 모은 자금은 물론 부친이 도와준 자금까지 모두 잃고 말았다. 최 회장은 이 때문에 부친 최학배 공으로부터 질책을 받고 부친의 신뢰를 상실했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최종건 회장이 여러 사업을 하는 중에도 그의 진정한 관심은 선경직물에 꽂혀있었다. 그가 청춘을 바쳤고 강한 애정을 느끼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거의 매일같이 시간을 내어 선경직물 공장을 둘러보았고, 잿더미를 헤치고 폭격으로 녹아내린 직기의 부품을 만져보기도 했다.

동생 최종현의 아름다운 양보

최종건 회장은 53년 어느 날 우리 섬유 산업사에 남는 위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최 회장은 자신의 손으로 선경직물을 가동시켜 볼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청년 최종건에게는 자금도 적산인 선경직물을 장악할 수 있는 법적 지위도 없었다. 그러나 최종건 회장은 결심했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우선 법적 지위를 가져야 했다. 최 회장은 관제청으로부터 선경직물을 불하받는 것이 필수였다.

최 회장은 수원 일대에서 관제청 통으로 이름난 방구현 씨를 찾아 만났다. 선경직물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미 군정에서 대한민국 국무총리 산하로 이관되어 관제청이 관리하고 있었다. 관제청은 적산을 ‘귀속재산’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불하 업무를 다루는 정부기관이다. ‘귀속재산처리법’은 귀속재산의 임차인 또는 관리인에게 ‘그 재산을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서 보존하며 그 재산의 가치 또는 효용을 감소시키지 아니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6.25 직전 관리인이었던 황청하나 김덕유는 9.18 수복 이후 선경직물의 재산의 가치나 효용성을 보존하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번도 선경직물 공장을 찾지도 않았다. 그들은 선경직물의 관리 책임을 포기한 상태였다.

관제청 통이었던 방구현 씨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방구현 씨는 선경직물을 차철순 씨의 명의로 불하받아 이를 최종건 회장에게 넘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차철순 씨는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인물이다. 선경직물이 1944년 수원의 공장 부지 8000평을 매입할 당시 1만 2천 평의 땅을 소유한 지주였고 나머지 4000평을 5년 이내 매입하기로 합의하고 공동명의로 소유권 등기를 한 바 있다. 방구현 씨는 차철순 씨로부터 최종건 회장이 나머지 4000평을 매입하는 조건이면 선경직물 불하를 승낙하겠다는 합의를 이끌어낸 상태였다. 차철순 씨는 4000평의 땅을 처분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최종건 회장은 선경직물 불하가 목표였기에 두 사람의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문제는 4000평의 매입자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최종건 회장은 연이은 사업 실패로 매입자금이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부친 최학배 공에게 지원을 바랬다.
최학배 공은 두 가지 이슈로 고민에 빠졌다. 하나는 차남 최종현의 유학자금을 마련해주는 것이고 둘째는 최종건 회장의 사업 자금을 지원해주는 것이었다. 둘 다 중요하다.

최종현은 1950년 3월 수원 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5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화학과에 입학했고, 1953년 초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젊은 엘리트들에게 미국 유학은 꿈이었고 이상이었다. 최종현은 학구적이었다. 학문의 선진국 미국 대학에서 좀 더 높은 수준의 공부를 꿈꾸고 있었다.

부친 최학배 공은 차남 유학을 도와주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장남에게는 이미 사업 자금을 지원해 준 바 있고 최근 사업 실패를 보면서 무언가 믿음이 덜 가는 것이었다.

차남 최종현은 아버지의 고민을 알아차렸다. 최종현은 어느 날 “아버님, 저의 유학은 1, 2년 늦어도 됩니다. 형의 사업 자금은 늦출 여유가 없습니다. 사업은 때를 놓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먼저 형의 사업 자금을 주시고 형의 사업이 잘되면 그때 유학가도 되겠습니다.” 라고 부친에게 간청했다. 부친 최학배 공은 차남의 아름다운 우애 어린 간청을 받아들여 최종건 회장에게 20만 환을 지원했다. 꽤 거금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최종현 회장이 자신의 유학을 지체시키면서도 형의 사업 자금을 지원케 해준 사실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이 아름다운 양보는 추후 SK그룹이 대재벌로 성장하면서 기업승계 과정이 아무런 다툼없이 이어져 온 계기를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다.

최종건 회장은 1953년 4월 8일 선경직물 공장 부지 1만 2천 평 중 4000평을 매입하고 차철순과 공동명의로 “귀속재산 선경직물(주) 우선 매수원”을 관제청에 제출했다. 1953년 7월 27일 최종건 회장은 관제청에서 나온 선경직물의 “귀속재산 매각통지서”를 받았다. 매각통지서에는 매각 대금을 130만 환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엄청난 거금이었다. 선경직물의 매각 대금이 그토록 거금인 것은 시가 감정이 잘못된 데다 그간 체납된 임대료가 가산되었기 때문이다. 매각 대금이 높게 책정되었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한번 결정된 매각 대금은 포기할 수는 있어도 이의 신청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 규정이었다.

