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준.”
그의 목소리가 시끄러운 소리를 가르며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녀의 신경 하나하나가 올올이 그에게 가 있었다. 달아오른 얼굴이 술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목소리 때문인지 모르겠다. 내일 아침에 땅을 치며 후회할지 몰라도, 해준은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그동안 무겁게 그녀의 속을 내리누르던 게 이거였다.
나. 는. 사. 장. 님. 을. 좋. 아. 한. 다.
그 감정을 숨기고, 억누르고 있어서 답답했던 거였다. 태혁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잡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웃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내 말 잘 들어. 술 마시고 실수로 한 말이니까 오늘 밤에 자면서 잊어버리는 거다. 내일 일어나서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어. 자아.”
그러더니 잡은 어깨를 돌려세웠다.
“저기 직원들한테 가서 같이 잘 놀아. 술은 적당히 마시고 신나게 춤추면서 스트레스 풀고 지금 한 말은 잊어버려.”
그러더니 그의 큰 손이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더니 이내 떨어졌다. 해준이 멍하니 그렇게 서 있는 새 그녀의 뒤는 허전해졌다. 해준은 한참을 돌아보지 못했다. 문이 열리고 한 번씩 소음이 열린 문 사이로 쏟아져 나오고, 사람들이 힐끗 그녀를 보고 지나가는데도 해준은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이내,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해준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가 이미 사라진 것을 아는데도 두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없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혹시라도 그가 아니라며, 사실은 저를 좋아한다며 울지 말라고 위로해주길 기대했을까. 커다란 손으로 안아주기를 기대했을까.
해준은 멍하니 화장실로 걸었다. 마음 한구석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만 같다.
◇ ◆ ◇
해준은 클럽에서 한 시간 정도를 더 보내다 돌아왔다. 춤을 출 기분이 아니었고,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모처럼 정완에게도 미리 허락을 받고, 완전히 신났었는데…….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가 양치하고 세수를 하고 잘 준비를 하면서도 머릿속이 검정 펜으로 마구잡이 낙서를 한 듯 온통 헝클어졌다. 자리에 누우니 태혁의 목소리가 더 또렷이 기억이 났다. 이대로 눈을 감은 채 영원히 잤으면 좋겠다. 내일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침엔 모든 걸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그런데…….
알람 소리를 듣기도 전에 번쩍! 눈이 뜨였다. 마치 공양미 삼백 석에 딸을 팔아먹은 심 봉사처럼.
「이해준. 내 말 잘 들어. 술 마시고 실수로 한 말이니까 오늘 밤에 자면서 잊어버리는 거다. 내일 일어나서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어.」
어제의 모든 상황이 태엽을 되감은 것처럼 고스란히 기억났다. 해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태혁은 잊어버리라고 했는데, 해준은 사라져버리고 싶어졌다. 고백한 것도 부끄럽고, 그렇게 고스란히 무시당한 것도 속상하다. 과연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잊을 수 있을까. 지금도 이름만 떠올려도 속이 울렁대는데.
대책 없는 고민을 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띠링, 문자가 도착했다.
[해준 씨, 오늘 사장님 조찬 미팅 있어요. 천천히 출근하세요.]
준우의 문자였다. 해준은 일부러 연락해준 준우가 고마웠다.
[네. 감사합니다.]
그러자 익살스럽게 웃는 이모티콘을 곁들인 준우의 문자가 다시 왔다.
[사장님이 해준 씨 술 많이 마셨다고 천천히 출근하라고 문자 보내셨어요.]
해준은 비서실장님의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깜찍한 이모티콘에 풋, 웃음을 터트렸다.
태혁이 일부러 해준을 생각하며 준우를 시켜 문자까지 보냈단 말인가? 술이 많이 취했으니 깨고 오라는 말인지, 아니면 신경을 써주는 건지. 최소한 날 싫어하시진 않는 걸까? 해준은 준우의 문자 하나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자신을 깨닫고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이해준, 중증이다.
