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뭐예요, 도대체!” 묵묵히 운전만 하는 동환의 옆에서 서희는 콧김까지 내뿜으며 화를 내고 있었다. “실장님이 입이 무거운 사람이 아니면 내일 회사에 무슨 소문이 돌겠냐구요! 나이 먹은 이상한 사람한테 끌려갔다고 할 거 아니에요! 그리고 나하고 같이 일 하는 사람한테 예의 없이 그게 뭐예요? 아저씨가 내 애인이라도 되요?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 쉼 없이 쫑알거리는 서희의 옆에서 동환은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예쁘다, 예쁘다 하니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어 올라와 그의 머리 꼭대기에서 훌라춤을 추고 있는 꼬맹이다. 웬 얼토당토않은 놈 옆에서 얼굴 붉히고 있던 것도 화딱지가 나서 돌아가시겠는데, 예의 없이 굴었다고 다다다 쏘아붙이는 꼬락서니가 영 마음에 안 든다. “나 이제 아저씨하고 안 만날래요! 내가 왜 실장님을 배신하고 아저씨 차를 탔는지 모르겠어! 그냥 실장님하고 맛있는 밥이나 먹을 걸. 에이씨!” 아직 동환에 대해서 잘 모르는 서희는 1절만 하고 끝냈어야 했다. 동환을 선택하고 그의 차에 올라 탄 이상 적당히 잔소리 몇 소절 퍼붓고 말았어야 한다는 얘기다. 자꾸 실장님, 실장님, 듣기 싫은 소리를 해대며 무진 때문에 동환을 안 만나겠다는 선전포고까지 해버린 서희 때문에 동환의 인내심이 투둑 소리를 내며 끊어져 버렸다. 끼이익! “엄마야!” 3차선 도로에서 갓길까지 스트레이트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거칠게 차를 세운 동환 덕분에 서희는 새가슴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난폭한 운전을 야유하는 사람들의 클랙슨 소리가 귀가 찢어지도록 시끄럽게 들려왔다. “아저씨, 미쳤…….” 서희가 하고 싶었던 말이 다 나오지도 않았는데 동환이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서희의 잔소리를 들어주고 싶은 아량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읍!” 거칠게 입술을 밀어붙이는 동환 때문에 서희의 뒤통수가 창문에 부딪혔고 긴 머리카락들이 먼지쓸개처럼 창문을 닦고 있었다. 서희의 입술이 열려 있던 터라 기다림 없이 그녀의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을 수 있었던 동환은 성급하게 그녀를 탐했다. 연한 속살을 혀끝으로 샅샅이 훑고 오돌토돌 돌기가 나 있는 적당한 길이의 혀를 잡아끌어 자신의 입 속에 담았다. 한참 발버둥을 치며 반항하던 서희는 동환에게 양 팔목이 붙잡히고 나서야 모든 것을 체념하고 반항을 포기했다. 상상했던 것처럼 부드럽지는 않았지만 그와의 키스가 썩 나쁘지만도 않았다. 서희의 입술을 짓이기던 동환이 한참 후에야 입술을 떼어내자 서희가 아무 말도 없이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서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동환은 절망했다. 왜 얼굴이 붉어지지 않는 걸까. 그 남자 옆에서는 잘도 얼굴을 붉혔으면서. 키스까지 했는데, 어째서. 왜! “너 내 애인 해. 나 네 애인 할란다.” 화를 내고 싶은데 머리를 배신한 마음이 생각과는 다른 말을 내뱉게 만들었다. 입을 쩍 벌리고 다물지 못하는 서희의 앞에서 동환은 다시 그녀의 입술을 탐하기 위해 고개를 ?였다. 동환이 다시 키스를 시도하려는 순간, 무방비상태였던 서희는 가까스로 제정신을 되찾았다. 그리고 약간 힘이 풀어진 동환의 손아귀에서 팔목을 빼내어 양 손바닥으로 그의 입을 막아 밀쳐냈다. “아저씨가 먼저 어겼어요.” 하늘에서는 그저 비만 내리고 있을 뿐인데 동환의 머릿속에는 천둥번개가 쳤다. 탱탱한 입술에 윤기까지 흘러넘쳐 입술 주름조차 보이지 않는 그 앙증맞은 것으로 어쩌면 저리도 냉정한 말을 뱉어낼 수 있나. 성적인 것에 관해서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고 경험도 적지 않은 동환이다. 그의 키스 한 번에 스르르 녹아내리던 여자가 몇이던가? 그런데 서희는 키스의 잔재 따위는 전혀 남아 있지 않은 듯한, 거기다가 화까지 난 눈초리로 동환을 노려보고 있었다. “뭘?” 여전히 그녀를 향해 상체를 숙이고 있는 동환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밥 먹고 차 마시고 가끔 영화 보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없기로 했잖아요.” 그런 약속은 잊어주어도 괜찮은데. 아니, 잊어주었으면 고마웠을 텐데.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약속이라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그에 대한 배신감 때문일까? 서희가 탱탱한 입술 한 자락을 잘근잘근 씹어댄다. “그거야 네가 다른 남자 앞에서 얼굴 시뻘게지기 전의 얘기지.” 말로 내뱉으니 다시 화가 솟구친다. 키스를 해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는 꼬맹이가 대단하지도 않아 보이는 변변찮은 남자 옆에서 얼굴을 붉히다니. 구동환이 그 남자보다 못한 것이 뭐가 있다고. “내가 언제 얼굴이 시뻘게졌다고 그래요? 