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우의 이러한 문제 설정에 기대어 최근 한국시의 진리-사건으로 간주할 수 있을 ‘미래파’와 ‘정치시’를 검토해 본다면, 이들 내부에 주름진 시와 철학의 다양한 문제들을 새롭게 포착할 수 있는 혜안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시, 수학, 사랑, 정치”라는 “네 가지 유적 조건들”을 통해서만 “공백으로서의 진리”가 나타나며, 철학은 “진리를 생산할 수 없”을뿐더러, 단지 이들의 관계를 “연산하는 것”일 뿐이라고 전제하는 그의 특유한 “진리 사유”에 비추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를 통해, ‘미래파’와 ‘정치시’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한국시의 여러 문제를 현장 비평의 근시안적인 테두리를 넘어 좀 더 넓고 깊은 차원에서 조망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될 것으로 추론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시와 철학이 맺어 온 공존과 경쟁의 지력선들, 그것이 꼴 짓는 지성사의 주요 매듭들을 참조하여 ‘미래파’와 ‘정치시’에 관한 다양한 문제들을 되짚어 볼 수 있을뿐더러, 그것이 차지하는 위상과 의의를 고고학적 차원에서 적확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시와 진리-사건들-미래파와 정치시」중에서
예술에서 진리를 생산하는 것은 특정한 하나의 작품이나 작가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사건이 불러일으키는 단절이자 이로부터 시작되는 예술적 짜임(an artistic configuration)이다. 예술적 짜임은 “전적으로 해당 예술 내부에서 그 기간이 그 예술의 하나의 진리, 하나의 예술 진리를 만들어 낸다고 말할 수 있는 단위”라는 말로 서술된다는 맥락을 살피면, 바디우는 특정 시기를 가로지르는 예술작품들의 상호 공명과 침투, 나아가 그것들이 함께 형성하는 어떤 미학적 배치와 성좌에 주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예술이 산출하는 진리란 그 내재성의 차원에서 형성되는 명명 불가능한 어떤 사건, 곧 새롭게 나타난 특이성과 그 관계의 그물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이러한 바디우의 관점을 따른다면, 2000년대 한국시에서 나타났던 주요 현상들 가운데서 ‘미래파’와 ‘정치시’라는 말로 명명되었던 그 새로운 흐름과 배치들에 대해 사건의 지위를 부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 시의 예술적 짜임과 미학적 고원들-이원, 장석원, 이영광, 진은영의 시」중에서
‘엑세이떼(hecceite)’, 그것은 본래 둔스 스코투스가 사용했던 말이지만, 들뢰즈는 주체나 사물의 개체성과는 다른 사건의 개체성을 표현하기 위한 말로 다시 활용하고자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이 어느 날, 어느 계절, 어떤 사건의 개별성인가? 더 길거나 더 짧은 하루는 정확히 말해서 연장이 아니라, 연장에 고유한 정도들이다. 그것은 마치 열과 색깔 등에 고유한 정도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우연한 형태는 합성 가능한 수많은 개체화에 의해 구축되는 위도를 가지고 있다. 하나의 정도, 하나의 강도는 다른 정도들이나 강도들과 합성되어 또 다른 개체를 형성하게 되는 하나의 개체이자 사건적 개체성(hecceite)이다.” 이에 따르면 ‘엑세이떼’, 곧 사건적 개체성이란 결국 주체와 대상을 둘러싸고 있었던 계절과 기후, 대기의 음영과 공간의 분위기, 나아가 그 상황을 둘러싸고 있었던 모든 감응의 형세와 강도와 밀도 등이 다 함께 어우러진 어떤 장면이자 그것을 불러일으켰던 무수한 힘들의 얽힘과 움직임을 일컫는다.