살이 데일 듯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화사한 색의 정장을 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묶어서 말아 올리고 립글로스를 바르고 출근준비를 하고 나니 왠지 바닥을 쳤던 전투력이 다시 솟아나는 듯했다. 해준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주먹을 꼭 쥐었다.
“화이팅, 이해준!”
세상이 뒤집힌 것 같지만, 쪽팔려서 죽을 것 같지만 그래도 버텨보는 거야.
◇ ◆ ◇
“아우, 진짜 회식을 왜 항상 목요일에 해서 사람을 이렇게 잡냐. 하려면 차라리 금요일에 하지.”
애리는 불평하며 거울로 푸석푸석해진 얼굴을 확인하며 파우더를 두드렸다.
“그래도 어제 제일 잘 노셨잖아요. 전 과장님이 그렇게 춤을 잘 추시는 줄 몰랐어요.”
사실 잘 추기보다는 춤추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그렇게 맞춰주었다. 그러자 애리가 배시시 웃었다.
“사실 울 남편이랑 살사 모임에서 만났잖아. 호호.”
해준은 결혼사진에 있던 통통한 테디베어 같은 애리 남편의 외모를 떠올리며 어리둥절해졌다. 그 모습과 살사댄스가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아서였다.
“요즘도 가끔 춤추러 가.”
“멋져요, 과장님.”
해준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취미를 공유하는 기분은 어떨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응. 우린 애 가지지 않고 이렇게 평생 같이 취미생활 즐기며 살기로 했어.”
“와. 진짜요?”
애리가 한숨을 폭, 쉬었다.
“우리 둘 마음은 그런데, 벌써 시댁이고 친정이고 난리야. 더 늙기 전에 애 낳으라고. 우리 둘이서 좋다는데 왜 그럴까.”
“그러게요. 전 결혼하라고 난리고.”
“요즘 그것 때문에 우울해? 어제도 중간에 가버렸잖아. 해준 씨 사라져서 깜짝 놀랐어. 그렇게 좋아하더니.”
해준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에요. 그냥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술도 취한 것 같고.”
“그래, 잘했어. 늑대들 우글거리는 데 오래 있어봤자 좋을 거 하나 없어. 다들 해준 씨 찾긴 하더라만. 엇, 사장님, 실장님, 오셨어요?”
애리는 손거울을 잽싸게 치우며 인사를 했다. 해준은 당황해서 고개만 숙였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나타나는 바람에 결심이 흐트러져버렸다. 심장이 뛰쳐나올 듯 두근거렸지만, 태혁의 표정은 평소와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려던 태혁이 문을 열다 말고 돌아보았다.
“해준 씨, 커피 한 잔만 부탁해요.”
“네? 네!”
해준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며 대답했다. 태혁은 그대로 문을 닫고 들어갔다.
“사장님, 여기 있습니다.”
해준은 안으로 들어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고마워요.”
태혁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가 말했던 대로 마치 어제의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듯이. 배려해주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무시하는 걸까? 눈가에 물기가 조금 어렸지만, 해준은 울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고는 그의 집무실에서 나왔다.
탁.
문을 닫는 소리와 함께 해준이 사라지자 태혁은 그제야 모니터에서 시선을 거두고 해준이 사라진 자리를 보았다. 괜한 두통이 올라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던 태혁은 피식 웃어버렸다. 마지막으로 그런 고백을 받은 게 15년도 더 된 듯하다. 일하는 기계처럼 살았는데 자신을 남자로 봐주는 여자가 있다는 걸 고맙다고 생각해야 하나.
하지만 거기까지. 선망의 대상으로 보는 상사를 이성으로 좋아하는 거로 착각하는 건 자기 선에서 잘라줘야 했다. 이렇게 대하는 걸 보았으니 해준도 이제는 마음을 정리하고 그냥 상사로서 대하겠지.
다시 모니터를 보려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태혁의 눈이 커졌다. 조용하게 인사를 하고 나갔던 해준이 다시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태혁의 눈에 놀라움과 의문이 어렸다. 조금은 화난 듯, 당당하게 걸어오는 폼이 왠지 귀엽기도 했다.
