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틈새를 비집는 대중서사의 유연한 상상력
“답을 찾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게 제 꿈입니다.”
여덟 살짜리 어린 용병이 꿈꾸던 답이 무엇인지, 마침내 그것을 찾았는지는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알 수 없다. 애당초 거대 역사는 답을 향해 가는 인간의 길이 얼마나 지난한가를 기록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소설 『역랑』은, 거슬러 밀려오는 시대의 물결에 온몸으로 맞섰던 사람과 삶의 못다 한 이야기다.
주인공은 실존하는 역사 인물이다. 사성賜姓(임금이 공신에게 내려준 성씨) 김해 김씨의 시조 김충선.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인가?’라는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에 대한 오래되고 끈질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정사正史인 『조선왕조실록』부터 확인한다. 실록에 그는 두 번 등장하는데, 「선조실록」에는 사야가沙也加로, 「인조실록」에는 김충선으로 나온다. 사야가와 김충선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은 영조 시절에야 『승정원일기』를 통해 공식적으로 밝혀지는데, 사후 120년이 지나도록 비밀이었던 까닭은 가족들의 안전 문제 때문이었으리라 추측된다. 이에 1798년(정조 22년)에 간행된 저서 『모하당집』을 더하여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정리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수록한 공식 기록은 다음과 같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가토 휘하의 좌선봉장으로 침입하였다가 경상좌병사 박진에게 귀순하였다. 그 뒤 경주·울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첨지의 직함을 받았으며, 정유재란 때는 손시로 등 항복한 왜장과 함께 의령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이러한 전공을 가상히 여긴 조정으로부터 가선대부를 제수받고, 이어서 도원수 권율, 어사 한준겸 등의 주청으로 성명을 하사받았으며 자헌대부에 승품되었다. (이하 생략)
역사의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사야가의 정체는 항왜降倭다. 항복한 일본인, 좁은 의미에서 임진왜란 때 조선에 투항해 조선군에 협조한 일본군을 가리킨다. 선조는 그에게 ‘충성스럽고 착한忠善’ 인물이라고 이름을 내려 주지만 일본의 평가는 정반대일 수밖에 없다. 배반자, 배신자, 역적, 매국노. 자신이 속한 나라나 집단을 등지고 남의 나라 혹은 집단에 이바지하는 존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했다.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할 때도, 파리에 비시 괴뢰 정권을 세울 때도 전장에는 러시아어와 프랑스어로 외치며 모국을 공격하는 자들이 있었다. 배반의 이유와 목적은 각각이지만 등 뒤에서 칼을 꽂고 총알을 날린 배반자에 대한 동족의 분노와 증오는 때로 적敵에 대한 그것보다 컸다.
그래서 김충선의 과거와 임진왜란 당시 행적은 일본과 조선 양국에서 불분명하고 확인하기에 쉽지 않다. 『역랑』은 바로 그 지점―공식 기록으로 남지 못한, 남길 수 없었던 충성과 배반의 가파른 틈새를 파고든다. 이미 전작 『광해, 왕이 된 남자』를 통해 확인된 주특기로, 작가는 기록된 역사에서 누락된 지점을 예리하게 포착한 후 대중서사의 과감한 상상력으로 확장시킨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는 네가 직접 결정해야 해. 너 이외의 다른 사람이 그것을 결정하게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작중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주인공에게 던지는 말이 곧 배반자인 동시에 충신이었던 모순된 운명에 대한 질문이다. 『역랑』이 그에 답하는 방식은 16세기 일본의 난세를 특별히 긴 명줄로 헤쳐 나온 조선인 고아의 극적인 운명이라는 전형적인 영웅담의 구성이다. 이방인인 주인공의 소외된 삶이 경계를 뛰어넘는 세계적 존재인 사랑을 만나지만, 시련과 고통 속에서 지켜낸 열망이 좌절되면서 마침내 고독한 영웅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박진감과 안정감을 주는 한편 이미 여러 작품에서 변주된 구조이다. 이에 대해 소설 『역랑』이 통속성을 이겨내는 방식은 취재와 묘사의 성실성과 정교함이다. 역사를 소재로 하는 작품들이 지켜야 할 기본 중의 기본임에도 흥미에 치우치거나 부주의로 놓치는 경우가 빈번한 부분이다. 우리는 임진왜란을 조선의 입장에서 보기에 익숙하지만 전국시대 마감 후 정명가도를 명분으로 내세워 조선으로 물밀었던 일본에 대한 이해도는 낮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광범한 이해와 일본인들이 숭상하는 호걸 3인을 둘러싼 투쟁담, 병법과 전술과 무기의 디테일 등에서 작가가 치열하게 모색하고 오래 공들인 기색이 역력하다.
역사적 사실과 허구 사이의 줄타기는 언제나 아슬아슬하지만 작가는 시종일관 침착함을 놓치지 않고 있다. 오래 묵히고 깊이 생각한 흔적이다. 허구의 비중이 극대화된 가족의 비밀이나 최후의 복수 등에서 짐짓 영화와 게임의 장면이 떠오르지만, 학계의 상반된 의견이나 야사野史 등을 맞놓고 그 사이를 상상력으로 채우는 방식은 유연하고 능란하다 할 만하다.
내가 이 나라에 귀화한 것은 잘되기를 구함도 아니요, 명예를 취함도 아니다. 대개 처음부터 두 가지 계획이 있었으니, 그 하나는 요순 삼대의 유풍을 사모하여 동방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함이요, 또 하나는 자손을 예의의 나라에 남겨서 대대로 예의의 사람을 만들고자 함이라.
실제로 김충선이 『모하당집』의 「녹촌지」에서 밝힌 귀화의 까닭이다. 이것이 정말 어린 용병이 꿈꾸던 답일까? 소설은 답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것이다. 『역랑』은 문제적 인간인 김충선과 그를 새롭게 만나는 독자들에게 흥미롭고도 뜨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 김별아 (『미실』의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