---「들뢰즈와 한국시의 진리-사건들-이장욱, 신해욱, 장석원, 노춘기, 이현승의 시」중에서
더 나아가, 이와 같은 지속성은 “(문화적) 파열 지점의 역사적 사건 속에서 출현”하거나 “역사의 불연속성 속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김혜순의 작업에서 새롭게 규정되고 있는 “여성성”과 “죽음”이 특정한 문화적?민족적?사회적 정체성이나 그 안정성의 테두리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진리-사건, 기존의 의미 체계를 공백으로 만들어 버리는, 다른 보편성의 현현 과정 자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달리 말해, 저 현현 과정이 불러일으키는 진리-사건의 보편적인 감응(感應) 현상과 이를 충실하게 이행하려는 실천의 지속성을 통해서만, 김혜순의 보편주의를 표상하는 “여성성”과 “죽음”은 비로소 세상 속에 정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하기, 사랑과 죽음 사이에서-김혜순의 시집과 다른 보편주의를 위하여」중에서
나희덕의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은 그의 첫 시집 [뿌리에게]나 두 번째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의 중핵을 이루었던 부드럽고 연한 흙의 상상력, 또는 대지적 모성의 수용력이라는 주제 의식과는 전혀 다른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인의 태생적 체질이라 부를 수밖에 없을 저 모성적 수용력이 좀 더 섬세해지고 민감해지고 첨예해진 그 시간의 깊이 속에서 건져 올려진 투명한 보석과도 같은 광채를 내뿜는다.
---「치명적 애착의 리듬, 정치시의 야릇한 시작-나희덕과 진은영의 시집」중에서
이른바 리얼리즘의 승리란 바로 저 생생한 감각적 장면들이 여백의 공간 곳곳에서 환기하는 생동감과 비애감을 일컫는다. 그렇다. 리얼리즘이란 어떤 이념적 강령의 선명성이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사유 모델에서 비롯하는 것일 수 없다. 그것의 정수는 무엇보다도 먼저,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상황 그 자체가 만드는 어떤 사건들과 장면들에서 움트며, 그 사건들과 장면들을 둘러싼 서로 다른 여러 힘의 배치를 통찰할 수 있는 섬세한 안목과 직관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어진내에 두고 온 나」는 “스무 해 도망쳐 왔”던 시인 자신의 일상적 감각의 세부에서 “인천 갈산동 그 쪽방에는 연탄보다 번개탄을 더 많이 사는 어린 소녀”의 현재를 떠올리고 이들을 겹쳐 울리게 함으로써, 지금-여기서 이루어지고 있는 민중?노동자의 생활세계가 “스무 해” 전의 상황에서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는 역사적 진실의 한 장면을 포착하는 성취를 이룬다고 하겠다.
---「리얼리즘의 승리, 한국 노동시의 진화-일과 시 동인 시집 [못난 시인]」중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언어와 국가, 인종과 민족이라는 경계와 차이를 넘어서, 가난과 신체적 고통이라는 현실적 상황, 또한 신체 감각과 미적 감성의 공명이라는 차원이 어떻게 각각의 개인들을 하나의 동일자, 달리 말해 도래하는 동일성의 주체로 만들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수자는 현실의 무수한 표준적 척도나 공리, 고정된 지식과 가치의 체계로부터 이탈해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사건과 진리의 과정과 충실성이라는 진리의 윤리학의 세 가지 핵심적 차원을 모두 관통할 수 있는 주체로 기능할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우리가 저들과 똑같은 소수자-되기를 수행할 수 있을 때, 외국인 이주노동자들과 진정으로 교감할 수 있는 동일성의 시간은 도래할 수 있으며, 그야말로 새로운 보편주의가 정립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정립의 과정에서 우리는 진리의 윤리학을 일관되게 실천할 수 있는 주체로 우리 자신을 변환시킬 수 있을 것이 틀림없다.
---「디아스포라, 다른 보편주의를 위하여-하종오와 한명희의 시」중에서
이들은 시의 전통적인 미감으로 표상되어 온 절제와 여백의 수사법을 통해 함축성의 밀도가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암시의 깊이를 극대화하려는 이미지들을 펼쳐 놓는다. 이들의 시에서 형태론적 안정감과 더불어 전통적 미감에 가까운 감각적 형상들이 곳곳에서 나타나는 현상 역시 이와 같다. 따라서 황인찬과 이우성의 시가 하나의 미학적 고원을 이루어 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 과장된 표현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또한 분명하게 다른 자기 고유성을 가진다. 황인찬의 시를 이우성의 시와 섬세하게 갈라낼 수 있는 변곡점은 “죄악감”이라는 말에 주름진 무시무시한 윤리학적 비전에 있다.
