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의 시대다. 산업화에 성공한,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는 선진국이 되었지만, 정작 국민 대다수는 이 모든 업적을 ‘남의 이야기’라고 느낀다. 행복감은 떨어지고, 자살률은 세계 최고다.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는 민주화를 이룬지 30년이 넘었는데, 정작 투표장에 가는 유권자는 줄었다. 촛불혁명을 이루었다는데, 시민의 정치효능감은 바닥이다. 풍요의 역설이자 민주화의 역설이다.
어디에 문제가 있을까? 경제를 더 성장시키면 해결될까? 아니면 민주화가 부족해서인가? 그러나 문제는 고용 없는 성장, 참여 없는 민주주의라는 데 있다. 이런 역설 사회의 해답을 ‘사회의 품격’에서 찾아보았다. 그것이 경제의 토대이자 민주주의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 pp.11-12
외환위기 전까지 한국인은 늘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경험했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했으며, 그 기대가 충족되는 삶을 살았다. 아들 세대는 아버지보다 나아진 사회를 경험했고, 또 그 자식 세대는 자신보다 더 개선된 사회에서 살 것이라 기대했다. 이는 지속적인 경제성장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외환위기는 그런 기대가 틀렸다는 것을 집단으로 체험하게 했다. (…) 에코 세대는 이처럼 사회적 분위기가 바뀐 다음에 사회에 진출한 세대다. 당연히 과도한 위험회피 경향을 보일 수밖에 없다. --- pp. 40-42
사회적으로 중산층에 대한 비현실적 기준이 광범하게 받아들여졌다. 예컨대 2013년 조사에서 “우리나라에서 ‘중산층’이라고 불리려면 얼마나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평균 월급 567만 원, 연봉 7000만 원이라고 답했는데, 통계청 조사 결과 이 정도 소득은 상위 6.5퍼센트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 중산층의 기준이 이와 같이 높게 매겨져 있으니까 당연히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은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 기준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답은 바로 강남8학군이다. 강남에서 30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사람을 모델로 자신과 비교해온 국민이 모두 자학적인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것이다. --- pp.141-142
앞서 살펴본 스위스치즈 모델처럼 여러 겹의 안전장치들 중 한 겹만이라도 제대로 작동했다면 대구지하철 사건과 같은 극단적인 피해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모두 안타까워했는데, 그로부터 20년 후에 똑같은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예고된 참사였던 세월호 사건 또한 여러 단계의 안전장치가 모두 무력화된 결과였다. 즉 세월호 사건은 예외적인 한 번의 재난이 아니라 그 사건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 갑판 위의 노동력 관리, 해운회사의 운영과 조직문화, 연안해운을 둘러싼 규제기관의 역할, 정부의 정책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의 시스템적 요소들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종합 결과물이었다. --- pp.186-187
현재 우리나라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팽배해 있고, 제도와 정부를 불신하며 현실에 불만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청년층은 위험은 기피하려 하고 사회적 의제에 대한 참여가 소극적이며, 변화 의지가 부족하다. 모래알처럼 흩어져 각자도생하되, 경쟁이 심하고 공동체 의식은 낮다 보니 이 모두가 행복감이 떨어지는 사회적 원인이 된다. 이는 사회의 품격이 떨어지기 때문에 겪는 증상이다. 그렇다면 ‘좋은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치고, 제도에 대한 신뢰가 높고, 현실에 만족하며, 적극적으로 위험을 감수해 창업과 혁신 노력을 기울이고, 참여를 통해 능동적 변화를 끌어내려는 공동체 의식이 높은 사회, 이런 사회라면 국민들의 행복감은 높아질 것이다.
--- pp.239-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