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바에 의하면 성경은 정확하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 곧 성경의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 받았다. 우리 시대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우리의 삶과 생각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이 전체(the whole)에 대한 충성이 필요하다. 실상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에 대한 충성으로 마음이 분열되어 있어서, 인류를 완전한 대재앙으로부터 구원해 내는 데 필요한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구원을 위한 일에 온전히 헌신해야 하는데, 이 일은 스스로 존재하시며 모든 것과 연관되어 계신 분, 곧 우리의 전적 헌신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지금까지 나는 하나님 존재에 대한 신뢰성(credibility) 문제를 이야기 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우리 유신론자들에게는 이런 신뢰성 문제 외에 또 다른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곧 사람들이 “하나님”을 불편한 말로 여기게 된 데는 소위 믿는다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끔찍한 일들을 많이 저질렀다는 문제이다.
우리의 순진한 생각,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 사람들이 선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실상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을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기보다 자신들의 편견을 강화시켜주시는 분으로 믿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 나는 예수처럼 하나님을 생각하고, 또 하나님과 관계 맺을 것을 주장한다. 물론 기독교는 항상 그렇게 해오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기독교가 하나님 및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가르쳐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 대해 이해해온 것과 예수가 “아바”에 대해 이해한 것은 분명코 다르다. 내가 이 책을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군주처럼 보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도 많은 기도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해 드려지고 있음을 보아도 분명히 드러난다. 실상 하나님이란 단어를 반복해서 말하고 싶지 않을 때 대신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전능자(the Almighty)’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전능자로 보게 될 때, 하나님은 피조세계의 고통에 대해 일차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분으로 여겨지게 된다. 또한 간절히 기도하지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깊이 실망하고 분노하게 된다. 아마도 ‘전능자’라는 말과 연관된 기대가 무산되는 것만큼 사람들의 믿음을 파괴해버린 것도 별로 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주의 기본적인 구조가 생명을 낳는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처음에는 이런 발견이 특별히 대단해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날 천문학자들은 대부분의 유신론자들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이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 천문학자들이 지금까지 발견한 바에 의하면, 우주는 생명이 쉽게 거주할 수 없는 곳이었다. 사실상 사태를 객관적 시각으로 보면, 생명이 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지극히 적었다. 그러니 이처럼 생명을 허용한 것은 수많은 선택들 중에서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처럼 보인다.
이 책에서 서술되고 있는 모든 내용의 배경은 오늘의 세계가 큰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생명들이 대규모로 멸종당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기후변화는 지구의 많은 지역을 거주할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해양은 죽어가고 토양은 침식되고 황폐해져가며, 인간의 신체와 그 재생 시스템은 유전자 조작으로 변질되고 있다. 우리는 이 모든 사태를 도외시할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될 것인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런저런 믿음을 갖게 되고 그 가운데 확신을 가지기도 하겠지만, 그 중 어떤 것들은 분명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 첫째로, 하나님은 결코 인류가 멸망하게 내버려두지 않으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가 볼 때 그들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죄로 인해 심판하시지만 그 중 선한 일부는 천국으로 데려가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가 볼 때 그들은 사회적이고 영적인 대기를 오염시킬 뿐 실제적인 문제 해결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예수의 아바를 모른 채 지내는 것은 정녕 비극적인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주로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문화에 동화되어 온 결과에 불과하며, 헌신할 가치가 없는 사고방식이다. 나는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아바와 연관되기를 추구할 때 더 깊고 더 기쁜 신실함을 보일 수 있다고 확신한다. 나는 독자들이 아바의 사랑과 힘주시는 능력을 깊이 신뢰했던 예수님의 신실성에 깊이 참여할 것을 강력히 권면하고 싶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