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살려! 살려주세요! 으윽, 숨 막혀…. 아악! 난 죽기 싫어! 어푸어푸….”
마야는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알람이 울리기 팔 분 전이다. 진땀이 흐르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실내화를 발에 꿰는 순간에도 악몽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쌀밥이 수북하게 담긴 거대한 밥그릇에 빠져 밤새 허우적댔다. 왜 하필 밥그릇이람? 앞으로 일본 음식은 쳐다보지도 말아야겠어. 마야는 지끈지끈한 머리로 시리얼에 따뜻한 우유를 부으며 커다란 직육면체 상자에 적힌 문구를 읽었다.
“으음… 설탕을 첨가해 부풀린 쌀밥 한 그릇이라….”
악몽을 떨쳐버리기 위해 라디오 볼륨을 높이고 욕실로 뛰어간 마야는 김이 펄펄 나는 샤워기 물줄기에 머리를 대고 샴푸로 박박 문질러 씻었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기 전에는 현관 서랍에 있던 빗으로 다시 한번 머리를 빗은 후 마지막으로 거울을 쳐다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지하철로 오십 분, 열여덟 정거장, 생라자르역에서 한 번 환승. 마야의 하루 통근시간은 한 시간 반이다. 지하철, 직장, 잠이라는 일상의 세 축은 현대인의 찌든 삶을 상징하지만 마야는 지하철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무척 좋았다. 그 안에서 사람들을 관찰하고 대화를 듣고 남의 삶을 상상하는 재미가 꽤 쏠쏠해서 지하철을 탈 때마다 매번 새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 p.10~11
마야는 갑자기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대부분은 그 반대였다. 늘 기꺼이 자신의 일에 대해 말했고 자부심도 느꼈다. 하지만 매일 씻는 일조차 힘든 사람과 헤어제품에 대해 말한다는 게 거북했다. 마야는 돌려서 대답했다.
“사업이득을 내기 위해 경쟁사보다 품질이 훨씬 좋은 샴푸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요.”
“멋진데요.”
“맞아요. 전 이 일이 좋아요. 어쩌면 너무 좋아하는지도 몰라요. 사람들과 말하다보면 늘 머리 얘기를 하게 되거든요.”
“매일매일 그 일을 하니 당연하죠. 아침마다 지하철에 탄 사람들을 보면 행복한 얼굴이 아니에요. 표정이 다들 똑같아요. 월요일 아침은 더 죽을상이죠. 시베리아에 가서 돌이라도 주워오라는 명령을 받은 것 같다니까요. 그래서 월요일은 우리한테도 별로 안 좋아요. 사람들은 기분이 나쁘면 적선을 하지 않거든요.”
“아저씨 생활이 사람들 기분에 달려 있다고요?”
마야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계절이나 기념일에 따라서도 달라져요. 크리스마스와 라마단, 추운 겨울엔 너그러워져요. 날씨가 좋아지면 놀러 나오는 사람이 많아져서 출퇴근시간이 아니더라도 하루 종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죠. 지하철 승객은 우리에겐 고객이에요.” --- p.37~38
마야는 지하철에서 벌어지는 생생한 광경에 감탄이 나왔다. 지하철은 다양한 문화를 지닌 수많은 사람들을 매일 여러 곳으로 실어나른다. 기분 좋은 사람, 불만인 사람, 가난한 사람, 덜 가난한 사람, 갈색 머리, 붉은 머리, 뚱뚱한 사람, 잘생긴 사람…. 매일 지하철 안에서 몇 권의 책이 읽힐까? 스마트폰이나 MP3로 듣는 노래는 얼마나 될까? 친구나 동료끼리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눌까?
지하철은 일상생활이라는 무대에 반복적이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배경으로 존재한다. 마야는 이 배경을 구석구석 살펴보고 감상했다. 긴 통로의 흰 타일 벽에 어느새 새로 바뀌어 붙어 있는 광고 포스터, 멈췄다가 다시 떠나는 열차들, 도착과 출발을 알리는 안내방송, 열리고 닫히는 문들, 바캉스에서 돌아온 사람의 얼굴조차 희멀겋게 만드는 푸르스름한 형광등 불빛, 매일 지하철을 타지 않는 사람은 견디기 힘든 날카로운 바퀴 소리, 사람과 기계와 습기와 세제가 뒤섞인 독특한 냄새…. 마야에게 파리의 지하철은 편안함과 익숙함이 배어 있는 특별한 세계였다.
--- p.97~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