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누구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는 기분이 들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질문엔 나도 답을 찾고 있는 중이다. 그중 하나가 올댓클래식 강의를 듣는 것일 수도 있고, 나무를 주워와 여러 날 물감을 덧칠해서 하나의 쟁반을 만드는 일일 수도 있고, 이렇게 긴 이야기를 자신에게 들려주는 일일 수도 있다.
---- 「1부. 엄마라고 불리는 고모」 중에서
어두운 곳에서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을 간절히 바라는 어린이는 수없이 많다. 학습지 선생을 하면서 반지하에서나 임대아파트에서 늦게까지 잔업을 하는 부모를 기다리며 쓸쓸한 밥상에 앉아 무심히 티브이를 보던 어린이를 수없이 보았다. 부모가 있다고 해도 어른의 책임을 다하느라 정작 아이들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주지 못한다. 나는 시간이 많은 어른이 되고 싶다.
--- 「2부. 세상의 모든 ‘어린 이’를 위하여」 중에서
놀이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엄마와 떨어지던 네다섯 살 때 보였어야 할 감정들이 이제 막 올라오는 거란다. 충분히 느끼고 표현해야 할 감정들 말이다. 인지 선생님께서는 아이가 엄마를 찾으며 울 때는 울게 내버려 두라고 했다. 그럴 때는 울음이 그칠 때까지 안아주다가 울음이 그치면 이렇게 알려주라고 했다. “오래 울었으니까 힘들 거야.”라고.
--- 「3부. 조카손자아들 정명이의 ADHD」 중에서
아아. 어째서 나는 이렇게 맛있는 요리를 앞에 두고 엄마며 동생이며 조카들 얼굴을 떠올리고 마는 것일까. 어째서 나는 한시도 그들의 얼굴을 집에 두고 오지 못하는 것일까. 이렇게 맛있는데, 이렇게 예쁘게 차린 상인데 어째서 나는 이 음식 앞에서 코끝이 찡해져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나 오늘부터는 너무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너무 맛있는 요리를 마주할 때 어째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없다는 걸 기어이 기억해내서 안타까워해야 하는지 묻지 않겠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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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인생은 가족을 이해하는 데 다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엄마와의 관계, 동생과의 관계, 조카들과의 관계, 이제 새로 시작하고 있는 조카손자와의 관계 등등.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좋습니다. 물론 제일 좋은 건,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이겠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쉽게 되나요. 늘 미워했다가 사랑하고, 이별했다가 그리워하는 게 가족이지요.
저의 경우에는 불가사의하게도 제일 미운 사람이 가족이고 제일 애틋한 존재가 바로 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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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누구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는 기분이 들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질문엔 나도 답을 찾고 있는 중이다.
노안으로 안경을 벗고서야 보이는 손자의 손톱 발톱을 깎아주며 구부린 등이 어쩌면 시간의 흐름 속에 엄마와 오버 랩 된다는 것을. 저녁에 외출에서 돌아온 큰조카가 할머니를 위해 인터넷에서 된장찌개 조리법을 찾아 첫 된장찌개를 끓이며 할머니와 대화하는 장면을 목격한 순간이 바로 그 기억의 회로를 찾아가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러니 죽음 따위 두려워하지 말자. 누구나 준비된 사람은 없으니까. 엄마에게 진 빚은 큰조카, 막내조카, 손자에게 갚으면 되는 것이지.
“사람 엄마. 삶은 견디는 것이라면 엄마 정말 잘 견디셨어요. 차렷, 경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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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부르는 일, 조금이라도 현실을 승화시키는 일, 내 안의 유머를 찾는 일, 그것만이 오늘의 나를 온전하게 지탱시킬 수 있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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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하던 일을 했더니 몸이 너무 무거워 쉬고 싶다. 5년 전과 비교해서 임금은 동결되었고, 식당 인력은 극히 최소한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야말로 화장실 갈 시간조차 없을 정도다. 이렇게 열악한 근무 방식이니 일하는 사람들이 못 버티고 쉬운 일을 찾을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힘든 일은 싫어하고 쉬운 일만 찾는다는 발상은 그 노동의 강도를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의 시각이거나 그런 노동을 견디더라도 노동만큼 이윤을 챙길 수 있는 오너의 입장일 것이다. 힘든 일을 싫어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못 견디니까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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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나를 소개할 때 따라붙는 ‘고모예요.’라는 말 속에 ‘엄마가 아니라서 미안해.’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도, 학부모들께도 ‘고모예요.’ 하고 소개를 할 때면 조카는 내 뒤에 숨어서 수줍어했으니까. 나에게도 용기가 필요했다. 고모가 엄마인 친구도 있다는 것을 이해시켜야 했으니까. 그렇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이해하는 법이니까.