---「우리 시대 시의 예술적 짜임과 미학적 고원들 Ⅱ-이우성과 황인찬의 시」중에서
시인은 모든 문학 장르의 분화와 규범과 관행을 넘어서 그 모든 문학적 글쓰기가 서로 넘나들고 얽혀 들 수 있는 새로운 문장을 실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전부터 에세이라고 일컬어져 왔다는 점에서, [농경시]가 행한 과감한 시도는 새로운 문장의 창안이 아니라 일종의 문학적 원형으로서 에세이를 가정하고서, 이를 되살리려는 복고풍의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시집에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감각적인 우리말들과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 고전 한자어들이 한 문장 안에서 서로를 보고 마주 앉게 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을 이룬다. 달리 말해, 우리말과 한자어, 고대어와 현대어, 감각적인 비유어와 사변적인 개념어, 종교적인 광휘로 휘감겨 있는 말들과 그로테스크의 음영을 뿜어내고 있는 말들이 하나의 문장 안으로 얽혀 든다는 것이다.
---「실재를 현시하려는 시적 언어의 모험들-신동옥, 박장호, 김근, 김경주, 조연호의 시집」중에서
이 시집의 근원적인 벡터는 미래로 던져진 다른 삶의 충동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며, 과거에 붙들린 처연한 기억의 휘날림에서 비롯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여기, 그저 그렇게 굳어져 버린 연기(緣起)의 사슬을 정지시켜 충만한 현재 속에서 다시 생생하게 살아나는 미감의 생동성으로 뒤바꾸려는 것일 뿐이다. 바로 이 자리에서 시인 최정례의 미증유의 문장과 예술적 영감이 움터 오른다.
---「실재의 흔적, 낯선 시간의 주름들-김혜순, 최정례, 조동범, 이승원, 김안의 시집」중에서
알랭 바디우의 말처럼, 상황의 진리와 그 진리의 충실성은 그 상황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모든 존재에게 끊임없이 말 건네어지는 보편성(universality)([사도 바울])을 도래하도록 강제할 것이 틀림없다. 시인의 진리에 대한 사랑은 그에게 그 사랑의 이름 아래서 “지친 새들”이든, “놀러 나온 아이”이든, “장기 휴직 중인 나”이든, 그 모든 존재에게 말 건네어지는 진리의 보편성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모든 진리의 전투적 차원인 보편주의의 물질성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시인 이영광은 이와 같은 진리의 윤리학과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자신의 시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지독한 운명임을 이 작품의 종결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이미지로 그린다. “목숨 하나 달랑 들고 참전 중이었으니/아픈 천국의 퀭한 원주민이었으니”.
---「시, 진리들의 윤리학-황성희, 김원경, 이영광의 시」중에서
벤야민의 별자리 사유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 시집은 감각의 미시사와 사회의 거시사가 동시에 울리는 교향악의 무늬를 빚기 위하여 각각의 시편들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는 마치 반향의 거울 같은 것들로 조형해야 했을 것이다. 아니, 우리가 “몸”으로 겪어 내야만 했던 그 “투명한” 감각의 울림과 떨림의 자리를 지금 우리 곁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것으로 되살려 내기 위하여 몇 편의 시편에서 “가상현실”이라는 메타포로 치환된 “수”와 “언어”를 비롯한 모든 기호 체계의 “껍질”을 벗겨 내려고 분투했을 것이 자명하다. 이 분투의 과정에는 시인이 간직하고 있는 방대한 지식의 정보와 두께, 그리고 그 자신의 기억에 아로새겨진 숱한 감각의 형상들이 함께 누적되면서 엇물려 있다.
