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미래에게 최선은 무엇이었을까?
미래가 원하는 사랑은 각자의 자리를, 특히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누군가의 소유가 되고 싶지도, 누군가를 소유하고 싶지도 않았다.
고등학생 때 처음으로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수줍게 건넨 편지에 꾹꾹 눌러 쓴 ‘넌 내 꺼야!’라는 말을 보고 미래는 살짝 소름이 돋았다. 차근히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생리적인 반응처럼 마음이 싹 식었다.
이후 자연히 그 남자친구와는 사이가 멀어지게 됐는데, 몇 년이 지나고 다시 생각해 봤을 때는 그 마음도 이해가 되긴 했다. 생애 첫 여자친구에게 세상에서 제일 로맨틱한 말을 해주고 싶었겠지.
그래서 미디어와 문화를 통해 학습된 말을 기계처럼 옮겨 적은 것뿐일 것이다.
--- p.9-10
“당연히 괜찮죠! 시원이가 미래 씨를 좋아한다고 해서 나를 안 좋아하는 게 아니고, 우리 사이는 변함이 없을 건데, 제가 안 괜찮을 이유가 뭐가 있어요? 그게 저희가 오픈 릴레이션십을 한다는 말의 의미인데요.”
“아…?”
“하, 미래 씨, 진짜 이거 너무 좋지 않아요??”
“…네?”
그러게, 누가 누굴 짠해해?
미래는 새삼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다. 얄짤없는 이 구역의 뉴비.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데요, 오픈 릴레이션십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이 사람하고 오래 만나고 싶어서 하는 거죠.”
“어어…. 그… 그런가요?”
--- p.71
남성들이 여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척하는 제스처를 하는 것은 연애의 흔한 클리셰 중에 하나다. 그런 남성은 대체로 귀엽고 낭만적으로 보이고, 무엇보다 그 순간만큼은 상대 여성에 비해 약자로 보인다. 자신이 진짜로 좋아하는 것을 숨기면서까지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 하는 노력이 애처롭고 가상하게 포장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미래에겐 그런 노력이 그렇게 귀여워 보이지가 않았다. 우선 그것은 명백히 목적이 있는 행동이다.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한 일종의 전략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과정을 통해 여성의 마음을 얻고 나면, 잠시 남성이 약자처럼 보였던 균형은 놀랍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수평이 되고, 계속해서 여성이 ‘까다롭게’ 굴지 않는 한, 너무 쉽게 남성에게 주도권이 흘러간다.
--- p.185
“저도 소리랑 만났을 때 미래 씨 생각이 나기도 했어요. 어떤 기분으로 지내고 있을지도 궁금했고. 혹시 지금 힘들진 않을까. 더 빨리 물어봤으면 좋았을 텐데 제가 좀 늦었네요.”
“아니에요. 참, 사실 저 지난 주말에 시원 씨가 추천해 준 드라마 조금 봤어요. 나름 재밌긴 했는데, 좀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있었거든요. 근데 그 얘길 하려면 제가 그날 혼자서 느낀 기분까지 다 얘길 해야 될 것 같아서… 말을 못 했어요.”
“아, 그랬구나. 얘기해 줘요, 언제든.”
시원이 조심스럽게 미래의 손을 꼭 잡았다가 놓았다. 미안함, 머쓱함, 고마움 같은 감정들이 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자 미래는 또 주책없이 시원이 조금 짠해졌다. 서로 다 알고 시작한 건데 시원이 미안할 일은 아니지 않나 생각했다가, 근데 또 그런 게 아닌 건 아닌가 생각했다가―어차피 답 없는 문제, 내가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역시 그가 미안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p.246
늘 이런저런 생각들을 주렁주렁 달고 사는 미래에게 전날 밤과 같은 상황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어제는 이전처럼 소리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이랄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이 기분에 몸을 맡기고 싶은 충동이 일렁였을 뿐이었다.
‘어쩌다 그랬을까―’ 하고 새삼 어제의 일진을 복기해 보니, 이렇게 다이내믹했던 날도 드물지 싶었다. 아침부터 사고 수습에 종일 시달리다, 밤엔 뜻밖의 지원군들 덕분에 잠시 기뻤는데 더더욱 뜻밖이었던 전 남친의 습격까지. 어쩌면 그래서, 그런 충동이 튀어나왔을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생각도 뭣도 하기 지쳐서. 그냥, 좀 이 스트레스와 피로들을 풀고 싶기도 했고.
어쩌면 잘된 일이었다. 아무래도 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계속 주저되는 영역이 있으면서도 그걸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아서.
--- p.296
하지만 언젠가 시원에게 물었을 때, 그가 대답한 말을 미래는 기억하고 있다.
그 용기는 내 안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상대가 주는 거라고. 미래 씨가 준 용기라고.
그러니까 언젠가 때가 되면, 그런 용기를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날도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타이밍이 있고, 각자에게 최선인 로맨스가 있을 테니까. 그러니 벌써부터 그런 불안을 갖지는 않기로 한다. 그 대신 지금은 마음속에서 조금씩 퍼지는 감정의 파동을 충분히 느껴보는 거다. 이런 순간은, 절대 흔하게 오지 않으니까.
--- p.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