“엄마가 없어서 고모가 엄마야.”라고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 물론 조카의 말을 듣고 조금 복잡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런 아이들 많아요. 어떤 애는 아빠랑만 살고, 그냥 할머니만 있는 아이들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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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주신 보석 같은 말을 마음에 가득 담고 갑니다.’
우리는 다음 주 다시 만날 사람들처럼 가볍게 인사했다.
‘이런 식으로 헤어져도 되는 걸까….’
나의 진심이 무엇인지, 무얼 원하는지 모호했다. 울 것도 아니고, 아쉽다고 다음에 만날 약속을 할 것도 아닌, 이렇게 가벼운 수인사를 나눌 만남도 아닌 이런 이별은 뭐라고 이름 지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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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만이 인생의 전부를 걸 가치가 있다고 믿었던 멍청이가 이제 진정한 문학을 만난 것 같았다. 삶이 곧 문학이라고, 내 주변 사람들이 곧 주인공이라는 것을 왜 진작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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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처음부터 이런 생각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조카손자가 내 삶에 들어왔다. 그 아이를 중심으로 삶이 재편되자 나는 한순간 경력단절 여성이 되었고, 누구보다 약자의 입장이 되었으며, 무엇보다 육아라는 것이 타인의 도움 없이는 해결 불가능 영역이라는 것을 매 순간 깨달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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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에게 여러 가지 감정을 선물하고 싶었다. 다양한 감정 속에서 가장 적절한 자신만의 감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쁨도 느끼지만, 슬픔도 알아야 하고, 지루하기도 하지만, 세상에는 무척 신나고 즐거운 일이 수없이 많다는 것도 알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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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곳에서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을 간절히 바라는 어린이는 수없이 많다. 학습지 선생을 하면서 반지하에서나 임대아파트에서 늦게까지 잔업을 하는 부모를 기다리며 쓸쓸한 밥상에 앉아 무심히 티브이를 보던 어린이를 수없이 보았다. 부모가 있다고 해도 어른의 책임을 다하느라 정작 아이들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주지 못할 때가 많다. 나는 시간이 많은 어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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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의 손이 공부만 하는 손이어서는 매력이 없다고 생각해. 무언가 만드는 창의적인 손. 누군가 도와줄 도움의 손. 일하는 손. 가만히 쉬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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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뚝뚝해서, 부끄러워서 못하는 건 사랑이 아니야. 그런 부끄러움을 넘어서고 행동하는 게 사랑이야. 한 번 하면 두 번 할 수 있고 두 번 다음엔 서로가 행복하지.
‘난 무뚝뚝하니까.’ 하면서 자기주장만 하다 보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슬프게 하고 사랑할 시간을 놓치고 말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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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족의 형태가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라는 말을 떠올려본다. 고모가 엄마인 아이도 있고, 할머니가 엄마인 아이도 있고, 엄마가 둘인 아이도 있다. 삼촌이 아빠인 아이도 있고, 할아버지가 아빠인 아이도 있고, 아빠가 둘인 아이도 있다. 우린 그런 사회에서 살고 있으나 평소에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억지일까. 예외 된 자, 남들과 다른 자, 소외된 자를 사회는 자꾸 구석으로 밀어버리는 게 아닌가. 목소리를 낮추라고, 조용히 있으라고.
-그러나 더 솔직히 말하면 평소에 생각했던 나의 소신을 행동에 옮긴 것이었다. 이별 후에 애달파하느니 이별 전에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겠다고.