---「감각적 실존의 사회사, 소극적 수용의 윤리학-김정환과 박철의 시집」중에서
시인 이원은 우리 사회가 최근 겪어 낼 수밖에 없었던 저 통곡의 “바다”, 그 깊고 깊은 심연의 자리에서 우리 “아이들”로부터 다시 돋아날 천진함의 “날개”를 미리 예감하고 촉진하는 “사랑”의 전위투사(le clandestin)로 살아가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달리 말해, 시인은 나날의 삶의 미시적인 차원들을 오가고 넘나드는 무수한 실존의 살(la chair), 그 온몸의 느낌과 생생한 직관들의 낱낱을 어루만지고 북돋으려는 감응의 전위투사일 수밖에 없으리라.
---「필경사의 에티카, 감응의 전위투사-이원의 시」중에서
이 시집의 알레고리가 값질 수밖에 없는 까닭 역시 저토록 자잘한 이야기들의 향연, 그 마디마디에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달리 말해, 김윤이의 알레고리가 품은 매력과 위상은 자기 실존의 찢김을 정직하게 대면하면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서려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버둥거리는 자리에서 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실존적 맥락을 품고 있지 않은 그저 그런 형식 실험으로서의 알레고리란, 재빠른 유행이나 뒤쫓다 사라질 또 다른 상투성에 지나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김윤이의 알레고리 이미지들이 다소 장황하고 수다스러운 내러티브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된 광휘를 내뿜을 수밖에 없는 까닭 역시 자신의 처절한 실존의 그늘을 필사적으로 대면하려는 자리에서 온다. 그리하여, 저 그늘마저도 “사랑”할 수 있는 운명애로 나아가려는 자리, 그 지독한 희망의 감각을 되찾으려는 몸부림의 시간에서 온다.
---「샤먼의 고고학, 사랑의 천수관세음-김윤이 시집 [다시없을 말]」중에서
안주철의 시집 [다음 생에 할 일들]은 자기 생에 덧씌워진 운명선의 질곡과 용맹하게 마주친 자의 헐벗은 마음결과 짓무른 몸뚱이를 고스란히 내보인다. 이는 매우 예외적일 수밖에 없을 시인의 가족사의 내력, 또는 그 운명의 대물림에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저 내력과 대물림은 니체가 말했던 원한과 운명애의 처절한 긴장 관계, 곧 영원회귀의 내면적 드라마가 빼곡하게 들어찬 실천의 벡터로 그를 이끌고 간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이 시집은 자신의 가족사를 향한 원한의 감정들을 바닥까지 밀고 가 그 끄트머리에서 운명애에 가까스로 다다른 자의 고단한 숨결과 헐떡이는 몸짓으로 얼룩져 있다. 그것은 한없이 처연하고 안쓰럽다.
---「운명애의 얼굴들, 낯선 시간의 전경화-안주철과 정영효의 시집」중에서
“길거리에 마구 내뱉어진 내가 돌아갈 집은 헛된 망상처럼 높고 반듯하고 분명합니다”라는 마지막 편린은 일상적 생활 감각과 정치적 실천 행동 사이에서 끊임없이 뒤척거리면서, 윤리적 불면의 밤을 겪어 낼 수밖에 없었던 자의 실존의 곤경과 내면의 고통을 역설적으로 부각시킨다. 고통스럽지 않은 것, 고통이 없는 것은 결코 윤리적일 수 없다는 ‘고통의 윤리학’의 참된 광휘와 가공할 위력은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가장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사건들을 통해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나날의 삶에서 감각의 살갗으로 휘날려 오는 타인의 고통을 마치 제 것처럼 앓아 내는 실천적 이행의 순간에만 번뜩이며 현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시인이 창안하고 줄곧 진화시켜 온 제유법과 콜라주의 교향악, 카오스모스의 시학 역시 세계에 무수히 존재하는 타인들의 고통, 그 진실의 속살들을 어루만지려는 그녀의 윤리학적 비전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인칭의 세계, 잠재적 사건들의 콜라주-이근화의 시」중에서
