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그녀는 이 집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깬 것처럼 일어난 그 순간 그녀가 처음 깨달은 것은 이전의 삶과 단절되었다는 느낌이었다. 한데 그녀는 깨어나기 무섭게 남편이라는 작자에게서 이혼장을 받았다. 현승(縣丞; 지방 관직, 군수)의 누이라는 과부와 혼인하기 위해서였다.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쓰러졌던 그녀는 꼬박 한나절이나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그것은 ‘이 몸’이 살아왔던 삶의 기억을 받아들이는 시간이었다.
다시 깨어난 그녀는 기억과 인격이 혼재된 불균형 상태가 되고 말았다. 기억은 이 몸의 것, 인격의 주체는 전생, 혹은 후생이라 여기는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생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기억은 떠올릴 수 없었다. 가끔 이곳에서 쓰지 않는 생소한 말이나 단어 같은 것이 떠오르곤 했지만 입 밖에 내기 전에 꽉 막히고는 금세 지워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 몸의 기억 또한 완전히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이 몸의 삶은 꽤 생생하게 기억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느낌은 전생의 자신을 보는 듯 아련하기만 했다. 해서 전생인지 후생인지 모를 자신이 한 몸에 섞인 것 같아서 불균형 상태라는 것이다.
이 집은 본래 이 몸의 부모님이 남겨주신 집이었다. 해서 이혼하자마자 하 가가 집을 나가야 했다. 그러나 고이 나간 건 아니었다. 집안에 있던 세간을 모두 빼고 하인과 하녀들까지 모두 쫓아낸 것이다.
그럼에도 집과 땅이 남아 있다는 것에 그녀는 미래를 꿈꿨다. 그러나 새로운 삶에 희망을 다짐하던 그 순간, 화마가 그녀를 덮치고 말았다.
― 살아라!
어쩐지 이상한 염원이라 했다. 이렇게 앞날이 힘들 것을 알고 미리 경고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염원을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힘이 났다.
탁, 손에 닿는 느낌이 달라졌다. 드디어 출구에 다다른 것이다.
“어서, 어서!”
스스로 재촉인지 응원인지 모를 소리를 낸 그녀는 문을 여는 고리를 찾기 위해 벽을 더듬기 시작했다.
달칵! 그르륵.
벽의 이음새에 교묘히 숨겨졌던 손잡이를 밀자 거센 저항과 함께 문이 열렸다. 맑은 공기가 타버릴 듯 막혔던 폐부를 깨끗하게 훑어주었다.
살았다! 목숨을 위협하던 거센 화마에서 기어이 도망쳐 나왔다.
그러나 그녀가 미처 안도의 숨을 크게 들이쉬기도 전에 들려서는 안 되는 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쥐새끼처럼 여기로 기어나올 줄 알았지!”
“허억!”
천천히 돌아선 그녀는 놈을 볼 수 있었다. 방금까지 욕하던 그녀의 전남편, 하 가(家), 하태교였다.
“내가 이 쥐구멍을 모를 줄 알았나 보지? 나도 이 집에서 산 것이 2년이야. 네년이 아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하 가의 눈동자가 살기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렇다. 화마(火魔)의 장본인이 바로 하 가였다. 언뜻 문 앞에서 지키고 있는 걸 보고 도망친 길이었는데 어느새 앞질러 먼저 와 있었던 것이다.
“당, 당신! 기어이……!”
“그러게 고이 죽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 아닌가!”
하태교가 정말 바라는 건 이혼이 아니라 그녀가 자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이혼을 받아들였기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살던 집과 부모가 남겨준 땅을 그녀에게 돌려줘야 했기 때문이다.
저택의 불길이 그의 살기 어린 웃음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 살아라!
순간, 머릿속을 지배하던 음성이 떠오른 동시에 그녀는 마지막까지 들고 있던 호롱을 던졌다.
“으악, 이년이!”
뒤를 돌아볼 새도 없었다. 잡히는 순간 죽음이다. 그러나 무작정 어둠을 향해 뛰어들던 그녀는 몇 걸음 딛기도 전에 발길을 멈춰야 했다.
“히히히히.”
“후후후후후.”
“꺄악!”
짐승의 털가죽을 두르고 머리통만 한 도끼와 그녀의 몸통보다 넓은 칼을 든 사내들이 앞을 막으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이년! 감히 네년이 날 쳐?”
그새 발광하던 하 가까지 달려와 그녀의 뒷덜미를 낚아채 넘어뜨렸다.
“어이, 하 부조! 죽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맛이나 보자고!”
“귀족 여인네 아닌가? 야들야들한 속살 맛본 지 꽤 되었단 말이야.”
“내가 먼저야!”
“내가 먼저라고!”
하 부조(簿曹), 놈들이 부르는 것처럼 하태교는 연해국, 적토의 관리였다. 하지만 하태교와 야만족 무리는 절대 적대하는 관계가 아니었다.
어제저녁, 마지막 하녀가 떠나면서 이른 말이 있었다. 야만족 무리와 결탁해 군사들의 이동을 미리 알려주고 백성을 약탈하는 것을 돕고 제 배를 불리는 관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바로 하 가일 줄이야!
그러나 이제 와서 그런 사실을 알아차린들 무슨 소용이랴.
뒤로는 광란에 젖은 하 가, 앞으론 도끼와 칼을 든 사내들 말 고도 둘러싼 야만족이 열이 넘었다. 달아날 길은 없었다. 염원이고 뭐고 끝이었다. 이토록 허망한 끝이 올 줄이야!
“어?”
그때 갑자기 하태교가 코를 문지르자 야만족들이 낄낄거렸다. 그녀가 아까 엉겁결에 던진 호롱에 정통으로 맞은 그가 이제야 코피를 터뜨리고 있었다.
“큭큭큭, 제대로 맞았네!”
“그러게, 계집이 마지막에 남편에게 거나한 선물 하나 했네.”
“우리에겐 더 좋은 선물을 하라고!”
“이잇! 내, 이년을 당장 죽여 버릴 테다!”
조롱을 참지 못한 하태교가 그대로 달려들며 그녀에게 비수를 들어 올렸다.
‘아……!’
마지막을 예감한 그녀는 눈을 감았다.
퍽!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잔인한 순간이 참으로 길기도 했다.
그런데…… 퍽?
‘끄윽’ 하는 치명적인 신음을 들은 것도 같다.
동시에 야만족들이 갑자기 고함을 지르더니 부산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살며시 눈을 떴다. 하 가가 끄륵끄륵 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가슴에 화살을 꽂은 채로. 삐죽 튀어나온 화살촉을 덮은 빨간 피가 하 가의 입가에도 맺혀 있었다.
놀라움도 잠시, 거대한 짐승이 야만족들 사이로 난입했다. 야만족 하나를 깔아뭉개 목을 부러뜨린 짐승의 위에는 사신, 붉은 사신이 타고 있었다.
팔다리가 날아가고 비명이 울렸다. 자신들의 거대한 도끼와 칼을 한 번 휘둘러 보지도 못한 채 야만족들은 붉은 사신에게 명줄을 내주었다.
누군가는 달아나려 했지만 사신을 태운 짐승은 아무도 놓치지 않았다. 덩실 떠올랐던 목이 그녀의 발치에 떨어졌다.
끄악, 끄아악!
생명이 스러지는 소리. 마지막 야만족의 비명이 울리는 순간 그가 고개를 돌렸다.
붉은 사신(死神)과 눈이 마주친 여인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