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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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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타인들

: 유이월 짧은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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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0월 17일
쪽수, 무게, 크기 184쪽 | 214g | 128*188*12mm
ISBN13 9791197983115
ISBN10 119798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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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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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데스틴 해변이 보이는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다. 바다를 보러 온 사람들은 대체로 좋아 보인다. 쓸쓸함이나 괴로움 때문에 바다를 찾아온 사람들이라 해도 그들의 뒷모습에는 그 쓸쓸함과 괴로움을 적극적으로 누린다거나 달콤하게 증폭시키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다. 아이의 팔을 잡고 360도로 빙빙 돌리는 엄마, 티셔츠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청년, 팔짱을 끼고 모래사장을 걸으며 한 손으로는 셀카봉을 들고 있는 연인, 사각 카메라 가방을 옆으로 메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중년 남성, 양손으로 옷을 깊이 여미고 모래 바닥을 쳐다보며 걷는 젊은 여성, 세미나 이름이 박힌 목걸이 명찰을 걸고 있는 한 무리의 남녀. 이런 주말에는 어디에다가 카메라를 들이대도 그런 사람들이 거의 하나의 컷에 잡힌다.
---「비밀을 지키는 법」중에서

분명 삶이 너무 복잡해지고 결정에 피로를 느끼는 사람이 많아진 탓일 것이다. 요즘은 ‘하루의 주름’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다. (1) 매일의 식사 (2) 생계를 위한 일이 맞춤형으로 제공되는 서비스인데, 50가지 패턴 중 자신에게 잘 맞는 것을 고르면 된다. 나는 그중 ‘술과 장미의 나날들’이라는 16번 팩을 쓰고 있다. 일단 한 달 정도 써 보고 괜찮으면 연장할 생각이다.
---「술과 장미의 나날들」중에서

눈을 찡긋해 보이며 레너드가 푸드트럭 쪽으로 걸어갔다. 오드리는 그의 자신만만하고 균형 잡힌 뒷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다시 2인 축구팀으로 눈을 돌려 귀여운 아이의 발놀림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 중년 여성이 레너드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레너드는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두 팔을 벌리고 어이없다는 제스처를 하고 있었고 그 여성은 땅에 떨어진 지갑을 주우며 경찰을 부르겠다고 소동을 벌이고 있었다.
---「오드리의 흔들리는 눈」중에서

매 순간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찬란한 날들이었다. 서로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봄볕이 들었고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눈송이가 되어 그들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들의 발아래서 시작된 시간은 옅은 녹색 양탄자로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졌고, 공간은 폴란드 찻잔처럼 경쾌하고 화려한 무늬를 만들며 그들을 안락하게 감쌌다. 그들은 다소 명석했지만 영원에 대해 생각할 정도로 낭만에 젖어 있었다.
---「찬란한 날들」중에서

나는 누워서 로렌이 기타를 잡고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곡을 연습하거나 건반 앞에 앉아 자신의 곡을 만들던 날들을 떠올린다. 어느 아늑한 카페에서 들어 본 것 같은 익숙한 멜로디. 일기장에 쓰일 것 같은 내밀한 노랫말. 그러나 환자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 보는 의사처럼 신중한 표정을 짓고 건반 위를 움직이던 그녀의 손가락. 완벽해질 것 같지 않아서 왠지 마음을 울리는 그녀의 서투름을 나는 사랑했다. 그런 서투름의 감흥에 휩싸이면 나는 휘익 소리로 헨리를 부르고 타박타박 걸어와 내 허벅지에 턱을 괴고 엎드린 헨리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곤 했다. 그런 날들이 전부 맑은 날들이었을 리는 없지만 기억 속의 이미지들에는 햇빛이 가득 번져 있다.
---「기만과 행복」중에서

문영은 망설여졌다. 네가 이 회사에 적합하지 않다는 말도 사무적으로 할 수 없는 자신이 오히려 이 자리에 더 적합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SAP팀에 지원한 희지는 문영의 대학 후배였다. 현재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같은 동아리였고 도서관 2층 베란다에서 함께 수없이 많은 자판기 커피를 마셨으며 학교 앞 주점에서 배가 불러 밥 생각이 나지도 않을 정도로 술을 마셨다. 사회학도답게 바우만이나 부르디외를 논하면서 말이다. “선배님, 그래서 최종 결과는 언제 나오는 건데요?”
---「바우만과의 왈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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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내가 알고 있는 게 너무 많은데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건 또 다른 문제인 것 같다. 나는 크레파스를 보며 그걸 처음 느꼈다. 엄마가 사 준 12색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해 다른 애들의 24색, 36색 크레파스들을 처음 보았을 때. 금색과 은색이 발하는 빛, 엄연히 다른 노란색과 레몬색, 그리고 칠해도 안 칠해도 똑같지만 완성과 비완성의 판도를 확실하게 결정짓는 하얀색… 이미 알고 있던 이 색조들을 처음으로 바라보며 슬픔 속에서 기뻤던 내 마음. 나는 오랜만에 눈을 빛내는 것 같다. 크레파스 팔레트 같은 유이월의 글을 들여다보면서. 알면서도 모르고 살았던 너무 많은 색을 여기서 본다.
- 요조 (뮤지션, 작가)
유이월의 글은 빛이 난다. 눈을 찌르는 눈부심이 아니라 풍경으로 떠오르는 찬란함이다. 그의 언어는 정확하다. 서늘하게 정교하면서도 마음의 온도에서 체온을 지우지 않는 정확함이다. 정서가 풍경이 되는 유이월의 소설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마음을 말 대신 정경으로 그려내는 이야기 속에선 나도 너도 어느덧 풍경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그 풍경 속, 혼자 반짝이는 빛이 아닌, 낯설고도 가까운 ‘찬란한 타인’들이다. 작가 자신조차 타인으로 남을, 조금 더 멀어도 조금 더 세심한 유이월의 시선 덕분에, 우리는 서로에게 타인일지라도 함께 쓸쓸히 빛날 수 있다. 때로는 따로따로 깜박일 수도 있다. 그 깜박임은 여운조차 길어서, 나는 책을 덮고도 한참 동안 잔상을 사진처럼 품고 다녔다. 벌써부터 그의 다음 책이 그립다.
- 이서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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