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호놀룰루로 간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출강하던 학교에 사정을 얘기해야 했다. 3년째 수업을 줬던 교수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다음 학기부터 아예 강의를 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평생 일이 우선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그 무엇보다 딸을 위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엄마다운 엄마 노릇을 할 유일한 기회였다. 그동안 해외를 단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여권, 비자, 코로나 검사. 모든 과정이 엄중한 시험을 치르는 듯했다. 하와이주 사이트에서 코로나 검사 상황을 등록해야 했다. 그게 자꾸만 오류가 나서 네 시간이나 헤맸다. 항공사 직원한테 문의하니 컴퓨터로 몇 가지 상황을 입력하고는 통과시켜 주었다.
은비가 국내에서 주문을 넣은 물건들이 꽤 많았다. 규정된 무게를 넘지 않게 이민 가방을 꾸려야 했다. 가방을 싸는 데만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가장 난제는 어머니였다. 돌볼 사람을 구해야 했다. 안될 것을 알면서도 연락을 취해보았다. 큰오빠, 작은오빠, 언니. 돌봐줄 사람을 물색하는 중이라는 말에 다들 동생이 알아서 하라고 했다. 한번 올 수도 있겠다는 말조차 없었다. 명절, 어버이날, 어머니 생신날까지 연락 한번 없던 이들이 갑자기 온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긴 했다. 그러던 중, 언니는 한술 더 떠서 대뜸 이런 제안을 했다.
---「1. 미묘한 바람」중에서
비행기 안이었다. 구름은 하얀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그 위에 태양이 스며들어 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반짝거리며 몽글거리는 하얀 바다. 그 순간 어머니를 떠올렸다. 날마다 막말과 욕과 고함을 해댔던 어머니. 흠씬 두들겨 패고 악담을 퍼붓던 어머니. 영문도 모르고 그저 맞고 쫓겨나야 했던 어린 시절.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아버지 욕부터 해대며 집안일을 악을 쓰며 하던 어머니. 자주 화를 내고 울부짖던 어머니. 고함을 지르다가 몇 번 졸도까지 하던 어머니. 우황청심환을 사러 약국에 달려가던 열두 살의 나.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이렇게 고함과 욕을 해대는 줄 알던 나. 초등학교 5학년 때, 놀러 간 친구 집의 어머니가 조용해서 너무나 놀랐던 나. 사업에 실패하고 용달차를 몰던 아버지한테 쏟아지던 어머니의 악다구니. 쥐약을 먹고 살아난 아버지한테 욕을 퍼붓던 어머니. 위암 말기로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한테 사랑한다고 말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말. 어머니에 대한 반항으로 똘똘 뭉쳐 있던 열아홉. 가출과 자살을 늘 감기처럼 달고 살던 때, 어머니에 대한 적개심만큼 내 삶이 뭉개지던 나날들. 그리고 은비. 은비한테까지 패악스러운 근성을 드러내던 어머니. 파리채로 하도 머리를 때려서 119에 신고하고 싶었다고 며칠이 지난 뒤 담담히 털어놓던 여덟 살의 은비.
---「10. 미안합니다」중에서
20여 일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제일이 밥을 먹다 말고 전자 혈압계 커프스를 감았다. 제일은 늘 그런 식이었다. 밥을 먹다 말고 다른 짓을 했다. 차분하게 밥을 한자리에 앉아 먹는 적이 없었다. 밥을 먹다가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가서 뭔가를 하고 오고, 다시 먹다가 또 다른 자리에 가서 뭔가를 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식사 시간은 한정 없이 길어져 어떨 때는 한 시간 동안 밥을 먹기도 했다. 보다 못해 넌지시 은비한테 돌려 말해본 적이 있었다. 나중에 선우가 그대로 따라 하면 어떻게 해? 은비는 이 말이 듣기 싫었던 게 분명했다. 두고두고 그 말을 나를 공격하는 데 쓰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날, 제일은 밥을 먹다가 그대로 입에 우물거리며 씹은 채 구부정한 자세로 혈압을 재고 있었다. 밥을 다 먹을 동안 주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는 참고 있다가 한마디 했다. 혈압 잴 때는 입에 있는 것을 다 먹고, 허리와 가슴을 반듯하게 펴고 재야 해. 제일은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커프스를 풀고 잠시 기다렸다. 다시 혈압을 재더니 보통이네, 라고 했다.
또 한번은 다른 일을 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앉더니 혈압을 재기 시작했다. 차분하게 호흡을 세 번 정도 하고 나서 재보렴. 그렇게 한마디 거들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아, 이것 참! 혈압이 높네. 어쩐지 머리가 아프더라니! 상엽차를 먹어서 좀 기대했는데! 나는 여러 다른 것과 병행해야 떨어질 거라고 했다. 그 ‘병행’에는 성찰과 용서, 힐링코드도 있었지만, 덧붙이지 않았다. 제일은 내 말을 듣는 것 같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18. 이것 하나면 되었다!」중에서
“모든 것이 운명입니다. 그런 은비를 낳은 것이 바로 당신이지 않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짐을 싸고 떠나고 싶겠지만, 그런 마음도 이해하지만, 그러면 안 됩니다. 이겨내세요. 버텨보세요. 그래서 다 끝나고 돌아오면 은비가 새록새록 이 일들을 떠올릴 거예요. 내가 이렇게 엄마한테 했구나. 이런 말을 했어야 했는데, 못했구나. 이렇게 말입니다.”
추 화백 말이 맞았다. 그래야 했다. 알고는 있지만, 쉽지 않았다. 내 고집, 아집, 내 생각, 내 가치관을 죽이는 것은 너무나 아프고 힘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종노릇을 즐기기로 했다.
은비는 어쩌면 뒤늦게 나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내가 가고 나서, 시댁 내외분이 올 예정이다. 시어머니를 대하면서, 시어머니가 무엇이라고 하는 말들을 들으면서 내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가고 난 두 달쯤 뒤, 아이가 100일쯤 되면 시댁에서 올 거라고 들었다. 나는 이 짐들을 다 치우고 편하게 지낼 때 오시겠으니 좋겠다고 했다. 은비가 발끈하며 대답했다. 그러게 짐 박스들을 한 번에 하나씩만 하라니까! 왜 일을 많이 벌이고 그래! 누가 그렇게 하랬어! 그때도 은비의 날이 선 반응에 깜짝 놀랐었다. 또 생각해본다. 내가 이 세상에 없을 때, 그제야 은비는 내가 아무런 조건 없이 은비를 사랑했음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때가 되어서야 은비는 왜 그렇게 사납게 나를 대했는지, 타박하고 원망했는지 후회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럴 때 나는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은비의 어깨를 토닥여줄 것이다. 괜찮다. 자책하지 말아라. 네가 아니라 내가 잘못한 것이란다. 그렇게 말해주며 안아줄 것이다.
---「30. 이겨내세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