그리고 좀 빨개졌다고 쳐요. 그게 뭐 잘못됐어요?” 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고말고! 씨근덕거리는 서희를 보며 동환은 인상을 구겼다. 이 꼬맹이는 정말 모르나 보다. 남자가 관심 있어서 가볍게 시작해보자고 했으면 다른 남자 앞에서 얼굴을 붉히는 짓 같은 건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그리고 회사 사람이잖아요! 생각할수록 감당이 안 되네. 내일 회사 가서 실장님 얼굴을 어떻게 봐요? 아저씨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사회인이라구요!” 변명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면서도 서희는 화를 내면서 동시에 변명을 하고 있었다. 사실 자신을 챙겨주는 잘생긴 실장에게 혹한 건 맞다. 길거리 지나가는 여자 붙잡고 물어봐라. 그런 사람한테 혹하지 않을 사람 있는지. 저는 사회인이라고 바득바득 이를 가는 서희를 보며 동환은 한숨을 쉬었다. 누군들 그녀가 사회인이라는 것을 모를까? 아무리 어리게만 보여도 그녀는 엄연히 직장생활을 하는 사회인이다. 그리고 동환도 자신의 대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상사의 눈치를 보거나, 회사에 이상한 소문이 돌지는 않을까 걱정을 해본 적이 없는 동환이다. 하지만 그도 자신의 사업체를 꾸리기 전까지는 회사에 소속되어 있던 직장인이었다. 서희보다 몇 년은 더 앞서 사회라는 큰 바다에 몸을 담근 사람이란 말이다. 질투에 눈이 멀면 사람이 미친다더니 그 말이 딱 맞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낯선 남자의 옆에서 수줍게 웃고 있는 서희를 보자 눈이 뒤집혔다. 자기 것을 빼앗길 듯한 위협을 느껴서 되는대로 행동했다. 서희가 곤란해 질 것이나 회사 생활이 어려워 질 것을 눈곱만큼도 배려하지 않았다. 동환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건 그것 하나였다. 서희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은 것. “아저씨가 약속 어겼으니까 가볍게 시작하는 것도 쫑, 책임지겠다는 것도 쫑! 이번엔 억지 부려도 안 통해요.” 누구 마음대로! 대놓고 강경하게 나오는 서희 때문에 동환의 분노가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을 정도로 상향했다. “너, 아직도 내가 싫어?” 얼굴만 쑤욱 서희의 눈앞에 들이댄 동환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물었다. 이번에도 싫다고 한다면 꿀밤 한대 정도는 쥐어박으리라 결심하면서. 한 번도 동환의 얼굴을 가까이서 본 적이 없던 서희인지라 그녀의 당황스러움은 극에 달해 있었다. 그의 새까만 홍채가 물기를 머금으면 굉장히 섹시할 것 같았다. 머리카락에서 솔솔 풍겨지는 샴푸 냄새와 동생과는 지극히 다른 애프터 셰이프의 싸한 향기가 서희를 휘감았다. 조금 전까지 그녀의 입술에 붙어 있던 동환의 입술은 야들야들해 보여서, 손가락으로 쓸어보고 싶어질 정도였다 “대답해. 내가 싫으냐고.” 재촉하는 동환의 앞에서 서희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도망칠 공간이 없었다. 앞에는 동환이 가로막고 있고 뒤는 튼튼한 차 문짝이 버티고 서 있으니 어디로 가리오. “시…… 시…….” 싫다고 말하려는데 입술이 안 떨어진다. 이상하다. 아직도 싫은 것 같은데 왜 싫다는 말이 안 나올까? “싫어?” 고작 ‘시’자만 겨우겨우 내뱉었을 뿐인데 동환이 눈에 힘을 팍 주고 되물었다. “누, 누가 싫댔어요!” 말을 뱉어놓고 서희는 제 손으로 제 입을 막아버렸다. 싫다고 말했어야 사디스트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생뚱맞게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새 됐다. 서희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동환이 눈에 주었던 힘을 풀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좋아?” 산 넘어 산이라더니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싫으냐는 질문에서 해방된 자유도 잠시, 곧 이상한 대답을 내뱉어버린 것에 새 됐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좋으냐는 질문까지 합세하니 서희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모르겠는데요.” 제대로 된 대답을 하고자 뇌를 비틀어 짜내어 겨우 고른 말이 모르겠다는 말이다. 서희는 동환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옆으로 젖히고 손톱을 물어뜯었다. 사실 서희 본인도 동환이 싫은 것인지, 좋은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처음에는 죽도록 싫었는데 이제 그 정도는 아니다. 더 깊게 생각해보니 그 정도가 아닌 게 아니라 아주 가끔 동환이 신경 쓰이고 그를 앞에 두고서 야릇한 상상을 하는 것을 보니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