들뢰즈가 펼친 저 소수자의 미학과 정치학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장석원의 자유간접화법 또한 잘 빚어진 항아리(The well wrought Urn)라는 말로 표상되어 온 “명확한 언어라는 모조품”, 곧 부르주아 미학의 유기적 총체성과 작품 내적 통일성이라는 미학적 규준과 척도에 구멍을 뚫어 버리는 단절을 행사했다. 또한 이질적 언어들의 낯선 조합과 병치를 통해 질퍽거리면서도 격렬하게 요동치는 기괴한 이미지의 리듬을 창출했다. 달리 말해, 2000년대 이전의 한국시에서 미학적 표준이자 다수자(majorite)의 지위를 차지했던, 곧 여백과 압축으로 단단하게 벼려진 균제미의 이미지들과 고유한 내면적 미감으로서의 심혼의 독창성으로 표상되는 저 완강한 서정의 미학적 테두리를 해체-재구축하는 소수자의 미학과 정치학을 실천했던 셈이다. 그는 자신이 용맹하게 구축하는 자유간접화법이라는 새로운 이미지 지력선이 들뢰즈의 소수자의 정치학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는, 따라서 같은 운명의 테두리로 에둘러져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명료하게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아니, 장석원은 여전히 자유간접화법을 예술적 심부의 불꽃이자 이미지 조각술의 중핵으로 삼으려는 마조히스트의 미친 몸짓을 품을 수밖에 없는 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비-찾기와 아비-되기, 그 파열과 곤욕의 리듬-장석원의 시」중에서
[필]을 이전의 시집들과는 전혀 다른 미감을 함축한 것으로 이끄는 것은, 똑같은 제목으로 이루어진 40편의 「필」이라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어야만 한다. 나아가 이들의 공분모를 형성하는 것은 단형시의 형태이자 아름답게 절제된 침묵의 미감이란 사실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해야만 하리라. 아니, 이번 시집의 예술적 중핵으로 자리한 여백의 미감과 무언의 움직임이 불러일으키는 보이지 않는 ‘감응의 빛살’을 온몸으로 느껴야만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마저 다시 아이러니의 미궁으로 빠뜨려 버리는 창조적 아이러니, 그 아이러니의 아이러니가 불러오는 예술적 추동력을 오랫동안 되짚어 보아야만 할 것이다.
---「기억의 습작, 또는 창조적 아이러니를 위하여-채상우의 시집」중에서
김민정의 세 번째 시집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에는 지난 두 권의 시집을 도드라진 윤곽으로 곧추세웠던 욕설과 비속어, 육두문자와 장광설이 아이들이 신이 나서 터뜨리는 폭죽처럼 활달한 뉘앙스로 흩뿌려져 있다. 또한 이 시집의 앞머리에 들어선 몇몇 시편들은 제 일상의 속살을 과감하게 노출하는 밀착인화의 기법과 극사실주의 방법론을 도입함으로써, 그 사실성의 무늬들을 전위적 예술성의 형상들로 변신시킨다. 바로 이 자리에서 시인 김민정만의 독특한 예술적 마력과 과격한 실험성이 동시에 빛을 발한다. 이 마력과 실험성은 시적인 것을 어떤 특별한 삶의 순간들에서 찾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나날의 안정된 삶의 질서들 곳곳에 들어박힌 비루하고 끔찍하고 권태로운 형상들 속에서 빚으려는 그녀의 고유한 미학적 자의식과 이미지 조각술에서 비롯한다.
---「미학들, 세계로 열린 창문들-김민정과 이근화의 시집」중에서
이 시집의 거죽을 타고 흐르는 기괴한 형상과 이상야릇한 목소리와 이질적인 무늬들의 현란한 엇붙임은 현대 세계에서 시인이 자처할 수밖에 없을 “외계인”의 운명을 알레고리 기법으로 표현한 것이 분명하다. 시인과 시가 거느릴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마조히즘의 자취, 나아가 자신의 시에 대한 병적인 애착과 그 뒷면에 깃들일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불안의 그림자는, 김상혁이라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시인이라는 일반명사가 품을 수밖에 없을 운명의 질곡이자 그 감각의 속살에 해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음악적 순수추상, 자유간접화법의 모자이크-신동옥과 김상혁의 시집」중에서
이들이 집약하고 있는 것처럼, 이 시집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전생과 귀기와 운명론과 이를 응축한 도상학적 이미지들은 시인이 처한 비루한 생활의 현장들을 넘어서려는 몸부림에서 기원하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시와 예술이란 지금-여기, 현실의 세부를 뒤덮는 비루하고 황폐한 생활을 바닥까지 들여다보려는 진리의 윤리학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지극히 자명한 일일 터이다. 그러나 그 현실을 넘어서 “고래가 되는 꿈”이란 이 시집의 표제어로 상징되는 기원과 소망과 이상향의 세계에 대한 원초적 충동과 상상력에서 비롯한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따라서 지금-여기, 기정사실의 세계를 구성하는 온갖 억압과 부조리를 넘어서 더 나은 삶과 다른 미래로 나아가려는 우리 모두의 간절한 욕구와 상상력이야말로 시와 예술의 가장 근본적인 태반을 이룰 것이 틀림없다.
