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의 끝 무렵인 1598년 선조 31년 김해에 주둔하던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부대가 사기장들을 강제로 끌고 왔는데, 그중의 한명이 이삼평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가라쓰 근방 다쿠에 정착하여 ‘다쿠코가라쓰 도자기’라 불리는 것을 만들었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조선의 것과 같은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아리타의 이즈미산에서 백자광을 발견, 1616년 광해군 8년 무렵 변두리 시라카와에서 덴구다니 가마를 열고 도자기를 굽기 시작했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의 다른 곳에서 도자기 제조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곳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해 오늘날 도자기 마을 아리타가 생겨나게 되었다.
---「PROLOGUE」중에서
정조 이후 조선 지배층은 점점 아리타 자기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조선말에 이르면 일본 도자기가 아름답기 그지없는 조선백자의 숨통을 끊어버리게 된다. 조선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19세기 중반부터는 우리 궁궐에서도 아리타 백자를 사용할 정도가 되었으니 그 참담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일제 36년의 강점기와 그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며 우리 도자기가 겪은 상처와 단절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PROLOGUE」중에서
2022년 다자이후 시에 있는 규슈국립박물관이 사상 최초로 일본 왕실에서 사용하던 그릇들을 공개했다. 2022년 9월 27일부터 11월 20일까지 ‘왕실그릇 특집전’을 열고 왕실에서 사용하다 야마시나 가문에 하사한 그릇들을 소개했다. 일본 왕실에서 과거 사용하다 보존하고 있는 그릇이나 현재 사용하는 그릇에 대한 공개는 일종의 금역(禁域)이어서 이렇게 귀족에게 하사한 그릇에 대한 공개로 그 일단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일본의 박물관이 왕실 그릇 전시회를 연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첫 번째 가마 ‘아리타·이마리, 이삼평과 백파선 그리고 3대 명가’」중에서
하사미는 인구 1만 5,000여 명의 작은 마을이다. 그러나 나가사키 현에서는 가장 크고, 일본 전국적으로 보아도 3번째로 큰 규모를 가진 도자기 생산지다. 이 작은 마을에 무려 150여 개의 가마가 있고, 그곳에서 일본 식기의 15%를 생산한다. 생활자기의 메카가 바로 하사미인 것이다. 그런데 하사미는 우리에게 전혀 익숙한 이름이 아니다. 아마 대부분 이 지명을 모를 것이다. 이유가 있다. 에도 시절에는 하사미 도자기도 아리타와 마찬가지로 40분 거리의 이마리 항구를 통해 외부에 유통됐다.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가까운 아리타역을 통해 기차로 팔려 나갔다. 그러니 하사미는 자신의 이름이 불릴 기회를 잃고 이마리야키 아니면 아리타야키로 통칭된 것이다. 하사미에서 처음으로 가마를 연 것은 1598년 조선 사기장 이우경(李祐慶)으로 돼 있다. 여기서 “돼 있다”라고 표현한 것은 일본인들이 그렇게 하기로 정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가마 ‘조선에서 사용한 요강 대부분을 만든 하사미’」중에서
일본에서는 최고의 찻사발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첫째 라쿠(?), 둘째 하기(萩), 셋째 가라쓰(唐津)’ 혹은 ‘첫째 이도(井?), 둘째 라쿠(?), 셋째 가라쓰(唐津)’라는 말이 예부터 전해져 내려왔다. 앞의 말은 제일 가치가 높은 찻사발이 교토의 라쿠 가마에서 만든 것이고, 두 번째가 하기, 세 번째가 가라쓰에서 생산한 것이라는 뜻이다. 뒤의 말에서 첫째 ‘이도’는 ‘이도다완’, 곧 조선의 찻사발을 지칭한다. 위에서 보듯 어느 말을 선택한다 해도 가라쓰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조선 사기장들의 피땀 흘린 노력으로 인해 가라쓰야키(唐津窯)는 일본 3대 다기로 성장하면서 그 유명세가 높았다.
