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모임에서나, 판에 박은 말과 앞뒤가 있을 뿐이었다. 신명이 아니고 신명난 흉내였다. 혁명이 아니고 혁명의 흉내였다. 흥이 아니고 흥이 나나 흉내였다. 믿음이 아니고 믿음의 소문뿐이었다. 월북한 지 반년이 지난 이듬해 봄, 명준은 호랑이 굴에 스스로 걸어들어온 저를 저주하면서, 이제 나는 무얼해야 하나? 무쇠 티끌이 섞인 것보다 더 숨막히는 공기 속에서, 이마에 진땀을 흘리며, 하숙집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큰 새와 꼬마 새는 바다를 향하여 미끄러지듯 내려오고 있다. 바다. 그녀들이 마음껏 날아다니는 광장을 명줄은 처음 알아본다. 부채꼴 서북까지 뒷걸음질친 그는 지금 핑그르 뒤로 돌아선다. 제정신이 든 눈에 비친 푸른 광장이 거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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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몸이란, 허무의 마당에 비친 외로움의 그림자일 거다. 그렇게 보면 햇빛에 반짝이는 구름과, 바다와 뫼, 하늘, 항구에 들락날락하는 배들이며, 기차와 궤도, 나라와 빌딩 모조리, 그 어떤 우람한 외로움이 던지는 그림자가 아닐까. 커다란 외로움이 던지는, 이 누리는 그 큰 외로움의 몸일 거야. 그 몸이 늙어서, 더는 그 큰 외로움의 바람을 짊어지지 못할때, 그는 뱄던 외로움의 씨를 낳지 .그래서 삶이 태어난 거야. 삶이란, 잊어버린다는 일을 배우지 못한 외로움의 아들.
--- p.86
비린내 나는 살갗 검은 여자들이, 꼬챙이로 고기를 꿰어 광주리에 옮기면서, 목쉰소리로 셈을 외친다. 한나히요, 두흘이요, 서어히요, 가락을 붙인 셈 소리는 성의 구별을 잊게 한다. 저 여자들도 삶의 뜻을 가끔 생각할까? 아마 결코 않는다. 철학은 한가에서 온다고, 무엇에서 비롯했건 교육받은 숱한 사람들에게, 생각한다는 버릇이 붙어버렸다는 일은 물리지 못한다. 아가미처럼 이루어진, 이 '생각'이라는 가닥을 떼어버리면, 그들은 죽는다. 아가미를 떼지 않고 매듭을 푸는 길만이, 사실에 맞는 처방이다.
개인의 밀실과 광장이 맞뚫렸던 시절에, 사람은 속은 편했다. 광장만이 있고 밀실이 없었던 중들과 임금들의 시절에, 세상은 아무일 없었다. 밀실과 광장이 갈라지던 날부터, 괴로움이 비롯했다. 그 속에 목숨을 묻고 싶은 광장을 끝내 찾지 못할 때,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 p.78-79
관(棺) 속에 누워 있다. 미이라. 관 속은 태(胎)집보다 어둡다. 그리고 춥다. 그는 하릴없이 뻔히 눈을 뜨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몸을 비틀어 돌아 눕는다. 벌써 얼마를 소리 없이 기다려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몇 해가 되는지 혹은 몇 시간인지 벌써 가리지 못한다 혹은 몇 분밖에 안 된것인지도 모른다. 똑똑. 누군가 관 뚜껑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요? 저에요. 누구? 제 목소릴 잊으셨나요. 부드럽고 다뜻한 목소리. 많이 귀에 익은 목소리. 빨리 나오세요. 그 좁은 곳이 그렇게 좋으세요? 그리고 춥지요? 빨리나오세요. 따뜻한 데로 가요. 저하고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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