---「예술적 가상의 황홀경, 도상학적 운명론의 현시-신동옥의 시집」중에서
[그 숲에서 당신을 만날까]는 지난 시집들에서 신영배가 줄곧 시도해 온 여성적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시 쓰기의 세계를 좀 더 드넓은 차원에서 완성한다. 그것은 투명한 시선으로 나타나진 않지만, 세계의 저변을 가로지르는 무수한 존재의 흐름이나 보이지 않는 흔적들, 나아가 “환청” “그림동화” “마술” “신화” 같은 시어들로 표상되는 환상과 주술의 세계를 여성적인 것의 범주로 재분류하여 그 존재론적 깊이를 고스란히 되살리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아직 현실로 도래하지 않은 잠재적인 것과 무수한 소멸의 이미지들, 나아가 시뮬라크르 현상들마저도 시인이 새롭게 재편하는 여성성의 우주로 수용하려는 자리에서 기원하는 것이라 하겠다.
---「여성적인 것의 숨결과 살갗-신영배의 시집」중에서
「다면체」의 “그렇다면 내 감정은 어디에 있는 걸까”, “후회나 그리움이나 저주도 결국 다면체의 일부인지라” 같은 구절들이 흩뿌려 놓는 묵시적 감응 효과들을 다시 온몸으로 느껴 볼 필요가 있겠다. 이 시편이 선명하게 표상하는 것처럼, 이세화의 시는 서정적 1인칭의 확고부동한 “감정”이나 사유가 아니라, 도리어 이러한 1인칭 주체의 전면을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타자들, 그 “다면체”에 제 미학적 정수를 드리우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서정」은 제목과는 정반대로, 시인의 몸을 “헤집고 다니는” “수많은 벌레들”과 “내 안에 온 세상 아래로” 저토록 “매운 꽃이 핀다”는 황폐한 진실들과 정직하게 마주칠 수 있는 진리 주체의 윤리학적 면모들을 충실하게 갖추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다중 초점의 풍경들-이세화의 시집」중에서
만일 그대가 장석원의 시를 오랫동안 즐겨 읽고 사랑해 온 사람이라면, 앞서 살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수반할 수밖에 없을 ‘생사를 건 투쟁(Kampf auf Leben und Tod bewahren)’으로 인해, 근심 어린 표정을 짓거나 낙담하는 느낌을 가슴에 품진 않아도 좋을 듯하다. 앞부분에 인용한 「Temps fugit, amor manet」의 표제어이자, ‘시간은 흘러도 사랑은 남는다’로 번역될 수 있을 저 라틴어가 넌지시 일러 주듯, 시인은 그것을 “사랑은, 끝나지 않았네”라는 시어로 다시 옮겨 놓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푸른 들판에 온통 그 사람이 들어찬다”라는 지긋지긋한 자신의 미련과 회귀의 감정을 두렵게 토로하면서도, 시인은 끝끝내 “그 사람”과의 “사랑”이 다시 이어지기를 바라는 지극한 순애보의 주인공일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더 나아가, 저 순애보조차 겉으로 내비치는 것이 부끄러워, “우리의 고통 때문에 최후의 죄와 벌이 완성된다”(「망질(望秩)」), “열렸다 닫히는 눈꺼풀, 단심(丹心), 으깨진다.”(「이별 후의 이별」)라는 말로 표상되는 위악(僞惡)의 페르소나를 취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에.