매각 대금이 높게 책정됨에 따라 두 가지 어려운 문제가 생겨났다. 하나는 동업 조건으로 사업 자금을 지원하기로 한 방구현씨가 높은 매각 대금에 질려 약속을 파기한 것이다. 하나는 매각 대금 전체를 떠안게 된 최 회장의 대응 능력의 한계였다. 계약 체결까지는 3주일의 여유밖에 없었다. 그 기간을 넘기면 계약은 무효가 된다. 최종건 회장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매각 대금의 10%만 내면 매수 계약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130만 환의 10%, 13만 환도 만만찮은 돈이다. 당시 선경직물은 원사를 구입하는데도 급급한 형편이었다.

최종건 회장은 고민 끝에 재조립이 불가능한 직기를 고철로 처분하고 기관실의 보일러와 발전기를 팔기로 결정했다. 물론 그렇게 한다 해도 13만 환에는 어림도 없는 돈이었다. 그런데 직기나 발전기 등을 처분하는데도 문제가 있었다. 불하 전까지는 정부 재산이기 때문에 법률상으로 문제가 있었다.

고민에 빠져있는 최종건 회장에게 희소식이 왔다. 지주 차철순 씨로부터였다. 차철순 씨는 본인이 소유하고 있는 지가증권(地價證券)으로 귀속재산 매수계약금을 우선 납부하고 최종건 회장이 1년 내에 전액을 반제해주는 내용이었다. 당시 관제청은 불하 대금 납부에 지가증권으로 대신 할 수 있도록 했고, 액면가대로 인정했다.

지가증권이란 1951년 농지개혁법에 따라 정부가 매수한 토지의 보상금으로 지주에게 발행한 유가증권이다. 당시 지가증권은 액면가의 50% 이하로 거래되는 곳이 허다했다.

차철순 씨는 지가증권을 액면가로 팔 수 있었고 최 회장은 매수 대금을 납부할 수 있어 두 사람에게 이익이 되었다.

1953년 8월 14일, 최종건 회장은 선경직물 매입 대금 130만 환의 10%인 13만 환을 지가증권으로 납부하고, 10년 분납 조건으로 선경직물 주식회사 주식 50만 주 중 200주(황청하, 김덕유 지분 각 100주)를 제외한 49만 9,800주를 차철순 씨와 공동명의로 매수한다는 내용의 귀속재산 매수 계약을 체결했다. 꿈이 현실로 실현되었다.

선경직물은 9월 들어 자리를 잡아갔다. 추석을 앞두고 최종건 회장은 그동안 비축해 둔 인조견 400필을 한꺼번에 출하했다. 당시 한 필당 가격은 900환, 일시에 36만 환의 거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최종건 회장은 밀린 노임부터 해결했다. 최 회장은 차철순 씨에게 지가증권으로 빌린 13만 환 전액을 갚았다. 그리고 차철순 씨로부터 선경직물 공동 매수인으로서의 권리 포기 각서를 받았다. 최종건 회장은 이로써 선경직물의 단독 소유자가 되었다. 한국 섬유산업 성장사(史)의 한 페이지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최종건 회장은 1953년 10월 1일을 선경직물 창립일로 선포했다. 현 SK그룹의 창립기념일은 4월 8일로 변경됐고, 2023년은 SK그룹 창업 7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2 최종건, 최종현 형제 」중에서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상품정보안내

  •  주문 전 중고상품의 정확한 상태 및 재고 문의는 PC웹의 [판매자에게 문의하기]를 통해 문의해 주세요.
  •  주문완료 후 중고상품의 취소 및 반품은 판매자와 별도 협의 후 진행 가능합니다. 마이페이지 > 주문내역 > 주문상세 > 판매자 정보보기 > 연락처로 문의해 주세요.

판매자 정보

  •  대표자명 : 이성환
  •  사업자 종목 : 전자상거래 소매업
  •  업체명 : 이성환
  •  본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등포동 647 영등포푸르지오207-403
  •  사업자 등록번호 : 211-92-01055
  •  고객 상담 전화번호(유선) : 010-9251-9001
  •  고객 상담 이메일 : 9847aaa@naver.com

부적합 상품 신고하기 신고하기

  •  구매에 부적합한 상품은 신고해주세요.
  •  구매하신 상품의 상태, 배송, 취소 및 반품 문의는 PC웹의 판매자 묻고 답하기를 이용해주세요.
  •  상품정보 부정확(카테고리 오등록/상품오등록/상품정보 오등록/기타 허위등록) 부적합 상품(청소년 유해물품/기타 법규위반 상품)
  •  전자상거래에 어긋나는 판매사례: 직거래 유도

배송/반품/교환 안내

배송 안내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배송 구분 판매자 배송
  •  택배사 : CJ대한통운 (상황에 따라 배송 업체는 변경 될 수 있습니다.)
  •  배송비 : 3,000원
배송 안내
  •  판매자가 직접 배송하는 상품입니다.
  •  판매자 사정에 의하여 출고예상일이 변경되거나 품절이 발생될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반품/교환 방법
  •  고객만족센터(1544-3800), 중고샵(1566-4295)
  •  판매자 배송 상품은 판매자와 반품/교환이 협의된 상품에 한해 가능합니다.
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직수입 음반/영상물/기프트 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 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30%를 부과할 수 있음

    단, 당일 00시~13시 사이의 주문은 취소 수수료 면제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LP상품의 재생 불량 원인이 기기의 사양 및 문제인 경우 (All-in-One 일체형 일부 보급형 오디오 모델 사용 등)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  쿠폰은 결제 시 적용해 주세요.
1   18,470
뒤로 앞으로 맨위로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