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이란 그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 곧 신자가 하나님과 관계 맺는 내적인 삶, 변해서 행동을 취하게 하는 원동력을 제공하는 경건 생활과 훈련, 그러므로 다른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축을 말한다. 복음주의 영성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보다 십자가로부터 비롯되고, 감사함으로 십자가에 반응하며 겸손하게 십자가를 본받는 가운데 살아가는 삶이라고 볼 수 있다.
---「서론」중에서
‘공급하다’에 해당하는 라틴어는 ‘프로비데오’(provideo), 즉 ‘미리 본다’는 말이다. 이 사건의 핵심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미리 보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갖가지 생각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필요를 보시고, 그것이 채워지도록 ‘배려’하시며, 동시에 제물을 제공하시는 자비로운 행동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보인다(계시된다). 그렇다면 모리아는 하나님이 자비로운 은혜와 공급하심의 아름다움 가운데서 나타나시는 장소다.
---「1장 여호와께서 준비하시리라」중에서
유월절 양은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초기의 한 모형이었다. 유월절 식사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성만찬의 모델이었다. 유월절의 희생은 십자가의 패러다임이었다. 원래의 것도 멋지긴 하지만, 진정한 것과는 크게 다르다. 수동 타자기가 최신 워드 프로세서와 다른 것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유월절 양의 사역은 이스라엘에만 제한되어 있었던 반면, 위대한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의 피는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를 사서 의로운 왕과 해방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한다.
---「2장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중에서
최근에 다시 사람들은 그 제물이 정말로 대속물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 반대는 제물이 형벌을 대신 받는다는 개념과 특별히 관련되어 있다. 그들은 악행에 대해 대속자를 벌주는 하나님이 과연 정의로운 분인지 묻는다. 어떻게 형벌, 특히 이와 같은 대리적 형벌이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말인가?…현대인들의 세련된 반대들은 어떤 때 보면 다른 무엇보다도 교만에서 비롯되는 듯이 보인다. 그런 반대들은 교회사의 길고도 강력한 흐름에 저항한다. 희생 제사가 형벌적 대속이라는 개념을 옹호하는 스펄전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때로 어리석은 사람들이 ‘성경에 대속의 교리가 어디 있느냐?’라고 묻는 것을 듣게 된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것이 나와 있지 않은 곳이 어디냐?’ 성경에서 그 교리를 빼면, 사실상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3장 이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리라」중에서
그의 죽음은 자발적이기 때문에 그때까지 드려졌던 이스라엘의 모든 짐승 제사와 구별된다. 제물로 선택된 짐승들은 그 문제에 관해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 설사 그들이 불평을 표했다 해도, 집행자들은 그런 불평을 듣거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짐승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새로운 초장으로 가거나 털을 깎으러 가는 것처럼 죽으러 갔다. 그들이 잠잠했다면 절제로 인한 것이 아니라 무지로 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온갖 기능을 온전히 발휘하는 한 인간이 있었다. 그는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괴롭히고 박해하여 죽이도록 허용했다.
---「5장 슬픔의 사람」중에서
그것은 놀라운 공동체다. 예수님이 놀랄 만큼 불안정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택하사 공동체를 이루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의 주변인들이 그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며 외부자들이 따뜻한 환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수난 내러티브는 그 모든 것을 결론으로 이끈다. 예수님이 골고다로 가시는 길에 비틀거리자 그분의 십자가를 진 사람은 디아스포라 출신의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다(15:21).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시몬은 제자가 된 게 분명하다. 그의 가족이 교회에 속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로마 백부장은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빈정대거나 비꼬지 않고 진리를 고백한 유일한 사람이었다(15:39). 모든 남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렸을 때, 거기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살아생전에 필요한 것을 챙겨 드렸고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그를 따라온 여자들이 있었다. 예수님과 한편임을 밝히려면 많은 희생이 요구되었으며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했을 것이다(15:40-41). 하지만 십자가는 이러한 가망 없는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7장 고난받는 종」중에서
사람들은 정의에 민감하고, 죄 가운데 빠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고발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질서정연하고 관료적인 사회에 사는 우리는 매사가 무엇보다도 공정하고 규칙에 따라 움직이기를 원한다. 그렇지 않으면 재빨리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고 응분의 보답을 요구한다. 물론 우리가 해를 입은 쪽이기보다는 해를 끼친 사람의 경우에는 그렇게 예민하게 굴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인데도, 우리는 쉽사리 상당히 부당하게 역할을 역전시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피해자라고 여기고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해를 당한 쪽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해를 끼친 쪽이다.
---「10장 십자가, 과분한 의」중에서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예상해야 하는 더 깊은 이유가 있다. 고난을 견디는 것은 그리스도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고난받을 때 우리는 그분의 고난에 동참한다. 그리고 고든 피의 말에 따르면 그것이 “모든 것의 실마리다.” 우리의 고난은 결코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랬듯이 구속을 이루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난은 “그분의 고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처럼 우리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분명 결코 후회의 원천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분명 언제나 기쁨의 원천이 될 것이다. 그분의 몫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가!
---「13장 십자가, 현재의 역사」중에서
십자가가 내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면, 그것은 또한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17절). 십자가는 그것들을 다 처리했다. 그들은 용서를 받았다. 그렇다면 그런 것이 계속 문제가 되는 것처럼 민감한 양심이 계속 되풀이해서 그것을 다시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죄를 위해 제사를 더 드릴 필요성은 하물며 더욱 없다. 드려진 제사로 충분했다. 더 이상 드리는 것은 불필요한 것일 뿐 아니라, 진품에 대한 값싼 모조품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모욕이 될 것이다.
---「15장 단번에」중에서
그가 가장 상기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불의에 불평하지 않고 비보복적으로 받아들이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모욕을 당했을 때 잠잠했으며, 비난을 당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셨다. 위협을 당했을 때는 그것에 순복하셨다. 예수님은 수동적인 극기를 보이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분의 반응은 적극적인 순복과 신뢰의 완벽한 모범이다. 그분은 저항하고 즉각적인 정의를 요구하실 필요가 없었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기 때문이다(23절).
---「16장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중에서
인간의 사랑은 보통 ‘에로스’다. 그 사랑은 값어치 있고, 사랑할 만하고, 보답으로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것은 욕망, 종종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아가페’는 값어치 없는 사람을 사랑하며, 매우 아낌없이 그렇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자연적인 사랑이라고 알고 있는 인간적 태도와는 다르다. 그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며 우리는 그저 인간의 사랑을 상상하여 좀 확대하기만 하면, 절대 진정으로 사랑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과는 다르다. 양적으로 다를 뿐 아니라 종류가 다른 것이다.
---「17장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