---「세 번째 가마 ‘가라쓰, 또칠의 나카자토 가마’」중에서
사발이나 꽃병, 접시 등의 여러 용도로 만들어진 카라코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도자기의 위쪽 입술 아랫부분에 ‘고(高)’ 자가 띠 모양의 영락(瓔珞), 구슬을 꿰어 만든 목걸이나 가슴치레걸이 형태로 둘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히라도에 있는 고려묘비의 ‘高’ 자 문양과 같은 것으로 조선 도공이 만들었다는 표식이다. 글자에 디자인적인 변형을 주어, 그것이 ‘高’ 자임을 모르게 한 것이다. 이 문양은 카라코에와 더불어 미카와치 도자기의 대표적인 상징이자, 조선 사기장의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네 번째 가마 ‘히라도·미카와치, 나가사키 수출 이끈 고려 할머니와 거관 후손들’」중에서
“일본이 약탈해간 한국의 도자기 기술은 우리 다카토리야키를 비롯해서 일본의 도자기 예술을 크게 발달시켰습니다. 그 반면에 뛰어난 도공들을 모조리 빼앗겨버린 조선은 도예의 맥이 끊어지고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지요. 일본이 한국에서 뺏어온 것은 모두 돌려보내야 된다는 게 제 신념입니다. 저는 한국의 젊은이를 제자로 받아들여 다카토리야키의 비법만이라도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고 싶습니다.” 이런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제자가 되겠다고 자원하는 젊은이가 무려 2,500여 명이나 되었다. 세이잔 여사는 그중에서 2명을 선발했다. 당시 서라벌고등학교 이규탁 군과 중앙고등학교 최홍석 군이었다.
---「다섯 번째 가마 ‘후쿠오카·고이시와라, 팔산의 다카토리 가마’」중에서
앞서 보았던 다카토리야키들은 실제로 위에서 말한 회령자기의 특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아가노야키도 비슷하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도자 표면 위에 여기저기 유약이 자연스레 흘러내린 자국이다. 유약은 마치 화산에서 마그마가 흘러내린 것처럼 전혀 인위적이지 않게 눈물을 흘리고 있다. 다만 훨씬 대범하고 자유분방했을 ‘북방 그릇의 흔적’은 일본에서는 많이 지워졌다. 그네들의 평소 일상처럼 매우 조심스럽고 간결하다. 북방 회령자기의 거칠고 남성적인 기풍이 남방의 다카토리야키나 아가노야키에서는 좀 더 세련되어지고 고분고분한 맛으로 변했다고 보면 될 듯하다.
---「여섯 번째 가마 ‘야쓰시로, 존해의 고다 가마’」중에서
조선 도자기가 가진 뛰어난 특징 중 하나는 흙이 주는 멋이다. 그러므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사기장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앞서 누누이 보았지만 조선 도자기에서 사용한 흙과 비슷한 도토를 찾는 것이었다. 하기야키의 경우 대표적인 것이 위에서 말한 호후시의 ‘다이도쓰치’다. 모래와 자갈이 많이 섞인 백색 점토인 이 도토가 중요했던 이유는 하기 도자기 본래의 색으로 알려진 비파색의 유색을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도 일본의 다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역시 이 도토로 만든 찻사발들이다.
---「일곱 번째 가마 ‘하기·나가토, 이작광·이경 형제의 후카가와 가마, 고라이사에손 가마’」중에서
박평의는 아들 정용(貞用), 심당길 등 마을 주민들과 함께 백자토를 구하러 다녔으나, 용암이 분출하면서 형성된 토질이 워낙 많았기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번내를 샅샅이 돌아다닌 지 10여 년 만인 1614년 봄 기리시마(霧島) 산의 이부스키(指宿)에서 드디어 양질의 백자토를 발견하고, 이어 가세다(加世田) 인근에서 유약으로 쓸 수 있는 광석도 찾아냈다. 백자토 발견을 학수고대했던 요시히로는 자신이 직접 흙을 확인하고 즉시 나에시로가와에 자기 공장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박평의와 심당길이 오랜 시행착오 끝에 색이 순연(純然)하여 질이 고아(高雅)한 자기를 만들어 번주에게 진상하니, 요시히로는 “조선의 웅천 자기와 똑같다”고 뛸 듯이 기뻐하며 박평의에게 세이에몬(?右衛門)이라는 이름과 네 가마의 녹봉을 하사하고, 조선인 마을을 대신 다스릴 장로에 해당하는 쇼야(庄屋)에 임명했다.
---「여덟 번째 가마 ‘가고시마 미야마, 심수관·박평의의 나에시로가와 가마’」중에서
아리타와 규슈 도자기의 의미는 조선 출신 사기장에 대한 연구만으로 종결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그것이 일본 근대화에 어떤 영향을 주고, 어떻게 도왔는지, 그리하여 현대 일본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총체적 관계를 모두 풀어내야 비로소 하나의 단락, ‘일본에 넘어간 조선 도자기 연구’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학계의 연구는 아직 시작도 못한 단계라 할 수 있다.
---「EPILOGUE ‘27년 전의 나는 왜 아리타로 갔을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