지팡이를 짚고 집으로 돌아가서 낮잠을 주무시듯이 돌아가시는 것이 나와 엄마와의 마지막이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있다. 엄마와 나의 만남은 주일예배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출판기념회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
이왕이면 지금까지 나와 남동생을 돌보느라 숨이 턱에 찼을 엄마를 매 순간 잘 떠나보내는 마음으로 대한다. 이른바 조각 이별을 준비한다. 조각 이별이 모이고 모이면 마침내 죽음의 인식조차 더는 비극이 되지 않으리라.
알베르 까뮈가 말했던 ‘행복한 죽음’처럼 마지막 이별조차 가벼워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앞선다. 어쩌다 우리는 부모 자식의 인연으로 만나 최선으로 살다가 이별을 하는 거라고. 만나서 반가웠다고 그리고 고마웠다고. 모든 만남은 그렇게 순한 끝맺음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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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사람들에게는 미덕이 있는데 사람들이 힘들다고 할 때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나중에 편지를 쓴대요. ‘이 화폐는 아주 오래된 것인데 짐 정리하다 발견해서 당신에게 드리는 겁니다.’라고 한다고. 내가 너에게 준다라고 하지 않고 드린다는 표현을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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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의 눈동자가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바라볼 때까지 나는 그의 췌장에 대해 잊고 있었다. 그저 동화작가는 감수성이 참 좋구나 하고 감탄할 뿐.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의 언어는 깊이 읽기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단정적으로 죽음이 문턱에 와있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지병으로 죽음을 늘 인식하며 사는 사람의 언어는 새겨들어야 한다.
루카가 건넨 넓적한 봉투. 그 속에는 18년 전에 사용했던 한국 돈이 들어있었다. 자신이 짐 정리를 하는데 어디에선가 나왔다고. 그러고는 아무 말도 없이 웃고 있었다. 그 미소가 세련되어서 나도 세련된 미소를 지으려고 애썼다.
‘루카, 방금 러시아 사람들 이야기는 지어낸 건가요?’ 하고 말하려던 것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 나서 ‘저녁밥을 미리 계산해서 다행이야.’ 하고 안도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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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순간 저는 조심스러워요. 손자의 설소대 성형을 결정할 때도 한 사람의 인생에 걸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걸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라 두려웠어요. 그런데도 결정을 해야만 했어요. 혀가 짧은 상태로는 아무리 연습을 해도 ‘리을(ㄹ)’ 발음이 안 되었어요. 아이에게 언어치료를 받는데 왜 안 되냐며 타박해서 하마터면 상처를 줄 뻔했으니까요.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위해, 원하는 만큼의 건반을 짚기 위해 손가락 사이를 찢듯이 손자도 자신의 의사 표현을 타인에게 잘 전달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청소년이 되어서 자신이 겪은 경험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아이로 자라게 하고 싶어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에게 ‘나도 그랬는데 지금은 괜찮아.’ 하고 말해 줄 수 있는 아이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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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의 머리 위로 손을 얹고 생각에 잠겼다. 친구를 괴롭혔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알려주기 전에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아이야 너를 그렇게 대하는 게 아니었단다. 그리고 엄마가 어린이집에 데리고 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단다. 아빠가 어디 있느냐고? 아빠는 아빠 집에 있단다. 때로는 엄마 아빠가 같이 살 수 없을 때도 있거든. 아니 아니 아빠는 회사에 갔단다. 이런 거짓말을 고작 네 살인 너에게 해도 되겠니? 또 한 번 미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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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발달센터에서 첫 놀이치료가 있었다. 놀이치료를 마치고 담당 선생님과의 상담에서 아주 강렬하고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었다. ‘할리갈리’ 놀이를 하며 관찰하니, 감정 표현이 다양해야 하는데 손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감정이 비어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기고 질 때의 기쁨과 속상함, 짜증, 갈등, 화, 지루함 등등의 감정적인 부분이 많이 비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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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부모가정, 조손가정, 독거노인…. 이런 식으로 낙인을 찍는 일은 피했으면 한다. 서류상 분류나 사회 복지 차원에서 불가피할지도 모르지만, 가능하면 이름을 불러주자.
조손가정도 아니고, 한부모 가정도 아닌 이은주 가정은 뽀삐와 정명이가 살고 있고, 정명이네는 뽀삐와 이은주가 산다. 가족의 정의가 다양해질 때 보다 더 많은 사람이 자유롭고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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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삐랑 산책하면 엄마하고 할머니 보고 싶은 마음을 잊을 수 있을까요?”
