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기 해방 공간의 이념에 희생된 젊은 장교들의 이야기
십수 년 전, 필자는 언론사 퇴직한 뒤 마포에 집필실을 마련했다. 한국인물연구소라는 간판을 걸고 주로 인터뷰 활동을 벌였다. 각 분야 샐럽들은 물론 전문가, 생활인으로서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전하는 휴먼스토리를 쓰는 작업이다. 이는 언론사 재직 시절 문화부, 특집부에서 주로 근무하면서 인물인터뷰, 탐방기사를 많이 써온 배경이 큰 힘이 되었다.
이러다 보니 언론사 퇴직 이후 더 활발하게 움직였다. 시사 월간 〈신동아〉에 ‘이 사람의 삶’,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의 ‘문화도시 문화복지’에 ‘초대석’, 주간 〈일요서울〉에 ‘이계홍이 만난 사람’ 등을 연재했다. KBS 1라디오에 1시간짜리 와이드 인터뷰 ‘이계홍의 세상 사는 이야기’를 매주 1회 6개월여 진행하기도 했다.
이렇게 퇴직 후에도 계속 ‘인물전문 기자’로 활약하는데, 어느 날 〈국방일보〉 측에서 몇몇 장군들의 일대기를 집필해줄 수 있느냐는 의사를 타진해왔다. 쉽게 응낙하고 첫 작업에 나선 분이 ‘장군이 된 이등병 최갑석’이다. 해방 직후 국방경비대 이등병으로 시작해 육군 소장이 된 전설적인 최갑석 장군 이야기다. 초창기 우리 국군사 이면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었다는 점뿐 아니라 스토리텔링이 풍부해 인기를 끌었다.
최 장군 이야기가 인기리에 끝나자 전 공군참모총장 장지량 장군 이야기를 써달라고 요청이 왔고, 뒤이어 전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 이야기까지 집필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해방 공간의 국방경비대 병사나 장교로 시작한 군인들이다.
매주 한두 차례 장군들의 자택과 사무실을 찾아 인터뷰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었다. ‘숙군’ 때 숙청된 젊은 장교들에 대한 아쉬움의 토로였다. 주 대상은 일본 육사 1, 2학년 생도들이었다. 이들은 미군정 시기 국방경비대 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했던 사람들이고,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주역으로 나섰으나 숙군의 회오리에 휘말려 상당수 숙청되었다. 나이는 하나같이 20대 초반의 청년들이었다.
일본 육사 출신 하면 기계적으로 친일파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해방 직후 국방경비대에 배치된 이들은 민족 장교로 변신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나라가 서자 민족 장교가 된다는 자긍심으로 민족의식이 싹튼 청년들이었다.
감수성 예민한 생도들이 자주국가, 자주군대, 민족군대라는 새로운 이정표 아래 나라를 지키는 간성으로 출발하려 하는데, 이들은 불행히도 외세라는 미군정 지배와 분단이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이때 체제에 쉽게 영합하는 장교도 있었지만, 분단과 외세의 지배를 받는 데 대한 고민과 시대 모순에 대한 고뇌를 가진 젊은 장교들이 적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시대와 불화하다가 사라졌다. 이들에게 이념이 채색되기엔 너무 이른 나이였고, 이념에 물든 집안 환경도 아니었다. 당시 숙군 이전까지는 이념이 요즘처럼 죄악시되던 때도 아니었다.
이들이 일본 육사를 지망한 것은 일제 군국주의를 뒷받침하기 위한 사명감에서라기보다 그 시기 그런 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들어간 것이 정직한 표현일 것이다. 무상 교육, 숙식 제공, 피복 제공, 심지어 월급까지 지급되었기 때문에 누구나 선망한 학교였으며, 신체 건강하고 두뇌가 명석한 학생만이 선택된 학교였으므로 자부심 또한 컸다.
필자는 장군들을 인터뷰하면서 일본 육사 생도들에 대한 죽음을 안타까이 여기는 사연들을 관심 있게 들었다. 졸업생인 김종석, 박정희 이외에 1, 2학년 생도들이었던 오일균, 조병건, 이재일, 이성구, 김태성, 김학림 등이 그들이다. 그중 오일균에 대한 회고담이 많았다. 잘 생기고, 민족의식과 군인정신이 투철하며, 두뇌가 명석해 미래가 약속된 청년 장교였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이 미심쩍다는 것이다.