“사장님. 할 말이 있어서요.”
“뭔가요?”
해준은 숨을 고르며 할 말을 생각하는 듯 한 박자를 쉬었다. 그리고 이내 당차게 얘기했다.
“전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술 마시고 실수로 한 말도 아니에요. 그 말이 꼭 하고 싶었어요. 저 장난 아니고 진지해요. 태어나서 처음 해본 고백이었어요.”
태혁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상상하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어제 그 고백을 끝으로 해준이 더 이상을 말을 꺼내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여러모로 그의 기대를 뛰어넘어버리는 여자였다.
“하지만 술 취한 김에 우발적으로 한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자 해준은 당황했다.
“그게…… 술 때문에 우발적으로 그런 게 아니라 술의 힘을 빌려서 용기를 낸 거예요.”
당당하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작아졌다.
“그게 그거야. 맨정신으로 못 하는 걸 술김에 하는 건 옳지 않아.”
“그럼 술 안 취하고 말하는 건 괜찮나요? 지금처럼?”
태혁은 겨우겨우 웃음을 누르며 애써 딱딱한 표정을 유지했다. 왠지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해준.”
“네, 사장님?”
해준이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참 예쁘다. 이런 사람의 사랑을 받는 게 과분할 정도로 예쁘고 맑은 여자다.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휘젓고 싶지 않았다.
어제 그렇게 가차 없이 말해놓고 생각이 많았던 건 태혁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재고할 가치조차 없었다. 두 사람은 가야 할 길이 명백히 달랐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잊힐 열병 같은 감정일 거였다.
“여긴 회사야. 연애하는 놀이터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네 맘 이제 네가 정리해.”
그의 단호한 말에 해준의 표정이 부끄러움과 서러움을 담은 채 극적으로 바뀌었다.
“이해준 부하직원으로 맘에 들어. 아니, 인간 이해준도 좋아. 이제껏 부하직원에게 말을 놓은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그것도 가능하게 할 정도로 편하고 마음에 들어. 이런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게 네가 잘 알아서 했으면 해.”
태혁은 최대한 완고한 어조로,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단호하게 얘기를 했다. 더 복잡한 관계가 되기 전에 끊어야 했다. 그녀의 마음도 그렇지만 헷갈리고 흔들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시들어가는 해바라기처럼 어두운 표정으로 있던 해준이 입을 열었다.
“부하직원으로도 좋고, 그냥 이해준도 좋은데……. 그래도 여자로는 싫단 말씀인가요?”
태혁은 저도 모르게 당황해서 손가락으로 잠시 미간을 눌렀다. 할 말 다하는 성격이란 건 알았지만 이렇게 직구를 날릴 줄은 몰랐다.
여자로 보인다. 그게 문제다. 하지만 그 말을 할 순 없었다. 태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태하에게서 두 번이나 여자를 떼어놓고, 자신은 저 좋다고 하는 여자를 당당하게 만날 자격이나 있을까.
“이해준, 잘 들어. 나 열흘 동안 출장 가 있는 동안 잘 정리해. 정리하고 밝은 얼굴로 봐. 네 표정 보면 나까지 기분 좋아지니까.”
태혁은 사랑만큼 헛된 약속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차피 감정이란 시간이 지나면 바뀌게 마련이다. 해준이 순수하게 그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어차피 그 감정 역시 오래가지 못할 거였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선을 보고, 다정하고 멋진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면 지금의 일쯤은 사소한 추억으로 치부되겠지.
걸어가는 해준의 어깨가 유난히 처져 보였다. 태혁은 그 어깨를 잡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 느꼈다.
맑은 눈이 항상 그를 좇고 있는 것을. 그때부터였다. 마음 한편에 살랑, 봄바람 같은 바람이 분 게. 작은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가슴이 간질간질한 게.
하지만 이런 감정의 사치는 여기서 끝.
태혁은 그렇게 마음을 정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