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1960년대는 여전히 그렇게 커다란 의심과 증오를 자아내는가? 왜 정치가, 고위 성직자, 학자, 교수 들은 새로운 세대에게 별 의미가 없는 시대를 비난하는가? 그 시대의 사건들이 여전히 불안한 --- 정치적, 성적, 사회적, 문화적 --- 기억을 뒤흔들어 오늘날의 순응주의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들은 새로운 세대가 그 과거를 넘어서서 ‘놀라운 승리’로 새로운 질서를 위협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것인가? 근심거리의 첫 번째 징후, 즉 대부금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 사회적 복지국가를 옹호하는 노동조합주의자들,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점령에 항의하는 반전 시위 등을 보면서 게으른 언론인은 60년대의 파일을 뒤진다.
서론---연대기: 영웅/악당,p. 31
10월은 청천벽력처럼 온 것이 아니라는 소식이 베이징에서 들려왔다.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은 거의 십 년 동안 아대륙[인도---옮긴이]의 고전이었으며, 그 결과 기대감이 몇 년 동안 커져 왔다. 이해의 메이데이 집회에서 나는 이상하게 들리는 중국 이름들을 들었다. 마오쩌둥, 주저, 저우언라이, 허룽. 그 집회에 관해서는 거의 다 잊어버렸지만 (당시 나는 다섯 살 반이었다) 이상하게 들리는 중국 이름들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에게는,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당시 아대륙에서 성장하고 있던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중국 혁명의 드라마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했다.
1장 전주곡: 1949년,p. 115
헬싱키에서 있었던 베트남인들과 대화를 통해 나는 서방의 급진주의자, 사회주의자, 민주주의자 등이 우선시해야 하는 한 가지 일이 있다고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베트남인들이 자기 나라에서 미국인들을 몰아내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했다. 필요하다면 세상을 뒤집어엎어야 했다. 나는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정치적 행동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청년 공산주의자, CND, 퀘이커 그룹, 일부 노동당 클럽, 기타 조직 등에서 연설해달라고 하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3장 혁명과 반혁명: 1965~1967년, p. 205
이 여행의 가진 가장 뚜렷한 특징은 가는 곳마다 낙관주의와 지성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서유럽에 미친 효과는 극적인 것일 수 있었다. 농업이 압도적인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에 저항할 수 있다면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단호한 노동자 계급이 분명 자신들의 부르주아지를 몰아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하노이에서, 몇 달 전에 호찌민이 이탈리아 공산당 정치국의 고위 대표를 놀라게 한 일이 있다고 들었다. 베트남 지도자와 장시간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후 이탈리아인들은 이 투쟁에서 어떤 도움이 가장 필요하냐고 물었다.
호찌민은 즉각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들이 우리를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탈리아에서 혁명을 하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인들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는 세계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오랫동안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4장 프라하에서 하노이까지: 1967년 1월~2월, p. 283
베트남인들의 성공이 학생들을 고무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학생들의 승리가 노동자들을 고무했다. 프랑스는 혁명 직전의 해체 상태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하지만 바로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누가 프랑스를 지배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아직 깨닫지 못했다. 봉기가 나라 전체를 휩쓸었다. 천만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이것은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큰 총파업이었으며, 사건의 규모는 1905년의 차르 러시아의 격변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더 이상 학생과 노동자들만 참가한 것이 아니었다. 농부와 농민도 트랙터에 퇴비를 싣고 거리로 나왔다. 변호사와 판사, 건축가와 천문학자 등이 변화를 위해 뛰쳐나왔다.
---8장 1968년: 프랑스 혁명, p. 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