“아니, 보고 싶은 감정은 그런다고 잊혀지지는 않아. 계속 보고 싶지. 그렇지만 목요일 날 엄마하고 만나기로 했으니까 뽀삐하고 산책하면 조금은 마음이 위로를 받겠지.”
카톡 음성메시지에 방금 손자와 대화한 걸 녹음했다. 방금 한 말을 잊지 않으려고 녹음하는 나를 곁에서 지켜보는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글로 쓸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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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처럼 허허 웃는 아이 옆모습에 초록빛 조명을 받은 듯 그림자가 졌다. 놀이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엄마와 떨어지던 네다섯 살 때 보였어야 할 감정들이 이제 막 올라오는 거란다. 충분히 느끼고 표현해야 할 감정들 말이다. 인지 선생님께서는 아이가 엄마를 찾으며 울 때는 울게 내버려 두라고 했다. 그럴 때는 울음이 그칠 때까지 안아주다가 울음이 그치면 이렇게 알려주라고 했다.
“오래 울었으니까 힘들 거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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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천천히 배우며 성장하는 아이들’ 꼭지를 읽었다. 경계선 지능을 가진 아이들을 ‘느린 학습자’로 명명하고 있는데 차별언어가 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한 느낌이 들어서 바로 사용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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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어젯밤 엄마가 보고 싶다면서 한 시간을 보챘다. 힘드니까 이제는 그만 울자고 안아주면서 설득했는데 아이의 울음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나는 지쳐갔고 나중에는 귀마저 따가웠다. 30킬로그램의 아이를 안고 달래주려니 허리가 끊어지는 통증을 느꼈다. 간신히 울음을 그친 아이는 수수께끼 책을 펼치고 서로 다른 그림을 찾아 열심히 동그라미를 치다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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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물 복용 초기 일주일 동안 아이를 지켜본 결과, 아침 7시에 약을 먹은 뒤 2시간 내로 몸이 떨린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아이의 약을 복용해보았다. 역시 같은 경험을 했다. 모든 양육자가 그렇겠지만 나는 두려웠다. 약의 효능보다는 약의 부작용이 먼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선택해야만 했다. 주의집중을 하도록 각성제 역할을 하는 약을 먹였을 때 발생하는 장점과 단점 중에서 어느 것을 우위로 둘 것인가? 다행스럽게도 ‘무서운 꿈을 꾼 것도 아닌데 떨려요.’라고 했던 정명이가 2주 뒤에는 내성이 생긴 탓인지 괜찮아졌다고 말했다. 그렇게 몇 주를 오직 정명이를 관찰하느라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질 듯했던 나는 단편적인 정보만 접하고 약을 먹이지 않겠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큰조카를 이해시키는 데 애를 먹었다. ‘자신의 아이가 ADHD임을 인정하는 데까지 시간이 걸리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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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약을 먹이지 않겠다면 네가 데리고 가서 키우렴. 혼자 아이를 돌보면서 직장에 다니려면 육아 돌봄 서비스를 받아야 겨우 출근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거야. 이게 우리 현실이야. 지금까지는 온몸으로 가족을 지탱해왔지만 이젠 내 심장도 더는 버티기 힘들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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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반드시 부모여야 한다는 편견과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손자의 놀이치료 선생님과 상담 중에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나이 든 몸으로 기력이 떨어지면 어떻게 할 거냐?”고.
양육자를 앞에 두고도 이런 식의 질문을 할 수 있는 현실이 갑갑했습니다. 문제는 아직 ‘부모가 될 준비’가 안 된 사람이 있다거나 어떤 이유로든 ‘부재중인 엄마, 아빠’가 있다는 사실보다 사회가 그 진실을 계속 외면한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로는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정작 도움을 요청하면 엄마가 아니라는 이유로 상담 중에 차별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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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가족과 살면서 어느 순간 세상이 공평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편견도 없고 차별도 없는 세상 말입니다. 양육자가 할머니이든, 할아버지이든, 고모나 이모, 삼촌이든, 아니 사회복지사든지 상관없이 한 아이를 건강하게 성장시키기 위해 마을 전체가 연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을 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그날까지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은 오직 특별할 뿐입니다.
--- 본문 중에서