---「아뇩다라 삼먁 삼보리(阿?多羅 三? 三菩提)를 찾는 고행의 길 위에서-장석원 시집 [유루 무루]를 중심으로」중에서
홍신선의 시집 [가을 근방 가재골]은 언젠가부터 두드러진 형세와 윤곽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불가(佛家)의 상상력이 그 전체를 아우르는 예술적 성좌(Konstellation)의 빛살로 쏟아져 내린다. 아니, 세상의 온갖 사물들에 감춰진 광명변조(光明遍照)의 자취를 보고 듣고 어루만지려는 심상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이는 “갖가지 자연현상들을 무슨 경전처럼 받들고 읽었다”라는 「시인의 말」에서부터 이미 엿보이거니와, 당대(唐代) 조사선(祖師禪) 어록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두두물물(頭頭物物), 그것에 주름진 “의미와 값”을 더불어 살고 있을 “가재골”에서의 마음 풍경은 이 시집 마디마디에 벼려진 화화초초(花花草草)의 만상을 낳는 이미지의 터전이자 동역학의 불꽃으로 깃든다.
---「두두물물 화화초초(頭頭物物 花花草草)와 더불어 사는 일-홍신선 시집 [가을 근방 가재골]」중에서
김추인의 시집 [해일]은 인간의 학명을 뜻하는 “HOMO”에 다양한 라틴어 어사를 조합한 시 작품의 부제(副題)들을 잇달아 제시함으로써, 인류학적 성찰의 깊이를 은은하게 현시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부드럽게 강제한다. 이는 시인의 마음결 한복판에 어진 성품과 다감한 기질이 밝은 빛살처럼 아롱져 있음을 넌지시 일러 준다. 나아가 인(仁) 또는 자비(慈悲)라는 말로 일컬어져 온, 다른 사람을 측은하게 바라보며 사랑의 마음으로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거나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만인의 괴로움을 없애 주려는, 갸륵한 기운과 마음 씀씀이가 시인의 나날의 몸에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배어 있다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더불어 사랑하며 시를 짓는 일의 아름다움-김추인 시집 [해일]」중에서
정지용 시를 둘러싼 제반 자료들에 대한 실증적 고증 작업과 통계 분석을 통해, 그 배면에 깃든 의미론적 자질과 미학적 방법, 문학사적 지력선의 숨겨진 맥락들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이미 정지용 연구사를 총체적으로 포괄할 수 있는 결정판의 풍모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 책이 품은 진정한 의의는, 실증적 고증과 객관적 통계 분석을 근본 바탕으로 삼으면서도, 겉면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문학 주체들의 마음결과 내면 풍경을 유추하고 상상하는 자리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달리 말해, 이 책에 담긴 저자의 빼어난 감각적 직관과 문학적 상상력은 정지용 당대의 문학 현장 속에서 마치 그 내밀한 속살을 어루만지는 듯한 실감을 우리에게 선사한다는 것이다.
---「고고학적 실증성과 문학적 상상력의 감각적 조화-최동호의 [정지용 시와 비평의 고고학]」중에서
루카치가 오랫동안 천착했던 미학적 방법으로서의 리얼리즘(realism)과 더불어, 자끄 라깡의 정신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 가운데 하나를 이루는 실재(the Real)의 공분모와 차이를 부단히 탐구하면서 리얼리즘의 새로운 이론적 모델을 구상해 볼 필요가 있을 듯 보인다. 어쩌면 이들의 공분모와 차이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와 새로운 해석은 미래 사회에 다시 새롭게 태어날, 전혀 다른 스타일의 리얼리즘을 생성하고 창안하는 기반을 제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만, 리얼리즘은 문학과 예술의 고정된 미학적 이념이 아니라 오히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사실성에 충실하게 천착하면서도, 법고창신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발산할 수 있는 생성과 변혁의 원천으로 자리할 것이 틀림없다.
---「리얼리즘 재구성을 위한 한 비평가의 고백록」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