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젊은 시절에는 노후를 대비한답시고 젊음을 양보하고, 노인이 되어서는 젊은 날을 후회하거나 질투하며 그때가 좋았지, 혀를 차는 그런 인생은 살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버킷리스트’의 정의를 새로 써보기로 했다. 버킷리스트란 죽기 전에 치러야 할 인생의 밀린 과제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언제 죽을지 모르니 간절히 하고 싶은 일은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한다는 분명한 메시지였다. 우리는 허감독의 버킷리스트인 캠핑카로 여행하기, 밴라이프를 바로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 p.12
간절히 원하는 것들을 지금 하면서 살고 싶었다. 오늘을 희생해 다가올 내일이 아무리 안락하다 할지라도, 지금 우리에게 고단하고 불행한 시간이 더 길다면, 우리는 그것을 차마 행복이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p.15
밴라이프를 시작하기 몇 달 전부터 주방 식기나 그릇을 주변에 나눠주고 코펠로 밥을 해 먹었다. 우리는 무거워진 삶을 다이어트하는 중이었다. (…) 구석구석에 붙어 있던 군더더기를 덜어냈다. 삶이 점점 건강해지고 있었다.--- p.27
우리에게 밴은 단순히 여행도구가 아니다. 사는 공간이고, 쉬는 공간이고, 일하는 공간이다. --- p.49
흔히 여행중에는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흥청망청 돈을 쓰고, 일할 때는 아등바등 돈을 모은다. 우리는 밴라이프를 이어가면서 그런 생활방식도 무너뜨리고 싶었다. 잘 모으고 꼭 필요한 것을 고민하여 잘 쓰며 여행해보기로 했다. 살아보기로 했다. 밴 안에서 노트북이 후끈후끈해질 때까지 일하다가도 문득 밴의 창문을 열어젖히고 맛있는 와인 한잔쯤 기꺼이 우리 자신에게 선사할 수 있는 여유를 품으며 살기로 했다. 여행자이면서 생활자이기에 소비와 저축의 균형을 잘 잡는 일은 우리에게 중요한 미션이자 숙제가 될 것이었다. --- p.53~54
첫날밤, 생각지도 못한 곳에 허감독이 빔프로젝터를 달았다. 카메라 집게 거치대가 훌륭한 극장 설비가 되어주었다. 조수석 뒤편 창문 덮개에 빔을 쏘고, 거실 소파를 침대로 만들어 영화를 보았다. 차창 너머로 멀찍이 스크린을 보는 자동차극장 말고, 우리만의 진짜 자동차극장이 탄생했다. --- p.72
밴라이프가 특히 좋은 건, 보고 싶은 사람이 있거나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일 걱정, 다시 돌아올 걱정 없이 언제든 어디로든 달려갈 수 있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거리가 먼 것이 아니라 마음이 먼 것이었다. 절친한 사람과도 그럴 때가 있다. ‘조만간 만나요’라는 말과 함께 헤어지고 지키지 못했던 숱한 약속을 나는 밴라이프를 하는 동안 반성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내가 먼저 달려가야지.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다시는 ‘바빠서’ ‘멀어서’라는 막막한 핑계를 대진 말아야지. --- p.95
문을 열면 딴 세상. 그것을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건, 결국 우리 자신이었다. --- p.114
밴라이프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번개처럼 깨닫게 해준다. 전기, 수도, 난방, 정화조 등 생활의 편의시설은 누군가의 노력과 역할에서 오는 것이었음을 실감하게 한다. 메마른 저수지는 자연이 주는 만큼 우리가 돌려주지 못한다면, 곧 인간이 당연하게 받아왔던 것을 받지 못하게 될 때가 올 것이라 예고하고 있다. 인간에게 퍼부어주던 자연이 빠른 속도로 등을 돌리고 있다.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 p.148
선이 가둬준 자연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림이 된다, 움직이는 그림. 시간이 아깝지 않다. ‘어느새 노을빛이 깔릴 테지. 어느새 짙은 어둠이 깔릴 테지.’ 가장 예쁠 때 가장 오래 봐둔다.
밴에는 창문이 많다. 운전석에 하나, 조수석에 하나, 벙커 침실 양옆에 둘, 거실에 둘, 주방에 하나, 욕실 겸 화장실에 하나, 끝으로 출입문에 세로로 길게 난 창 하나, 거기에 천장에 난 선루프까지 총 10개다. 같은 길을 달려도 다른 위치에 달린 창문 덕분에 다른 10개의 장면이 담긴다. 그 덕에 그냥 길에 불과했던 곳들이 창문에 담겨 그림으로 다시 태어난다. 밴라이프의 가장 큰 즐거움은 매일 창밖 풍경을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 p.242
밴라이프는 엄청난 크기의 낭만을 가지고 있지만 그만큼의 불편함 역시 가지고 있다. 전기 등의 도시설비가 없는 밴에서 이 ‘불편함’들을 아날로그식으로 처리해내는 일은 밴라이프의 묘미 중 하나다. --- p.297
줄을 서서 들어와야 한다. 줄을 서서 나서야 한다. 신발을 다 신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다 벗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고 기다려주기. 밴에 사는 건, 그런 과정들 사이에 숨겨진 낭만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것이다.
--- p.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