오일균은 23세의 젊은 육군 소령으로 제주 4?·?3때 포로수용소장을 끝으로 1949년 8월 서울 수색 기지에서 처형되었다. 당시 동료들은 그의 총살형이 이적죄라는 법 조항이 적용되었다고 했다. 그런 것들이 지적 호기심을 발동시켰다. 채명신·최갑석 장군은 제주에서 그와 함께 근무했고, 장지량 장군은 일본 육사 1년 선후배 사이로, 국방경비대 사관학교에서 다시 만난 사이다. 김광식 장군도 친하게 지냈다고 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내막을 몰라 필자 나름으로 파편화된 사연들을 퍼즐 맞추듯이 모아 이야기를 끌고 나가보기로 했다. 따라서 이 소설은 픽션과 논픽션이 가미된 소설임을 밝혀둔다. 또한 기자적 현장성과 작가적 상상력을 가미한 작품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국방일보〉에 ‘잃어버린 사람들’이란 단락으로 희생된 장교들이 짧게 소개되자 어느 날 오일균의 유족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동생 오능균씨(2021년 작고)였다. 그는 형님의 일에 관한 한 조그만 단서라도 있으면 만백사 제하고 찾아나서는 사람이었다. 형님에 대한 정보 갈증이 많은 분이었다. 형님이 왜 처형되었는지, 군 복무의 동선과 인맥, 이적행위가 무엇인지, 추적하는데 뚜렷한 기록이 없는 데다 감춰진 것이 많아 애를 태우고 있었다.
필자는 오씨의 둘째 형 오보균(육사 5기) 소위도 스물한 살의 나이에 첫 부임지 남원 부대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둘째형은 큰형이 처형된 직후 구타당해 죽었다는 풍문이 돌았으나 집으로 유골조차 오지 않았다. 취재 결과 오보균은 6?·?25 발발 2년 후인 1952년 전사자로 기록되었다. 집에 단 한번의 연락을 취하지 않은 채 3년 후 엉뚱하게 전사했다는 것은 아무리 군적 정리가 허술한 시대였다고 해도 납득할 수 없다.
오능균 씨는 자기 대에서 두 형님의 죽음의 원인을 캐지 않고는 억울한 사연의 족적이 영원히 묻힐 것이라는 절박감으로 전국을 헤맸으나 행적을 캐지 못하고 지난해 작고했다. 이 작품은 그의 노고도 상당 부분 스며있다. 작품 연재 시 다른 가족들의 만류 때문에 여러 차례 작품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필자는 소설이란 점을 설득해 우여곡절 끝에 불완전하나마 완성했다.
이 소설은 오일균 소령의 이야기가 뼈대지만, 해방 공간의 혼란스런 국방경비대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격동기, 미군정의 해방관리가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설익은 이념 대립으로 좌우 양 진영에서 유용하게 써먹어야 할 젊은 국가적 동량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이때 해방 공간을 잘 활용했다면 분단의 비극도 막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해방 공간의 이념 대립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모두 역사의 패자라고 본다. 이념은 구실일 뿐, 권력 찬탈에 오염된 ‘광기의 폭력’이 민족 분단의 비극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필자더러 “좌파 아니냐?”고 이념 공세를 펼지 모르겠다. 〈월간문학〉과 〈프레시안〉 연재 중에도 더러 그런 공격을 받았으니까 말이다. 좌파냐 우파냐, 진보냐 보수냐? 한 인생을 그런 식으로 재단하고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사회나 한 개인을 피폐하게 하는가. 어느 한 편을 비판하면 반사적으로 다른 한 편을 옹호한다고 생각하는 이분법적 논리 앞에서 절망할 때가 많다. 한 사건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그런 식으로 편견의 벽에 가둬버리는 것이야말로 폭력이자 야만이다.
이 소설은 〈월간문학〉에 34회 연재(2016.10~2019.6)했던 작품이다. 〈월간문학〉 사상 34개월이라는 최장기 연재가 가능했던 것은 작품 소재의 특이성과 뚜렷한 주제의식이 반향을 불러일으킨 영향이 컸다고 본다. 연재엔 대학 선배인 문효치 당시 문협 이사장의 배려도 컸다. 작품 연재가 마지막 회에서 지면 사정으로 아쉽게 미완으로 끝나 인터넷 매체 〈프레시안〉에 36회(2019.9.10.~2020.1.13)로 확대 재수록 연재했다. 〈프레시안〉 연재 때 더 많은 독자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출판시장이 여의롭지 못하고, 작품 분량이 방대해서 출판하기 어려운 여건인데도 범우사 윤형두 회장께서 기꺼이 출판을 맡아주셨다. 본래는 5권 분량이었으나 사적 자료가 강조된 반면 재미가 반감될 수 있다고 해서 4권짜리로 압축했다.
책이 잘 팔려서 출판사에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러 가지 자료 인용 부분은 작품 안에 출처를 명기했지만, 일부 누락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혹 누락으로 인한 결례가 있다면, 필자들의 너그러운 양해가 있기를 바란다. 소설 작품의 허구성으로 인해 등장인물을 일부 가명을 썼음을 부언(附言)한다.
― 2022년 6월 이계홍
---「작가의 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