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침전에서 파루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었다. 침전은 왕의 은밀한 공간이자 유일한 ‘사적 영역’이었다. 즉 침전에서 눈을 떠 침전의 문을 나서기까지는 사사로운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비교적 맘껏 누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파루와 함께 왕이 일어나는 순간부터 침전 주변 상궁과 궁궐 시녀들은 맡은 바 임무에 따라 정신없이 움직였다. 왕이 기침하는 순간 왕의 방 테두리의 작은 방들에서 숙직을 섰던 지밀상궁들이 들어와서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수라간에서는 왕의 아침 수라 준비로 요란하고 양치와 세수, 옷을 책임진 대전의 차비(差備, 담당자)들은 조금의 실수도 없도록 치밀한 준비를 갖춘다. 이때면 내시들도 침전 주변에 와서 혹시 있을지 모를 왕의 급명을 기다린다.---프롤로그 「왕의 하루를 찾아서」 중에서
나는 당한 것이 아니라 자초한 것이다. 내가 지존에 대한 꿈과 기대를 접은 지는 오래 되었다. 그날도 술 한 잔을 들고서 잠이 들었는데 3경 무렵(밤11시~1시) 승지들이 황급히 나를 깨웠다. 윤장, 조계형, 이우 세 사람이었다. 훗날 실록은 그 순간 나의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
“왕이 놀라 뛰어나와 승지의 손을 잡고 턱이 떨려 말을 못했다.”
웃기는 소리다. 내가 정말 권좌에 미련을 갖고 있었다면 군사부터 불러들였을 것이다. 그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느낌뿐이었다. 실록을 보니 세 승지의 모습은 잘 나와 있었다.
“이우 등 세 사람은 바깥 동정을 살핀다는 핑계를 대고 하나씩 흩어져 모두 수챗구멍으로 달아났는데, 더러는 실족해 뒷간에 빠진 자도 있었다.”
이런 자들의 증언으로 내가 턱이 떨려 말을 못했다는 식으로 정리했으니, 그 실록(實錄)이란 게 허록(虛錄) 아니던가?---제1부 2장 「허무가 불러온 파멸, 연산군 이융의 하루」 중에서
사흘이 지난 26일, 결국 나는 유언 한 자 못 남기고 외부와 격리된 채 지내다가 이승과 작별하고 말았다. 원통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의도가 있었다면 과연 누구의 뜻이었던 것인가? 진정 부왕께서는 다 아시고서도 정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자식이자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온몸을 던진 세자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말인가? 그것이 조금이라도 사실이라면 나는 어디에 대고 효를 다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그 후 아내 강빈과 아들들에게 가해진 일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분하고 원통하다!---제1부 4장 「사라진 강성대국의 꿈, 소현세자 이왕의 하루」 중에서
정조도 독살설에 휩싸였다. 특히 정조의 임종을 본 인물이 정순왕후 김씨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정순왕후는 영조의 계비로서 원비 정성왕후가 죽은 지 2년 후인 1759년(영조 35) 왕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행했다. 15세에 왕비가 되었지만 단호한 성품으로 궁중의 법도를 잡았고, 나이 많은 사도세자와 사이가 벌어져 그를 죽이는 배후 세력이 되었다. 영조 말년 권력을 누리던 정순왕후와 그 집안은 정조의 즉위로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었다. 정순왕후와 그의 아버지 김한구는 사도세자 제거에 적극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정리해보면 이전 국왕의 부인인 대비가 기존 세력과 연결되어 있다가 자신들의 뜻과 다른 인물이 왕좌를 잇게 되거나 왕이 되어 탄압을 가해올 때, 독살의 가능성이 자리한다.---제2부 2장 「군신 대립의 뿌리를 찾아서, 수양과 김종서와 한명회」 중에서
선조가 방계승통으로 왕위를 계승하면서 신하들 사이에는 크게 두 그룹이 생겨났다. 출신 여하를 막론하고 일단 임금은 임금이라는 동인과 임금으로 인정하기 곤란하다는 서인이었다. 이후 동인, 북인, 남인 등은 줄곧 친왕 노선을 견지한 반면 서인, 노론(소론은 친왕론), 벽파(시파는 친왕론)는 일관되게 반왕 노선을 견지했다. 서인들은 선조 이후 종묘의 기능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반면 문묘는 공자를 비롯한 5성(五聖,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로부터 공문십철(공자의 뛰어난 열 제자)과 송나라 때의 주자학자 6명을 기리면서, 동시에 신라의 설총과 최치원에서 고려의 안향과 정몽주 그리고 조선의 유학자들을 모시는 곳이었다. 따라서 서인들은 종묘보다는 문묘에 배향되는 것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했고, 당파의 문묘 배향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거는 적극성을 보이게 되었다.---제2부 4장 「공자는 군주를 초월한다, 서인과 문묘 배향」 중에서
다시 문제의 1762년(영조 38)이다. 세자가 반란을 도모한다는 밀고가 올라왔던 5월 22일부터 세자의 시민당 뜰 대명(待命)이 시작됐다. 더운 여름날 세자의 대명은 20일 가까이 계속됐다. 실록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세자빈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따르면 영조가 최종적으로 세자를 죽여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윤5월 11일 세자의 ‘영조 암살 미수 사건’ 때문으로 보인다. 이날 밤 세자는 영조가 머물고 있던 경희궁으로 들어가기 위해 수구(水口)로 들어가려다가 몸이 비대해서 온몸에 상처만 입고 돌아왔다.
---제3부 5장 「권력 앞에 선 아버지와 아들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